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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 (롬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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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 (롬 6:23)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꽤 오래 된 가요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는 이 노래를 불렀던 가수 ‘백설희’씨가 지난 5월 5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말인데, 금년의 봄은 이 말이 참으로 실감나는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금년에는 봄에도 쌀쌀한 날씨가 많았고, 또 비가 얼마나 자주 내렸습니까? 그런데 오늘이 5월 30일이니 금년의 봄은 어느덧 아쉽게 다 지나가는 가 봅니다. ‘봄날은 간다.’ 이렇듯 자연의 봄, 계절의 봄은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에 계절이 있고 봄이 있듯이, 인생의 계절에도 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해서 새 출발 할 때는, 인생의 봄에 해당될 것입니다. 감미로운 사랑이 있고, 행복한 웃음이 있고, 가슴 벅찬 꿈이 있습니다. 세상사는 재미가 있을 때 그 때는 과연 인생의 봄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언제까지 신혼의 단꿈에 취해서 살수만은 없습니다. 피땀 흘리며 애쓰고 고생해서 집도 마련하고, 논밭도 사야하고, 자녀들 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이러할 때의 인생의 계절은 퍽이나 힘들고 고단한 여름날입니다. 그렇지만 애쓰고 고생한 보람으로 살림이 늘어나고, 의젓하게 장성한 자녀들을 바라볼 때는, 풍성한 수확의 꿈에 가슴 부풀어 있는 인생의 가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젊음도 사라지고, 기력도 쇠잔해지고, 눈과 같은 흰머리, 앙상한 나무와 같이 뼈만 남은 노후는, 인생의 겨울에다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던 아내, 혹은 남편도 이 세상을 떠나고, 정다웠던 벗들도 먼저 가고, 홀로 남아 있는 노인들의 생활은, 참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인생의 겨울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봄은 겨울이 지나면 다시 새봄이 돌아오지만, 인생의 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뒷동산 소나무 날이 갈수록/파르릇 파르릇 파래 가는데/꼬부랑 영감님 턱밑에 수염/나날이 갈수록 희어만 가네.♪ 인생의 가을인 노년 시대를 지나면 인생의 겨울인 죽음이 옵니다. 죽음에는 남녀노소가 없습니다. 언제 우리 앞에 인생의 겨울이 닥쳐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인생은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봄날은 간다!’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철학적인 말입니까? 칠십년 혹은 팔십년 인생 전체가 마치 화살이 날아가듯이 빨리 달아나는데, 인생의 봄날과 같은 젊음과 청춘은 또 얼마나 빨리 지나가겠습니까? 이렇듯 자연의 봄도 가고, 인생도 가는 것이 만고불변의 철칙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가리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 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임종 시에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면, 저와 여러분도 언젠가는 분명히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도서 7장 2절에 보면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초상이고 죽음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봄날은 가고 인생도 분명히 갑니다. 인생이 가는 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죽었다고 하고 초상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을 때 또 다른 말로 ‘혼이 나갔다.’ ‘영혼이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지극히 옳은 말이고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가리켜 ‘영혼이 떠났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죽음의 의미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두 가지 요소 곧 신체와 영혼으로 합성된 존재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창 2: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흙으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사람을 ‘아담’이라고 하는데, 아담이라는 말은 ‘아다마’에서온 말로, 그 뜻은 바로 ‘흙’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는, 마네킹처럼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흙으로 만든 마네킹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생기’란 ‘숨’ ‘호흡’ ‘기운’ ‘영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은 마네킹 같은 사람에게 ‘후’하고 ‘생기’ 곧 ‘영혼’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 곧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몸보다 영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통령이 되었든지 미스 코리아가 되었든지, 그에게서 영혼이 떠나면 누구나 시체가 되고 송장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혼의 소중함도 가치도 모르고 몸뚱이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인생들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죽음은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어서, 인생은 모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데, 그 죽음의 종류는 천차만별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낙태로 죽는 죽음부터, 사고로, 질병으로, 전쟁으로, 테러로, 자살로, 타살로, 화재로, 익사로, 노환으로 죽습니다. 이렇듯 죽음의 종류가 천차만별이지만, 성경은 죽음을 크게 세 가지 의미로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인간은 몸과 영혼 두 가지 요소로 합성된 존재라고 했는데, 육체적인 죽음이란 몸과 영혼이 하나를 이루어 살던 인생에게서 육체와 영혼이 서로 떨어지고 나누어지고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혼이 나갔다’ ‘영혼이 떠났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맞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죽음을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 꽃을 보십시오. 이 꽃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지금 이 꽃은 아직 싱싱하고 향기도 있고 그래서 살아있는 것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꽃은 죽었습니다. 이 꽃은 아무리 물을 갈아주고 환기를 시켜주어도 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꽃은 생명의 근원인 뿌리에서 꺾어진 절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인생, 곧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생은, 여기 이 꽃과 같아서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가리켜 영적으로 죽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영혼과 몸뚱이가 지옥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천년, 만년, 억만년 영원토록 형벌과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1)육체적인 죽음 2)영적인 죽음 3)영원한 죽음 이 세가 죽음 중에서 신자는 몸과 영혼이 나누어지는 육체적인 죽음만을 겪게 되지만, 불신자는 육체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고, 영원히 죽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사망’했다고 합니다. 곧 죽고 망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억만 장자로 살고, 권세를 누리고, 장수하고, 쾌락을 누린다고 해도, 육체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고, 그래서 장차 영원한 지옥 불 못에 떨어져서 세세무궁토록 고통을 겪게 된다면 그보다 더 망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다. 그래서 불신자가 죽으면 철저하게 죽고 망했기 때문에 ‘사망’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왜 죽음이 찾아왔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순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칠십년 혹 팔십년 살다가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연 현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좀 더 오래 살다 죽으면 호상이라고 슬퍼하지도 않고, 그래서 상가 집에서도 호탕하게 웃고 떠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죽음은 절대로 자연 현상도 아니고, 순리도 아닌 것을 이 시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인간의 죽음의 원인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렇습니다. 죽음은 절대로 자연현상이나 순리가 아니요,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요, 형벌이요, 심판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 세계에 있는 모든 불행과 저주, 한숨과 눈물, 질병과 죽음은 범죄한 인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형벌인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간음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 사람을 죽인 것만이 죄니까? 성경에서 죄를 가리키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를 ‘하말티온’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표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자, 이 그림을 보십시오. 죄란 이렇게 표적을 맞추지 못하고 화살이 빗나간 것처럼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곧 표적과 같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과 빗나간 우리의 행동, 우리의 말, 우리의 생각을 모두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지은 죄를 합하면, 사람마다 죄가 머리털보다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으며” 

그리고 죄는 반드시 대가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았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이 교도소에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감옥에 가지 않더라도 사람은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기도 하고, 끝내는 노무현 대통령처럼 목숨을 끊어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죄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간단한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 감옥에 가서 수감생활을 하기도 하고, 또는 특사로 풀려나기도 하고, 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을 꿈에도 모릅니다. 그래서 죽으면 끝이라고 믿고, 눈 감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감으면, 죽으면 절대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니 눈 감으면 그때부터 시작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서론과 같다면, 사후의 삶은 본론과도 같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죄인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악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두려워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의 참상을 가리켜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들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셨고, 계 14:10-11절에 “불과 유홍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과 심판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고, 영원한 지옥형벌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위하여 한 분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르고 십자가에서 죽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양 손과 양 발에 못 박히시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시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즉 금요일 오후에 죽으셨다가 삼일만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 곧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것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예수를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가리켜 고해라고 합니다. 거친 파도와 풍랑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바다처럼, 세상은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지난 3월 26일 천인공노할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46명의 해군장병들이 차가운 바다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만행을 심판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죄와 사망의 바다에 빠져 죽게 된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 이 그림을 보십시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죄와 사망의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척의 구원선이 있습니다. 이 구원 선은 바로 하나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 선으로 연결된 생명줄을 보십시오. 왼쪽의 튜브에는 밧줄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또는 자기의 행위나 선행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을 뜻하는 그림입니다. 불교의 구원관은 바로 이 자력 구원입니다. 

그래서 입산수도를 하고, 고행을 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관은 타력 구원입니다. 오른쪽 튜브를 보십시오. 이 튜브에는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는 구원 선으로 향하는 생명줄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바다에 빠져 죽게 된 인간은, 하나님께서 내미신 생명줄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으며,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죽은 자를 세 번이나 살리셨습니다. 첫 번째는 열두 살 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으며, 두 번째는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상여 길에서 살리셨고, 세 번째는 죽어서 장사되고 썩어 냄새까지 나는 나사로를 나흘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세 번식이나 살리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증거를 입증해 보이셨고, 마침내 자신이 부활하심으로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5월 30일입니다. ‘봄날은 간다.’는 노래처럼 계절의 봄도 가고, 인생의 봄도 가고, 인생도 갑니다. 인생이 가는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최희준의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아시지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이 하숙생처럼 이 땅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인간이 죽어서 가는 장소는 천국과 지옥 두 곳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희락과 복락만이 가득한 영원무궁한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저주와 고통만이 가득한 영원무궁한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들, 곧 여러분의 부모님,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생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사랑과 평화, 희락과 행복만이 충만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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