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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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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9-13)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한 다음 가장 먼저 나오는 기도의 주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새 생명입니다. 예수 믿고 새 생명을 얻은 하나님 자녀들은 또한 이 땅에서 육신의 생명을 위하여 부지런히 살아갑니다.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매일의 양식을 제대로 섭취해야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인도의 프라흘라드 자니라는 83세 노인은 지난 70년간 음식을 먹지 않고 살고 있다는 뉴스가  5월10일자 신문에 났습니다. 인도의 국방연구개발기구가 이 노인을 대상으로 15일간 관찰한 결과 보름 동안 물도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뇌와 장기, 혈관을 검사한 결과 그 수치가 안전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 기이한 노인처럼  평생을 살 수 있다면 먹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음식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이는 먹는 즐거움으로 산다고 할 만큼 먹는 일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먹는 일이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중요한 부분이니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한 다음 가장 먼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은 여러 의미로 해석됩니다. 첫째, 말 그대로 오늘 나에게 필요한 양식입니다. 먹을 양식이 넉넉하게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하루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기도가 됩니다. 매일의 양식은  한 가정을 이끄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베푸는 당연한 책임(?) 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굶는 자식을 두고 무관심으로 외면하겠습니까? 하늘 아버지 역시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에서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을 모른체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자녀들은 당연히 아버지께 오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합니다.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여행할 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내려주신 양식, 만나를 예로 들어봅니다.  애굽을 떠나온 지 한 달이 지나자 가지고 나온 양식이 바닥이 났습니다.   백성들은 즉시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하는 말을 합니다(출16장).   3박4일 교회 수련회를 나갔는데 가지고 간 식량이 이틀만에 다 떨어져 집에 가는 날까지 금식해야한다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들 가운데 말 없이 잠잠히 따를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분명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불평하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이처럼 먹는 일은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의 형편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매일 아침에 하늘에서 양식이 비같이 내릴 것이니 백성들이 장막 밖으로 나가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라.  양식을 거두되 가족들의 수에 따라 딱 하루 먹을 분량을 거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시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이른 아침에 밖에 나갔더니 땅위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덮여있습니다.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주신 양식이다’하였습니다.  

‘만나’라는 히브리말로 ‘만후’,‘이것이 무엇이냐’는 말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매일 아침 식구 수에 따라 일인당 하루 분량으로 한 오멜(약 2리터 정도)의 만나를 거두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을만큼 되었습니다.  그러나 혹시 내일 아침에는 만나가 안내리면 어쩌나 불안하여 더 많이 거두어 다음 날 아침까지 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사람이 없었을까요? 오늘날도 전쟁이 날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에 너도나도 쌀과 라면을 사재기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위기 상황에 대단히 민첩하고 준비성이 강한 사람들의 생존방식입니다.   

그런데 어제 아침에 욕심을 내어 내일 먹을 것 혹은 할 수 있는대로 많이 거두어 장막 안에 저장한 만나가 다음 날 아침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양식을 주시며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하신 뜻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라’하신 것은 그들이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양식 걱정 하지 않도록 날마다 변함이 없이 공급하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오늘은 있다가 내일은 없을 수도 있는 불규칙한 공급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이 없이 내리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 중에 이 시험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의 만나를 거두어 그날 하루 분량을 먹고 나머지는 내일 아침까지 간수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휴식하는 날이니 만나가 내리지 않을 것이며 그날 미리 거둔 양식은 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떤 이들이 안식일 아침에 만나를 거두러 나갔습니다.   어제 거둔 만나가 혹시 벌레 먹으면 오늘 굶을 수 있다는 염려때문입니다. 그런데 안식일 아침에 나가보니 과연 아무 것도 없어 빈 그릇으로 돌아왔습니다. 안식일 아침에 들에 나갔던 사람들이 빈 그릇으로 돌아오며 얼마나 멋적고 부끄러워 했을까 상상이 갑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하여 헛수고 하는 백성들을 보신 하나님께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책망하셨습니다. 욕심을 부려 너무 많이 거두어 벌레 먹은 만나, 안식일 전에 거둔 이틀 양식은 썩지 아니한 것, 그리고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은 것 바로 이것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무엇인가 확인시켜주시는 실물 교훈입니다.   하늘의 만나가 내린 첫 주간의 경험을 통하여 백성들은 그제서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용할 양식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일어나 들에 나갈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 들판으로 나가 자기 가족들이 먹을 하루 양식을 거두어 오는 수고만 하면 되었습니다. 신비한 하늘 양식이 내린 첫 주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감과 호기심 그리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다음 주간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공급되는 만나를 보고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광야 40년 여행기간 하루도 빠짐 없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살았던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광야를 통과하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미리 염려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매일 매일 그 약속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전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먹은 만나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생존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공급하신다는 약속의 표였으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도록 하신 신앙훈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같은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을 통과하는 주의 자녀들에게 ‘하늘 아버지가 매일의 양식을 공급하신다. 두려워 말고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둘째로, 일용할 양식은 오직 먹을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그 무엇으로 해석됩니다. 일용할 양식이 가장 사소한 문제이면서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것처럼, 우리는 일상의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대단히 큰 문제까지 꼭 필요한 일들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사소한 삶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홀로 견디기 어려운 인생의 무거운 짐의 문제를 내놓고 대화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자상하신 하나님께 내 모든 생각과 마음을 털어놓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기도라는 말입니다. 자녀의 문제, 친구나 이웃과의 불편한 관계, 재정적인 곤란과 질병, 진로와 장래의 문제 등 삶의 모든 문제들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믿음으로 구하는 자녀는 또한 이 모든 문제를 들고 아버지께 찾아갑니다. 

예수께서는‘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남용하여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무엇이든지’ 라는 말은 꼭 필요한 그 무엇입니다. 오늘 나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물질이나 문제를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도저히 방법이 없는 형편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위하여 주의 이름으로 구하는 자녀에게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매일 아침 만나를 먹던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가 지겹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생선과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그립다.  우리의 정력이 쇠약해졌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 뿐이구나’하며 불평하였습니다(민11장). 만나를 먹고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영양 불균형으로 무슨  질병에 걸릴까 염려한 것이 아니라 매일 똑같은 것을 먹는 것이 지루했다는 말입니다. 역사상 어떤 민족도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하늘 양식을 먹었는데 불평이 나왔습니다. 내일 먹을 양식을 미리 준비하여 굶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비축하고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평하며 원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가족들과 함께 멋진 외식을 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불평하십니까? 남들처럼 멋진 곳을 여행하고 마음껏 홀리데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나를 슬프고 우울하게 합니까? 가족들이 단란한 분위기에서 멋진 외식을 하고 멋진 곳으로 홀리데이를 가는 것은 때로 삶의 윤활유가 되는 좋은 기회이지만 그런 여유가 없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건강과 가정과 일터와 학교와 그리고 교회에서 나에게 주신 사명과 은사를 따라 충성스럽게 살아가고, 내게 주신 가족들과 이웃들과 사랑하며 살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불필요한 사치와 허영심보다는 소박하고 단순한 삶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도리어 복입니다. 

허영심과 과도한 욕심에서 나온 기도는 금물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듭니다.  로또 복권 사들고 1등 당첨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은 당연히 괜찮다고 합니다. 1등 당첨 되면 자선사업을 위해 헌금하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좋으실 것이라는 마음입니다. 대단히 믿음 좋은 듯 하지만 불로소득을 기대하는 도둑 심보가 아닐까요? 십분의 일을 드려도 아직 십분의 구라는 엄청난 것이 공짜로 돌아오니 실속있는 장사라는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땀 흘려 얻은 노동의 댓가가 아니라 요행심을 바라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얌체들의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은 사치와 허영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진정으로 필요한 물질이나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30:8,9에 ‘나로 하여금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말씀합니다.  

이 기도가 주기도문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와 잘 어울리는 기도입니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물질이 너무 많아 부자가 되면 혹 배가 불러 하나님이 누구냐 하고 교만할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내 힘으로 수고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교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먹을 것이 풍족하게 되면 하나님을 잊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충고하였습니다(신8:12-18; 31:20). 그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면서 금방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너무 가난하여 남의 것을 도적질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확실하게 의지하고 ‘오늘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여 손으로 수고한 대로 먹는 복을 주옵소서’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건강한 기도입니다. 배고프면 도적질 할 유혹이 다가옵니다. 당장 내일 양식이 없어 근심하는 처자식을 두고 답답한 마음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배고픔을 면하려는 본능입니다. 몇 끼를 거른 어린 자식을 둔 부모들 중에 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과연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에게 소중한 제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천국을 가르치신 목표가 세상에서 이름난 부자가 되거나 세상 권세를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베드로와 요한의 형제들이 갈릴리 수산시장 독점권과 지중해 상권까지 거머쥘 수 있도록 하셨을 겁니다. 마태는 예루살렘 세무서장 자리에 오르도록 길을 열어주셨을 것이며, 가룟 유다는 로마군대를 통괘하게 물리치는 독립군 대장이 되도록 능력을 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유명한 부자와 권력가들이 되면 다른 사람들도 예수를 따라 잘 살아보겠다고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목표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고난의 길을 따라오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는 일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사단이 40일을 금식하신 예수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을 할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은 떡만 있으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진정한 삶을 사는 존재임을 알려주십니다. 오병이어로 무리를 배부르게 하시자 사람들은 조상 모세가 광야에서 베푼 만나의 기적이 나타났다 여기며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떠나가셨습니다.   그들이 품고 있는 헛된 생각을 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일하지 않고도 편히 먹으려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생각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일용할 양식의 참 뜻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하신 바울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건전한 노동의 댓가로 먹는 수고의 떡은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셋째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친밀한 교제에 참 목적이 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십니까?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통해 매일 자녀들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와 자녀가 매일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이상한 일일까요?   평생 먹고 살만한 재산을 유산으로 받은 다음 아버지를 잊고 사는 것이 옳습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녀로 사는 것이 옳습니까?   

시편123편의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성도의 자세를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개역개정, 시123:2)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주인의 손,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합시다.‘내 능력으로 알아서 할테니 하나님이 조금만 거들어 주세요’하던가 ‘하나님 하시는 일에 내가 힘이 좀 되어드릴까요’라는 자세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살던 시대 팔레스틴 서민들의 경제 상태는 지금처럼 먹거리가 풍성한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 중에는 정말 내일 양식이 없어 오늘 고민하며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와 유대인 동족에게 이중삼중으로 착취당하는 가엾은 백성들에게 하루 먹을 양식을 확보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하신 말씀 또한 기억합시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정의를 추구하며 산다면 내일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가난하고 병들고 억울함을 당하는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정의를 무시하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불의를 행하고 산다면 더불어 나누며 함께 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들이 양식을 무기로 삼고 약자들을 부리는 도구로 사용할만큼 악한 존재입니다. 한 쪽에서는 굶주려 죽어가는데 다른 쪽에서는 썩어가는 곡식을 처리하지 못하여 골머리를 앓습니다.  굶어죽는 모습을 보기 안타까워 양식을 보내고 물자를 보내면 배고픈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지 않고 일부 특권층에게만 돌아가고 전쟁 물자 준비하는데 사용합니다.  얼마나 사악한 인간의 본성입니까?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그러니까 못 주겠다고 양식을 가지고 생색을 냅니다.  

손으로 수고하여 정직하게 일하면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와 순리인데 사람들이 욕심을 부려 움켜쥐고 나누지 않으니 핍절하고 주린 자들이 나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빈약한 임금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일하고 싶지만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여 곤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소중한 기도제목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넉넉하게 살고 있는 나보다는 어렵게 살고 있는 이웃 형제들을 위한 공동기도가 됩니다. 나에게는 충분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없는 그 양식을 함께 나누는 삶을 실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눔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우리의 기도가 됩니다.  이 한 주간 주님의 기도를 나와 우리의 기도로 삼아 은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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