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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보내소서 (사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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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소서 (사 6:1-8)


6월 7일이면, 우리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지 68주년을 맞게 됩니다. 우리교회는, 126년 한국교회 역사의 折半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진 교회입니다. 120년 넘는 역사를 가진 교회들이 몇몇 있습니다. 우리교단 남대문교회(126년), 새문안교회(123년), 감리교단인 정동제일교회(125년)입니다. 

특히 남대문교회는, 한국교회 선교역사의 기점으로 보는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교회입니다. 1884년 9월 2일에, 알렌 선교사가 한국 땅에 첫 발을 딛습니다. 그해 11월 12일에, 알렌 선교사의 가정에서 시작된 가정예배가 남대문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남대문교회 역사는, 한국교회 역사와 같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새문안교회는, 우리나라장로교회의 효시嚆矢입니다. 장로교회 선교사로 오신 언더우드(H. Horton Underwood, 1859-1916) 목사님의 사랑채에서, 1887년도에 14명의 한국인과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그 시작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들 세 교회 역사에 비하면 절반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초대 용희창 목사님이 1942년 6월 7일주일에 20여명교우들과 당시 자전거포를 경영하던 김태성 씨 2층 집을, 월세 20원에 빌려 예배드린 것이 우리교회의 시작입니다. 日帝 末인데 당시, 정릉지역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아리랑 고개 너머, 우거진 山林 속에 위치한 작은 村落이었습니다. 

우리교회가 세워질 당시 아리랑 고개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한낮에도 어두웠다고 합니다. 고개를 넘어 다니던 길은,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길이어서,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면 길옆으로 비켜서야 할 정도의 오솔길이었다고 합니다. 밤에는, 여우나 늑대가 가끔 나타나기도 해서, 혼자 다니기가 어려워 무리지어 가든지, 미아리 고개로 돌아다녀야 할 만큼 험준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주민은, 정릉지역 약 300여 호, 배밭골 20여 호, 건능골 15여 호, 청수장 쪽 `50여 호, 도합 500여 호가 살고 있던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68년이 지난 오늘, 정릉일대는, 서울시 균형발전의 한 핵심 축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변화의 중심지입니다. 주변여건만 변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가치, 이유, 삶의 방식도 68년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말 그대로 사회변동의 한복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서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時代와 歷史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급변하는 사회변동 속에서, 세상의 소망이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회의 바른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저, 지나간 6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으로는, 그 존재의미를 가지기가 어려운 시대에 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교회존립 환경은, 68년 전 우리교회가 처음 개척될 때보다 더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교회존립환경이, 68년 전보다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68년 전은, 외부적인 요인(정치, 경제, 사회적인 낙후성) 때문에 교회의 존립이 어렵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를 포함해서, 한국교회가 당면한 오늘의 위기요인은, 교회 外部로부터 오는 도전들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위기요인은, 교회내부로부터 온 것입니다.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양식들’(그것이 제도든, 조직이든, koinonia교제든 Sacrament성례전이든, 설교든, 교회가 하는 수많은 선교든, 각종 프로그램, 회개운동, 그것이 무엇이든)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마 6, 33) 않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잘못된 존재양식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자유스러운 교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존재양식을 바꾼다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이전에, 교회가 무엇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부터 고민해야 합니다.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쉬운 일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1)自己를 否認하고 (2)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 24).

본문,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 사건은, 68년 역사를 가진 우리교회가 어떻게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가? 그 존재방식을 말씀해 줍니다. 

오늘 우리시대는,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 버린 시대입니다.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려면 교회 안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합니다. 

선지자 사무엘 시대, 블레셋이 쳐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를 대적하지 못하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法櫃’를 가져다가 이스라엘 군대 진중에 두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法櫃’가 마치 무슨 神秘한 呪術的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줄로 알고, 싸움에서 이길 줄 알았던 거지요. 

사람들을 보내, 만군의 여호와의 言約櫃(法櫃)를 이스라엘 진중으로 가져옵니다. 가져와서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 법궤와 함께 있게 했습니다. ‘여호와의 言約櫃’가 이스라엘 軍隊 陣營에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 군대가 얼마나 크게 외쳐댔는지, “땅이 다 울렸다”합니다(삼상 4장).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땅이 울리도록 외쳐댔지만,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낭패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 곁에 있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 당합니다. 수호신처럼 여겼던 법궤는 블레셋 군대에 빼앗기고 맙니다. 悲報를 들은 엘리 제사장도, 의자에 앉았다가 뒤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그의 며느리도 마침 해산하게 되었는데, 해산하다 죽습니다. 죽어가면서, 낳은 아들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고 죽었습니다(“하나님의 榮光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왜, 졌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믿음을 가지는 데는 관심 없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法櫃’가 무슨 주술적인 能力이나 가진 것처럼 여기던 ‘이스라엘의 거짓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신앙, 인정하실 리가 萬無하지요. 

오늘 교회도,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보다는, 우리끼리 서로 사람의 이름 높이기를 좋아합니다. 새 포도주와 같이 살아서 역동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制度나 傳統, 儀式, 規例, 遺傳들을 더 重視합니다. 그러면서 보다 더 중요한 “살아 있고 活力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劍보다 예리하여, 魂과 靈과 關節과 骨髓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정작 무시합니다(히 4, 12). 

하나님의 선민인 유다 백성들의 역사가 그러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召命을 받았을 때, 유다 백성들이 어찌했습니까?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너무 잘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숫양을 잡아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살진 수송아지 기름을 드렸습니다. 수소들과 새끼 숫양들과 숫염소의 많은 피로, 江을 이루듯이 제사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올 때, 내 (성전)뜰을 밟는 너희 손에서 누가 이것을 요구했느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香도 내게는 가증한 것이다. 초하루(월삭)와 매주 지키는 安息日 모임, 聖會와 아울러 惡을 행하는 너희 죄악을 견디지 못하겠다. 그것들이 다 내게 짐이라. 내가 짊어지기에 지쳤다”하셨습니다. 

그런 時代에 살던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幻像 中에, 높이 들린 寶座에 앉아 계신 主님을 뵙니다. 그 主님의 옷자락이 온 殿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또 스랍들이 主님을 위로 모시고 섰는데, 각각 여섯 날개가 있어, 둘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스랍들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거룩하시다(카도쉬, Sanctus),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시여, 온 땅이 그의 영광으로 가득하도다.” 그 외치는 스랍들의 소리에, 성전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고, 연기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서 첨으로, 유다 백성들의 역사와 거짓 신앙 속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영광’의 本質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의 영광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합니다(요 1, 14). 그 사도 요한이, 나중에 밧모섬에 유배 되었을 때 환상 중에서, 천상의 보좌에 앉으신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을 또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하는데, 세상의 그 어떤 人間, 貴人, 그 어떤 存在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榮光, 예수 그리스도의 榮光을 잘 모릅니다. 그 영광, 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榮光, 보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왜 보아야 합니까? 그 主님의 榮光을 보아야만 나 자신의 卑賤함, 허물됨, 거짓됨, 연약함, 罪惡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언제나 상대적인 의를 가지고 남을 판단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영광스러운 主님을 보아야만 나를 압니다. 이사야의 탄식 보십시오. “아, 禍로다. 내가 망했다. 왜냐하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고,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내가 살고 있으면서, 참으로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내 눈이 보았기 때문이다”(사 6, 5). 

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오늘 우리는, 우리의 비천함, 연약함, 허물됨을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못남을 듣고, 봅니다. 지금, 72.2%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종교단체들이 ‘종교의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RCC vs RC)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지난 2005년도 기준으로 10년 전과 비교할 때, 천주교 신자는 74.4% 증가했고, 불교신자도 3.9%증가했는데, 개신교는 오히려 1.6%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한국개신교에 대한 신뢰도에서 48.3%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신뢰도 불신도 아닌 응답이 33, 3%, 신뢰(약간 또는 적극)한다가 18.4%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한 응답이 50.5%입니다. 우리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사회기관으로 시민단체가 50.3%이고, 개신교회가 12.2%로 두 번째이고, 그 다음이 언론 9.2%, 사법부가 8.1%, 국회가 1.1%입니다. 

상대적인 평가지만, 교회는 우리시대 사람들로부터도, 우리사회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그의 영광을 보면, 우리모습은 어떻겠습니까? 이사야의 고백이, 우리 안에 일어나기를 所望합니다. 바로, 내가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고백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 禍로다. 내가 망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내가 살고 있으면서, 참으로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내 눈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거룩의 본질을 본 사람입니다. 거룩의 본질을 보고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웃사가,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만지다 죽임 당했습니다. 웃시야 왕은, 자신의 王權이 强盛하여지자,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구별된 레위지파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다, 하나님이 치셔서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도, 교만하여 왕권으로 사무엘 선지자의 제사 자리를 넘보다가, 하나님께 廢位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 앞에, 자기 허물을 보는 者, 자기의 罪로 인해 歎息하는 자, 哀痛하는 者는 복이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탄식하던 이사야 선지자에게, 스랍 중 하나가 제단 위에서 불타는 숯을 부집게로 취하여, 그의 손에 들고 와서,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을 깨끗케 해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十字架에 달리신 主님 앞에서 우리의 감추어진 罪惡을 깊이 보는 겸손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義, 歷史, 傳統, 信仰, 外貌를 자랑하기 앞서, 도리어 우리의 軟弱함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義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교회에서 높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도 主님께서 말씀하실 겁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낼 지, 누가 하나님을 위해서 갈 자인지,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逆說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깨끗함을 받은 이사야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적극적인 ‘말 걸어오심’입니다. “이사야 네가 바로 내가 보낼 자다, 이사야 네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갈 자다.” 그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하나님의 ‘말 걸어오심의 상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가 이 시대 속에서 감히 “하나님, 제가 여기 있으니, 저를 보내십시오” 應答하는 교회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교회 성도 된 것을 기뻐하는 교회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主님, 우리 교회를, 이 時代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사용하여 주옵소서. 아멘.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68년 된 우리교회도 입술이 부정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교회가 비록, 지금 입술이 부정한 이 나라와 이 백성 가운데 살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보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거룩하신 主님의 榮光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부정한 입술이 깨끗함을 받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나아가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를 보내주소서” 應答하는 교회로 서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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