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 (행 1:6-11)

  • 잡초 잡초
  • 250
  • 0

첨부 1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 (행 1:6-11)
  

2009년 깐느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특별초청을 받은 <여행자>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진희>라는 아홉 살짜리 소녀의 이별과 만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빠가 여행을 가자고 하면서 새 옷과 새 구두를 사 줍니다. 그리고 커다란 케이크도 사줍니다. 그러나 진희가 아빠와 도착한 곳은 고아원이었고, 아빠는 진희를 고아원에 맡긴 채 떠나버렸습니다. 아빠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은 아홉 살 소녀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런 시간이 지나면서 진희는 서서히 이별을 배우고, 아빠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한 소녀가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가슴 저리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도 이런 당혹스런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본문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사십 일을 지나셨습니다. 그리곤 감람산에서 제자들과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실 것을 예고하셨고, 그 예고대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셨고, 그 예고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승천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말씀하신 적이 있을 뿐이고, 명백히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이 있지만, 이 말씀만으로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전격적으로 승천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자 9절 말씀처럼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어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이것은 제자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영화에서 진희라는 아홉 살짜리 소녀가 더 이상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된 상황과 같습니다. 전에는 늘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잤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여행을 했습니다. 늘 자신들의 눈앞에서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셨고,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그 분을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지금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다가 승천 후에 볼 수 없게 되었고,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본 적이 없으니 그 상황이 조금은 다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제자들이나 우리나 같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제자들은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보는 듯이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눈으로 보지 못하면 확신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어 속담 중에 <Out of sight, Out of mind!>란 말이 있습니다.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눈으로 보려고 애를 씁니다. 요즘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면 휴대폰에 사진을 담아 다니면서 보려고 합니다. 우리 교우님들 중에도 휴대폰에 담긴 손자, 손녀 사진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진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래 전 방위 근무를 할 때가 생각납니다. 방위도 군대라고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훈련소에 들어가니 집 생각이 정말 많이 났습니다. 그 때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얼굴을 떠올립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노라면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부모님 얼굴을 떠오릅니다. 눈가의 주름살까지 생각납니다. 그럴 때면 제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제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음으로 예수님을 보는 법을 배워가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이란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자신들을 부르실 때의 일, 그 분을 따를 때의 결단, 그 후의 즐겁고 힘들었던 일들,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모습들과 그 표정들, 이적을 행하시던 모습,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던 진지하던 사랑의 모습,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게 끌려가시던 모습, 그 후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스런 모습, 그리고 부활하신 모습까지 떠오르면서 예수님께서 마치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제자들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힘이 생겼습니다.

12세기에 살았던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의 기쁨과 감동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버나드의 고백이 현재 우리 찬송가 85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묵상이 우리에게도 풍성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히브리서 3장 1절은 말씀하길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묵상하노라면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은혜가 떠오릅니다. 우리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그리고 입에서 고백이 나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런 주님과의 데이트를 즐기시길 기원합니다.

어떤 분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목사님, 제자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으니 눈을 감으면 그 분이 떠오르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모습이 생각난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얼마든지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묵상의 재료를 알려드릴까요? 그 재료는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읽고 또 읽으면 거기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복음서를 깊이 읽고 묵상하면 예수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신앙생활을 위해 말씀을 많이 읽으시길 부탁합니다. 성경에서 먼저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떠올리며 생각할 때 예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 마음에,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이 때 우리 마음에 계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묵상할 때 성령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난 한 번도 너를 떠난 적이 없고, 한 번도 네게서 시선을 돌린 일이 없다. 지금도 난 너와 함께 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승천하시기 전 능력 많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제자들은 담대했을 것입니다.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람들이 제자들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제 너희만 남았다. 너희가 무슨 힘이 있느냐? 그래 너희를 돕던 예수는 어디 있느냐?>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조롱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편 42편에 등장합니다. 시편 42편 3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너만 홀로 있지 않으냐고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조롱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대응했나요? 절망하고 낙심했습니까? 아닙니다. 시편 42편 5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낙심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당당히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고아가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저와 함께 계십니다. 난 언제나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깊은 묵상이 풍성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예수님을 보면서, 언제나 그 분과 동행하시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그냥 떠나신 게 아닙니다. 한 가지 약속을 남겨 두셨습니다. 11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흰 옷 입은 두 사람, 즉 천사들이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즉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그 후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제자들의 가슴에 설렘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그 날은 외로움이 끝나는 날, 그 동안의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일이 종결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고생하던 제자들이 그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날입니다. 얼마나 기다려지는 날입니까? 

어렸을 때 저희 집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도로가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차량의 통행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위험하다고 길가에 나가서 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둑도 자주 들었습니다. 한 번은 비가 많이 오는 날 밤에 도둑이 방안에까지 들어왔다가 나갔는데, 깨어 보니 이불에 물에 젖은 신발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어머니는 문단속을 철저히 하셨는데, 방문을 꼭 잠그셨습니다. 그리곤 초등학생인 제게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열쇠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안 계신 날이면 학교에 갔다온 후 꼼짝없이 방 앞의 툇마루에 앉아서 어머니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교회 일로 바빴고, 해가 진 후에 오시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런 날은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였습니다. 어머니 없이 홀로 있는 시간은 힘든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오시면 달려나갑니다. <엄마, 왜 이제 와?> <아이구 우리 아들, 기다리느라고 힘들었구나....> 하면서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계란말이며, 두부찌게며, 제가 좋아하는 반찬이 가득한 밥상이 올라옵니다. 그 순간엔 툇마루에서 기다리던 힘든 것은 다 잊혀졌습니다. 어머니는 말씀합니다. <엄마가 내일도 늦는데, 내일도 잘 기다리면 맛있는 것 해 줄게....> 그러면 저는 그 다음날도 또 기다립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기다리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오신다고 하신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인내는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사랑하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젊어서 연애하실 때 사랑하는 사람을 몇 시간씩 기다린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5분도 기다리기 힘듭니다. 

신앙에는 기다림이 반드시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을 기다립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신앙생활의 필수과목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 날 예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성도란 그 날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삽니다. 그 분을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 생전에 오시지 않으면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것, 예수님 만날 날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 세상이 끝나면 그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신앙이 지나치게 현실화된 나머지,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 때 이 세상은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만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영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십시오. 그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의 삶을 투자하십시오. 예수님의 재림 이후의 세상을 믿음으로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에 놀지 말고,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툇마루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면서 놀지 않았습니다. 툇마루에 책을 펴놓고 숙제를 했습니다. 숙제를 하고 있을 때 이웃에서 쌀가게를 하시던 집사님이 종종 오셨습니다. <운성아, 엄마 아직 안 오셨구나. 그런데 너 혼자 공부하니? 기특하기도 하지. 네가 이러니 너를 우리 사위로 점찍었지. 너 크면 우리 순정이랑 결혼해라!> 제가 그 때부터 인기가 많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 유명한 8절 말씀이 우리가 할 일을 보여줍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일,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하고 전도하는 일이 우리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이게 예수님께서 남기신 숙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왔다가 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오고 오는 세대로 하여금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흔적을 남깁니다.

종교개혁자 칼빈 선생님은 묘비도, 자녀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칼빈이란 사람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한 평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일에 자신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들의 인생에 예수님을 심으십시오. 그들의 가슴에 복음을 심으십시오. 그들이 후에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꼭 소중한 이들의 가슴에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시고, 결국엔 천국으로 인도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흔적을 남기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그 흔적들을 장차 천국에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어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이 시대에 마음으로 예수님을 보면서 숙제를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급을 기억하면서 인내하는 믿음으로 그 날이 이르기까지 승리하길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