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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고질병 민족의 고질병 (창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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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고질병 민족의 고질병 (창 20:1-18)


아내를 누이라 속인 아브라함

오늘 읽은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랄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자기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속입니다. 사라의 뛰어난 외모를 인하여 자기를 해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이로 인해 자기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기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위기를 수습하고 아내 사라를 무사히 돌려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을 모두가 인정받는 선지자로 높이 세웁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또 한 번 위기를 맞은 아브라함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그것보다 차라리 “또 그래?”라는 반응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이미 전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기근을 피해서 애굽 땅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다 애굽 왕에게 아내를 빼앗겼고 그때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보이는 아브라함의 행동은 좀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것이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났던 사건이었다면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하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한지 25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도시 국가 전쟁에서 승리를 맛보기도 하였고, 여러 번 하나님을 만났으며, 또 방금 18, 19장에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또 그 앞에 나아가 ‘그 땅에 의인 열 명이 있더라도 심판하시겠습니까?’ 하며 당당히 따지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오늘의 모습은 전혀 아브라함답지 못합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이 단지 두 번만은 아닐 거라는 점입니다. 성경에 두 번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의 반복성을 보여줍니다. 13절에서는 분명히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지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것은 아브라함의 고질병이었습니다. 신앙이 성장하면서도 이 고질병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고질병의 원인은 아비멜렉과 나누는 대화 중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1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계는 폭력과 불법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또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불안전의 위기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치안이 부재하던 시절에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아내를 빼앗기고 목숨을 잃었던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습니까? 힘없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꾀를 내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던 것입니다. 평생 그렇게 살았습니다. 실제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기에 아브라함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내를 빼앗기는 순간에도 이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아브라함의 비겁함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질병은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이런 고질병에 대해서 누가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어렵게 살던 시대에 어떻게든 목숨을 붙이고 살기 위해서는 더한 짓도 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행위를 가볍게 믿음이 없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속이는 일이 일상사가 되어 이제는 그의 천성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고질병은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어도 쉬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마 평생 고치기 힘들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모습 속에서도 경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버리고 싶은 좋지 않은 성격이나 습관, 어떤 상처들이 있지 않습니까? 오랜 동안 고치길 원했지만 실패했고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체념하고 삽니다. 어떤 분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악의에서가 아니라 거절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싫은 말을 하기가 어려워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잘 보고 사람들의 판단에 매우 예민한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자존감이 약하고 어린 시절 어떤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지나치게 화를 잘 냅니다. 작은 일에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속에서 갑자기 열기가 올라오듯 속이 끓습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더 심해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습관적으로 늦는 분이 있습니다. 아마 미국의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잘린 여사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카터 대통령은 자기 아내의 늦는 습관 때문에 평생을 고생했습니다. 카터 대통령의 성격은 약속 시간 30분전에 도착해야 안심이 되는 성격인데 비해서 로잘린 여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영부인이 되어서도 늦곤 했으며 인생의 황혼이 되어서도 이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의 생일을 맞아 카드를 쓰고 있던 카터 대통령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못 고치는 병이니 아내의 그 버릇을 내가 받아 들여야지.’ 그리고 그는 아내에게 보낸 생일 카드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내가 오늘까지 당신을 너무 많이 괴롭힌 것 같소. 지금부터 당신이 나와 시간 지키는 일로부터 진정 자유해도 좋습니다.” 이 선물을 받고 로잘린 여사는 얼마나 기뻤던지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내게 준 최고의 값진 생일 선물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고질적인 병이나 습관, 성격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잘 고쳐지질 않습니다. 그대로 사십시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야지 고치겠다고 쥐고 흔들다가는 더 큰 좌절을 경험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신앙을 가지면서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내가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고 또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면 저는 더 멋지고 훌륭한 인격이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회의가 들기 시작합니다. 

주위의 나이 드신 어른들이나 목회의 선배님들 중에서 더 멋있고 인격자가 되기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속이 좁아지고 더 화를 잘 내고 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제 자신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요즘 화를 내는 일이 부쩍 잦아졌습니다. 식구들이 저를 ‘버럭! 아빠’라 부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가끔 설교라는 것 자체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사람이 변화될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내 자신도 잘 바뀌지 않은 것 같은데 타인인 여러분은 설교를 통해서 자기 인격이나 생각에 조그마한 변화라도 있었습니까? 혹시 자기라는 존재는 전혀 변화하지 않고 자기 좋은 말만 골라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오늘 말씀이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바꾸지 못했는데 내 부족한 설교는 더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던 아브라함도 변하지 않았으니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오늘 성경 말씀이 주는 교훈은 인간에게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고질병 같은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거 고치려 말고 그냥 안고 사세요. 그래야 편합니다. 싫지만 자기의 일부인데 어떻게 합니까?

천안함 사건과 민족의 고질병

이 고질병이란 것이 한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 단위에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 있습니다. 바로 분단의식과 적대의식입니다. 여러 고질병이 있지만 저는 남북분단으로 인한 미움과 분노와 불신과 적대 의식이 우리 민족의 평화와 발전을 막고 있는 가장 큰 고질병이라 생각합니다. 이 고질병이 이번 천안함 침몰 사고를 계기로 또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0일에 천안함 사건에 대한 국방부 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결론은 북한이 기습적으로 중어뢰를 발사하여 3m 배 아래 부분에서 버블제트를 일으켜 천암함을 침몰시켰다는 것입니다. 중어뢰에 의한 버블제트 공격이라는 주장은 이미 조선 중앙 동아 등 메이저 언론에서 근 두 달 동안 지면을 도배했던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결정적 근거가 없어 일방적 주장 수준에만 맴돌던 것이 조사 발표 불과 5일전인 5월 15일, 쌍끌이 어망에 그 추진체 일부가 발견됨으로써 확정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추진체를 발견했던 쌍끌이 어선 선장이 말하듯 정말 ‘천운’이었다 할 것입니다. 영구미제 사건으로 끝날 것 같았던 것이 이제 북한 소행으로 명확히 드러났고, 이를 계기로 국내와 국제적으로 북한을 보복 또는 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권 언론의 분위기와 달리 인터넷에서는 북한 소행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주장들이 오히려 힘을 더 얻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중어뢰 추진체에 써 있던 파란색의 ‘1번’이라는 조야한 글씨의 경우입니다. 합동조사단은 이것이 결정적 증거라고 하였지만 인터넷과 일부 전문가들은 그런 엄청난 폭발력에도 어떻게 파란 색 글씨는 타지도 않고 남아있으며, 또 다른 것은 바닷물에서 다 부식되었는데 그 글씨만은 뚜렷이 남아 있느냐고 의문을 표합니다. 

그래서 조롱 투로 “노골적으로 1번 한나라당 찍으라고 선거 운동하냐”는 말부터, 어느 개그 프로의 유행어를 흉내 내어 “미사일도 1번만 기억하는 드러운 세상!”이라고 풍자합니다. 그 외에도 의문점들은 많습니다. 첨단의 무기들을 갖추고 진행되는 한미합동 군사 훈련 중에 어떻게 감쪽같이 들어왔다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느냐? 다른 배도 아닌 대형 초계함이 어떻게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있느냐? 북한의 잠수정이나 어뢰가 그런 능력이 되느냐? 버블제트든 무엇이든 폭발이 일어났는데 어째서 배 밑바닥에 화약 흔적은 그렇게 적고 사람들에게는 화상이나 폭발 흔적이 없느냐? 

사실 가장 큰 문제는 해군과 합동조사단의 비공개적이고 불투명한 조사과정입니다. 해군은 TOD 영상과 교신기록, 함수와 함미의 절단면 등 결정적인 증거들은 없다거나 군 보안이라는 이유로 보여주지 않았고 여러 번 불신을 초래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다른 가능성들은 배제한 채 북한의 어뢰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만 찾았고 그것도 불과 발표 5일 전에 ‘천운’으로 찾았다고 하니 의심을 할 만하지 않습니까? 또 북한은 자신들은 결백하다고 주장하며 검열단까지 보내겠다는 추세입니다.

우리는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으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 북한이 그랬을 가능성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은 더 이상 진실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 입장에 의해 왜곡되어 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에 휘둘리면 진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몇 가지 예들을 들면 이렇습니다. 

1898년에 쿠바에서 미국 군함 메인호가 의문의 폭발로 260여 명이 죽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쿠바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는 스페인이었고 미국은 명확한 근거도 없이 스페인이 범인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과 미국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에 미국이 승리하여 중앙아메리카의 패권이 미국에게 넘어갔습니다. 이후 학자들은 스페인의 공격이 아니라 기뢰에 의한 사고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진실보다는 중앙 아메리카의 패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정치적 입장이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37년도에는 중국 땅에서 노구교 사건이 있었습니다. 만주를 침략했던 일본은 노구교에서 중국이 일본을 공격했다는 트집을 잡고 중일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이 때문에 30만 명의 양민이 죽는 남경대학살이 일어났습니다. 1964년에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있었습니다. 통킹만에 정박해 있던 미국 군함을 당시 베트콩이 어뢰로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언론들은 미국이 공격을 당했다고 떠들었고 이를 계기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비극적인 베트남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기밀문서가 공개되고 당시 국방부 장관의 입에서 이것이 미군 측에 의한 조작이었음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2003년 부시 정부가 이라크를 공격하기 위해 이라크 내에 대량살상 무기가 있다고 하며 국제 사회를 속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아무리 뒤져도 대량살상무기는 이라크 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라크를 침공해서 중동의 패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도 때문에 진실을 왜곡하고 이용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예들을 든다고 하여 섣불리 천안함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번 조사단 발표가 아직까지는 해명해야 할 것들이 많은 미완성의 결론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저는 확신합니다. 다만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 접근하는 우리들의 태도입니다. 천안함 침몰 사고가 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메이저 언론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북한에 의한 어뢰설을 주장했고 결과는 그 주장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악이고 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북의식이 처음부터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의 주류였습니다. 분단 60 여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남북은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 민족이 가진 분단의식 적대의식이라는 고질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불신과 적대, 용서할 수 없고, 하나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론 진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정치적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힐 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 곧, 진정성입니다. 진실은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진실은 인간의 무지나 연약함 또는 거짓 때문에 잘못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성은 분명합니다. 진실을 찾고자 하는 진정성이 있는가? 평화와 통일에 대한 진정성이 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의 실체나 진실은 잘 모르지만 그 사람이 진정성이 있을 때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같은 이슬을 먹지만 뱀은 독을 만들고 소는 우유를 만들어냅니다. 동일한 진실을 눈앞에 두고도 사람의 태도 여하에 따라 얼마나 동떨어진 결론에 이르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번 천안함 사태를 바라보면서 진정성 면에서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에 대한 관심보다는 처음부터 어떻게든 북한이 범인이라고 몰아가려 하였습니다. 통일이나 평화에 대한 진정성보다는 남북 대결과 적대의식을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몰아갔습니다. 분단과 적대의식이라는 우리 민족의 고질병이 또 도진 것입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6.25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상처와 그 이후로 분단 상황에서 빚어진 크고 작은 남북 간의 갈등과 사건들은 상대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남북의 고질병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해서는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분단 적대의식이라는 고질병을 극복할 수 없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 이런 남북갈등과 천안함과 같은 유사한 사건들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통일이라는 것은 준비되어 있을 때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준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북한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살 준비입니다. 통일 전 서독은 동독을 품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동독 사람들이 서독에 와서도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경제 시스템과 마음의 자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손해는 전혀 보려하지 않습니다. 탈북자가 2만 명에 이르지만 그들은 우리 남한 땅에서 이방인처럼 푸대접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습니다. 남북 분단으로 인한 긴장과 전쟁의 위기를 우리는 계속해서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질병은 치료가 불가능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니 그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시내 산에서 말씀을 받고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진입하려 하였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두려워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불순종 때문에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는 하나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40년이 지나고 한 세대가 다 사라진 후에야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40년 유랑이 단순히 불순종에 대한 형벌의 의미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40년 유랑은 세대교체의 사건이며 그에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출애굽 했던 세대들은 애굽의 오랜 노예 생활에 익숙했던 세대들입니다. 이런 노예근성을 가지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예근성을 가진 세대가 다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 또한 단순히 므리바의 반석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모세는 노예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그의 시대는 광야 때까지입니다. 약속의 땅은 새로운 마인드를 가진 여호수아와 그 세대의 몫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희망도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분단 세대가 사라져야 합니다. 분단과 적대의식을 가지고는 더 이상 민족의 평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고질병은 고치기 힘든 이상, 그 세대가 사라지는 것이 치유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분단 세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단 세대의 아픔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단 세대는 하나님이 맡기신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이제는 물러나서 새로운 세대가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분단 세대가 물러가지 않고 자꾸 간섭하려 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제가 고질병이라고 하여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면만 부각시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질적인 실수에 대해서 하나님이 전혀 책망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아브라함을 불러서 따끔하게 혼내주었을 것입니다. ‘너 나와 함께 한지 몇 년이냐?’ ‘네가 너에게 나타났던 게 도대체 몇 번이냐?’ ‘너 내 능력 보았냐 못 보았냐?’ 하나님은 이상할 정도로 전혀 아브라함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을 혼내줍니다. 아비멜렉에게 ‘너 빨리 가서 아브라함에게 빌어 그렇지 않으면 너나 네 집안 모두 죽을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연약함과 실수를 다 이해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무서워 떨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어쩔 수 없이 그런 실수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십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하나님은 우리가 성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실수 많이 한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다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가만 물으십시오.

둘째,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완전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부족해도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실수하지만 그런 실수들을 모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 민족이 많은 실수를 하지만 이 민족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이 한반도를 요동치게 만들고 있지만 이를 통해서 자신의 선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평화와 통일의 나라를 이루길 원하시며 또한 이루실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셋째, 자기 실수에 대해서 넓은 아량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운명처럼 고질병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고질병과 싸우지 말고 달래고 조화롭게 사는 것이 현명합니다. 없애겠다고 병을 흔들다가는 먼지와 찌꺼기들만 떠오르고 제풀에 지치고 말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되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말기 간암에 걸려 폐까지 전이되었지만 10년 넘게 생존하고 있는 전 서울대 병원장 한만청 원장이 쓴 책입니다. 이분의 지론은 이렇습니다. 이 암과 친구처럼 함께 살겠다고 해야 오래 살 수 있지 원수나 된 것처럼 미워하면 결국 마음의 평화를 잃고 진다는 것입니다. 암을 만성적인 질환의 하나로 생각하고 언젠가는 떠날 친구처럼 여기는 긍정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고질병도 자기의 일부입니다. 고질병이 생긴 데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균이나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몸에서 열이 나고 염증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말 하거나, 늦거나, 화를 잘 내거나, 정욕적이거나 다 이유가 있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거나 늦지 않거나 화를 내지 않거나 정욕적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질병들은 알고 보면 불쌍한 놈들입니다.

더구나 고질병과의 싸움은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 의지로 싸워야 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책망하거나 정죄하는 방식이 아니라 확실한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비멜렉을 아브라함 앞에 무릎 꿇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높여서 선지자로서 인정하게 하고 그의 기도를 간청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존감을 높이고 하나님께서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계심을 확실히 보도록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가 가진 고질병과 그 원인에 대해서 자기 입술로 고백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치료는 원인을 알고 고백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제가 고질병은 어쩔 수 없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고질병은 싸우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이후로 동일한 고질병에서 많이 놓여났을 것입니다. 아니 완전히 극복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 연약함에 대해서 나무라기보다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분입니다.

민족의 고질병도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사랑으로 싸워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희생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분단과 적대의식을 녹이는 불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가로 막던 모든 담들을 헐어버렸던 십자가의 능력이 이제 우리 민족을 가르던 장벽들을 헐고 우리 민족을 평화와 통일로 인도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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