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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자녀에게 신앙을 계승하는 부모가 되자 (딤후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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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신앙을 계승하는 부모가 되자 (딤후 1:1-14)


부모들은 누구나 자기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이 사회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제몫을 누릴 수 있게 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먼저, 자녀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합니다.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인정할 정도입니다. 공부를 많이 시키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인 성공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부자 부모를 둔 사람은 아무 수고 없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부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재벌 기업의 총수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줍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이 아무 수고도 없이 막대한 부를 상속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회적인 지위를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가 집안에서 정치가가 나오고, 의사 집안에서 의사가 나오고, 법률가 집안에서 법률가가 나오고, 앞에서 언급한 재벌 기업의 자녀들은 부와 함께 사회적인 지위도 계승합니다. 이는 부모들이 닦아놓은 기반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데서 생겨난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계층 간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가 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을 위하는 데 있어서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디모데서는 사도 바울이 제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가 디모데를 일컬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디모데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입니다. 그러므로 외가의 영향을 받아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드디어는 그의 동역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디모데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였지만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행 16:2) 였습니다. 바울 서신에 보면, 디모데가 얼마나 충성스럽게 사도 바울을 도와 일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두 번에 걸쳐서 목회 서신을 써 보낸 것을 볼 때 디모데를 자기의 후계자로 여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디모데가 얼마나 신앙이 신실하고 행실이 반듯한 청년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우리의 자녀들도 디모데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어떻게 그와 같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본문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사도는 편지에 쓰기를 “3)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가진 거짓이 없는 믿음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계승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신앙을 계승하도록 관심을 갖고 배려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를 보고서 배웁니다. 부모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부모가 하는 것을 그대로 모방해서 자기의 것으로 삼습니다. 

이 때 자녀들이 본보는 것 가운데 신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은 제 부모의 신앙생활을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부모가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자녀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서 행합니다. 부모가 주일을 거룩히 알고 지키면 자녀들도 주일을 귀히 알고 지킵니다. 그러나 부모가 주일을 다반사로 범하면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주일을 경홀히 여기게 되고 맙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부모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감사하면 자녀들도 이를 보고 배워서 무슨 좋은 일이 생길 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일이 생겨도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게 됩니다. 부모가 기도생활에 힘쓰면 자녀들도 이를 본받아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기도하지 않으면 자녀들도 기도를 모르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실하게 믿는 부모를 둔 자녀들은 복이 있습니다. 

경남지역 초등학교 5-6학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어느 자료에 의하면, 초등학생의 절반 이상이 학교 공부를 포함해서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을 공부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응답한 초등학생의 89%가 9시간 이상 공부한다고 했습니다. 주말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3시간 이상 공부하며, 15% 정도는 주말에 8시간 이상 공부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초등학생들이 공부에 매달리다 보니 마음껏 뛰어 놀거나, 생각을 하거나, 동화나 위인전과 같은 책을 읽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초등학생들에게 그처럼 악착같이 공부를 시킬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학원에 가서 선행학습을 한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원에서 미리 공부를 해 오기 때문에 학교 수업시간에는 흥미를 잃고 졸거나 장난을 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시키는 공교육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학부모들이 주체성이 없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서 자녀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들의 인격을 키워주고 대인관계의 예의를 가르치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질서를 가르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부모는 생업에 바쁘고, 자녀들은 공부에 바쁘다보니 부모 자식 간에 만나서 대화할 시간을 만들기조차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오늘날 자녀 교육의 실상을 점검해 보고 정비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처럼 지식 교육에만 집중하고 인성교육을 등한히 할 때 과연 자녀들이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 자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짧은 안목으로 보면, 학교 공부에 치중하면 그만큼 남보다 더 잘 될 것처럼 생각 되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인격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 훨씬 더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해 나갑니다. 무엇보다도 학교 공부에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교육을 등한히 한다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처럼 어려서부터 신앙적인 가르침을 받고 자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인생의 시련을 만났을 때 신앙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시련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요?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둘 중에 누가 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순회 교사에게 몇 달 동안 읽기와 셈하는 법을 배운 것이 그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습니다. 게다가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에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생전에 그의 어머니는 저녁때가 되면 아이들을 모아놓고 기도문을 외우거나 성경 이야기를 외워서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링컨은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을 일평생 지켰으며,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지혜를 얻었으며,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링컨이 그토록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물려준 신앙의 결과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부모는 늙고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의 일평생 함께 하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부모의 능력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도록 신앙을 계승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명기 6장에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 

우리가 자녀들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못해도, 지위를 물려주지 못해도, 공부를 많이 시키지 못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만은 반드시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자녀들이 일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들의 교육에 혼신을 다합니다. 그러나 학교에 보내서 지식을 배우게 하는 것이 교육의 전부는 아닙니다. 교육이라는 말 속에는 지식을 배우게 하는 것 외에도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즘 한국인들의 자녀 교육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 교육에만 전념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입니다. 한 세상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청소년들이나 대학 청년들이 단지 이 사회에서 성공 출세해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면, 그들 개인이 불행하게 될 것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단지, 생존경쟁에서 이겨서 남보다 부자로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 사회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자기의 욕심만 충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이웃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의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지어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그 때 그는 마음속으로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곧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에게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결론으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많은 곡식을 거둔 것은 그가 부지런히 일하기를 좋아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이 사람이 곡식을 보관해 둘 창고를 크게 지을 계획을 세운 것은 제 때에 제 값을 받고 팔기 위한 것이므로 경영에 수완이 있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근면함과 경영 수완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에 이 부자의 영혼을 불러 가신 것은 그가 가진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의 말을 살펴보면, “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이 부자의 안중에는 이웃도 없고 더구나 하나님도 계시지 않았으며 오직 자기만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다 자기를 위해서 할 뿐입니다. 그러한 삶은 무익할 뿐 아니라 자기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힙니다. 이 부자는 그 많이 거둔 곡식과 준비해 둔 물건들을 누리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를 보시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부자를 보고 근면하고 경영수완이 좋은 성공한 사업가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일컬어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 부자만이 아닙니다. 누가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었더라도 그 지식을 가지고 자기만족과 자기 이름을 내는 데만 관심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예술가가 그 재능을 통해서 성취욕을 만족시키고, 대중의 인기를 얻고, 돈을 버는 데만 사용한다면, 그 사람 역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이는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건 가난하건, 지식이 많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건, 재능이 있건 없건 간에, 자기를 위해서만 사는 사람은 다 ‘어리석은 자’에 해당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큰일을 하였을지라도 결국은 인생을 허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일을 하였더라도 무익한 인생에 불과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자기 자신의 목적과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디모데는 젊어서부터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오늘날은 교회도 많고 기독교인들도 많아서 복음사역자들이 환영을 받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려면 많은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안일한 생활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을 위해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이르기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자신이 영광을 받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일을 이루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힘쓰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하기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목회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무슨 직업을 갖게 되든지 복음을 전하면서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경쟁위주의 사회를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경쟁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학교에서 자녀들이 다른 학생들을 친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쟁상대로 여깁니다. 그러니 어떻게 아름다운 우정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까?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동료로 알지 않고 경쟁상대로 여깁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동료들 간에 경쟁으로 인한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에게 ‘너만 잘 살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신명기 15장에 이르기를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8)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궁핍한 이웃을 보면 반드시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동족을 종으로 삼은 경우에는 육년을 섬겼거든 제 칠년에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더구나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양 떼 중에서와 추수한 곡물 중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종 되었던 그 사람이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의 율법을 읽어 보면, 사회적인 약자를 따뜻하게 배려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나라의 법과 제도가 모세의 율법과 같다면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이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5장 8절에 이르기를 ‘집을 연달아 차지하고 땅을 차례로 사들이는 자들아! 빈터 하나 남기지 않고 온 세상을 혼자 살듯이 차지하는 자들아!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이 세상에서 혼자만 살 것처럼 욕심을 내서 땅이나 집들을 사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재화는 무한정 많은 것이 아니라 한정되어 있으므로 내가 많이 차지하면 나머지 사람은 적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되는 정글로 보지 않고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면서 더불어 살아야 할 곳으로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모세의 율법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와 고아들, 이방 나그네들에 대한 배려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더구나 레위기 19장 18절에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자녀들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학생들에게 “경쟁보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될까요? 안타깝게도 가정과 학교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귀가 아프도록 듣는 말은 “더 악착같이 덤벼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경쟁을 부추기는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면 경쟁할 때보다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저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자녀들에게 이웃 사랑을 가르치고 있으십니까?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으로 가르침을 받아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디모데가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몸이 아파서 눈물을 흘린 것도, 누구를 증오해서 흘린 눈물도 아닙니다. 저는 그것은 그가 불신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서 흘린 눈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흘린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같은 디모데를 자기의 후계자로 삼아 “13)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고 부탁했습니다. 

자녀들이 이 땅에서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타주의자가 되기를 원하시거든,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고 이웃 사랑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어려서 경쟁심을 심어주면 나이가 들어서도 경쟁심에 사로잡혀서 곤비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서 남을 배려하고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면 일평생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면서 나누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에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시 127:3)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자녀들은 본디 하나님의 소유인데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식이니까 내가 원하는 인물을 만들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녀이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물려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자녀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자녀들이 디모데처럼 일평생 믿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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