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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쓰러짐에서 일어섬으로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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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짐에서 일어섬으로 (눅 7:11-17)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오랜만에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답니다. 평생 소원을 이룬 것입니다. 남편이 교회에 잘 다니지 않았는데 이사 와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교회를 잘 나가기로 했답니다. 다닐 교회를 정하기 위해 주변 교회를 부부가 돌아 다녔답니다. 어떤 교회는 모든 것은 좋은데 교인 수가 적고, 어떤 교회는 분위기가 냉냉하고, 어떤 교회는 너무 사람이 많아 시장 바닦같다고 남편이 교회를 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최대한 남편의 의견을 따르려고 남편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다니는데 젊은 목사님이 아주 박력있게 말씀을 전한다는 교회가 있어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박력을 좋아하는 남편인지라 그 교회는 마음에 들 줄 알았답니다. 

그 날도 새로운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었는데, 남편은 예배시간 내내 몇 차례나 졸았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남편이 말했답니다. "이 교회는 안 되겠어. 차라리 지난주에 갔던 교회 목사의 설교가 더 나아." 의아해서 아내가 물었답니다. "아니 지난주에는 설교시간 내내 잤잖아요. 그런데 그 설교가 기억이 나요?"라고 했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지난 번 교회 설교시간에는 푹 잘 수가 있었는데, 이 교회 목사는 얼마나 목소리가 너무 커 잘만 하면 깨우고, 잘만 하면 깨우잖아. 예배가 끝나고 나면 개운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교회는 영 아니야."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드리려 교회에 나왔습니다. 예배는 구경하고 선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내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령님의 어루만짐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는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배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찾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오늘도 예배 중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셔서 소망으로 일어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말씀으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까?

1. 절망으로 쓰러져 가는 나를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절망 가운데 쓰러져 가는 한 여인에게 찾아 와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쓰러져 가는 한 여인의 인생을 보게 됩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 여인의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귀여운,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나인성에서 자랐습니다.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훌륭한 청년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리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다 결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이 죽은 것입니다. 홀로 된 것입니다. 

여인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애정과 의존의 대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미국의 워싱턴 의과대학의 Holmes(홈즈) & Rahe(레히) 에 의하여 고안된 생활 사건 척도표(Life Events Scale/1967年版)에 의하면 스트레스 값의 가장 높은 경우를 배우자의 사망, 두 번째의 경우는 이혼, 그리고 세 번째의 경우를 배우자의 별거 라고 합니다. 이보다 더한 것은 자식의 죽음일 것입니다. 유일한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독자는 인생의 기둥이요, 소망이요, 삶의 의미요 삶의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 독자는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을 것입니다. 행복했던 날은 끝나고 이제 불행과 근심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채우지 못한 사랑으로 상실감에 젖어 있었을 것입니다. 즐거운 일이 없고 사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먼 산만 바라보아도 서글퍼지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는 희망의 끈이 사라진 것입니다. 위로의 대상이고, 희망도 살아진 것입니다. 

옛말에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갔으면.'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이렇게 절망으로 쓰러져 가는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반전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그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망의 눈물을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슬픔의 눈물을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이 울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선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행렬에 참여하였지만 이 불쌍한 여인의 불행을 막아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인간에는 슬픔을 그치게 할 능력도 없고 울음을 멈추게 할 길도 없으면서 말로만 위로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울음을 변하여 웃음으로 바꿔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염려 근심을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다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오히려 고난당하고 절망 가운데 처한 자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눈물을 거두어 주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성 밖으로 향하는 장례 행렬은 절망의 행렬입니다. 그러나 성안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행렬은 소망의 행렬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누구라도 소망의 행렬에 편승할 수 있습니다. 눈먼 자가 눈을 뜨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입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병든 자가 낳음을 얻고 귀신들린 자가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오늘 날도 예수님은 절망하는 자, 나락으로 떨어진 자, 쓰러지는 자,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한 자를 찾아 가십니다. 절망에 처한 과부 아들의 죽음의 행렬 앞에 문득 나타난 예수님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연히 그 과부를 만났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우연히 예수님 만나 횡재를 만났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연한 방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방문입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고통에 처한 자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 절망하는 자를 찾아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오늘 날도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절망으로 쓰러져 가는 자를 소망으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한 주 전 필리핀에 가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이 선교사가 된 생생한 간증을 해 주었습니다. 청년 시절 교회를 건축하는데 몸으로 봉사하면서 현장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러다 추락을 하여 크게 다쳤답니다.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걷지도 잘 못하고 젊은 날 절망 가운데 처했답니다. 

당시 병원 가는 것도 어려울 형편이고 교회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엉덩이뼈를 누군가가 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만져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아프던 엉덩이가 거짓말처럼 통증이 살아지고 깨끗이 나았답니다. 그 경험을 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손은 여전이 치료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났는데 목사님께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목사님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곧 나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그 후에 손 역시 깨끗하게 나아 정상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절망가운데 소망을 주십니다. 소망의 두 가지 주성분은 ‘믿음’과 ‘기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기대하여야 합니다.

왜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보시고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절망적인 문제를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사정과 아픔과 고통을 다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긍휼 때문에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넓게는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인간들은 남의 결핍을 통해 돈을 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인간의 결핍을 불쌍히 여기시며 아무런 조건없이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 여인의 조건이나 믿음을 본 것이 아닙니다. 성품을 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긍휼 때문에 그녀를 찾아 간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다. 계속적으로 쓰러져 가는 인생을 보며 낙담하시는 분계십니까? 주님이 우리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우리의 절망의 현장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니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소망으로 일으켜 주십니다. 이 시간 이런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2. 죽음으로 쓰러져 가는 나를 생명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여인이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남편의 죽음, 아들의 죽음, 죽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에 찾아 오셔서 생명의 행렬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인생의 대 역전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합니다. 청년의 아직 죽음의 관에 머물 때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았있으나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냉소의 관에, 무기력의 관에, 포기의 관에 들어가 있을 때가 아닙니다. 조금 어렵다고 한번 실패했다고, 병들었다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어떤 분은 운명주의 관속에 드러누워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허무주의 관속에 드러누워 허무하다며 한숨만 쉽니다. 어떤 뿐은 열등의식의 관속에 드러누워 무기력하게 나는 할 수 없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를 향하여 주님은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절망을 주는 자리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붙들면 절망에서 희망이 생깁니다. 샘솟는 용기가 생깁니다. 희망을 줍니다. 많은 위대한 선각자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선포된 말씀 붙들고 일어났습니다.

한 시대 영국을 변화시키고 세계적으로 영적 각성을 일으킨 설교자 스펄전은 17세 때 말씀 붙들고 일어났습니다. 썩어져 가는 세상을 보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주시는 주님을 붙들고 일어났습니다. 리빙스턴은 23세 때 일어나라는 하나님 말씀 붙들고 아프리카 대륙으로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를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난 것입니다. 요한 칼빈은 썩어져 가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일어나 26세 때 기독교 강요를 집필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청년이 죽어 자신의 힘으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허무와 절망의 관에서 일어나십시오. 패배의식과 부정의식을 떨고 일어나십시오. 슬픔과 두려움의 관, 정욕의 관을 박차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인류 역사상 우리 인간을 불행케 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게 하고 모든 것을 헛되게 하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할 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은 죽음에 대하여 손을 대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온 인류가 가는 죽음의 행렬을 바꾸기 위해서 역사 속에 뛰어 들어 오셨습니다.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셨습니다.

슬픔과 절망과 눈물과 통곡의 소리 나는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어 기쁨과 환희와 감격의 행렬로 바꾸어 주신분이 예수님이 십니다.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지옥으로 가는 행렬을 천국으로 초상집을 잔치 집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을 만나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져 가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하자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만 만나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하시면 죽은 소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기적을 보여 주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으면 누구든지 죽음에서 자유를 얻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죽음의 행렬에 가담하고 있습니까? 생명의 행렬에 가담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1)"

예수 만나면 생명이 시작됩니다. 마른 나무에도 새순이 솟아나고 고목나무에도 꽃이 핍니다. 
이 시간 죽음으로 쓰러져 가는 나를 생명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3. 동정으로 쓰러져 가는 나를 영광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무더운 지방이라 당일에 장사를 지냅니다. 유대인의 장례식은 우리나와 비슷합니다. 온 동네 행사가 됩니다. 장례에 참여하고 도와주는 것을 되돌려 받지 않으니까 가장 큰 선행으로 생각했습니다. 동네에서 장례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동네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어 주었습니다. 장례 때에는 피리 부는 자와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은 상여 앞에 가며 곡을 하고 또 상여 뒤에는 곡을 하는 사람들이 뒤를 따르며 울고, 조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동정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어.”라고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이제 자식이 죽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아는 사람마다 혀를 찾을 것입니다. "참 안되었다." "참 불쌍하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은 예수님 만나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이제 동정의 눈빛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부담스러운 대상이 아닙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을 목격하신 것입니다. 큰 선지가가 일어난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가정을 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가정을 볼 때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큰 선지자가 자신들 가운데 일어난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본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 절망스러운 가정 죽음의 행렬로 이어지는 가정에 임한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사방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볼 때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의 진보와 우리 삶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동정 받는 사건을 영원히 동정 받는 사건으로, 동정 받는 환경을 영원히 동정 받는 환경으로 동정 받는 기업을 영원히 동정 받는 기업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몇 달 전에 저희 교회에 방문하신 성도님께서 예배를 드리고 나가면서 “설교에 박력이 있으시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동정의 말로 들렸습니다. 아마 수천 명 수만 명 모인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나가면서 목사님께 그런 말 못했을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목회자들도 동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작은 교회 목사는 어린이들도 무시합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했답니다. 아이들이 지루해서 몸을 비비꼬고 있었답니다. 예배당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목사님은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설교를 마쳤답니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목사님이 축도를 하게 되었답니다. 축도하는 모습을 처음 본 어린이가 깜짝 놀라 다른 친구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답니다. “ 야, 왜 목사님이 손을 들고 있지?" "그것도 몰라? 바보야 설교를 못했으니 하나님 앞에 벌서고 있는 거지." 

사람이 힘이 없고 실패하고 연약하면 사람들은 동정의 말로 무시합니다. 우리는 동정적 환경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반전시키고 역전시켜야 합니다. 주님 만나면 절망적인 사건과 환경도 하나님의 큰 영광은 더욱 드러낼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역사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 사람들을 보십시오. 괴테는 81살에 필생의 역작인 파우스트를 쓰기 시작해 7년 뒤 탈고했습니다.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는 64살 때 은퇴하고 나서야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사상 가장 방대한 역사기록인 `사기(史記)'를 써 남긴 사마천(司馬遷)은 정치범으로서 국부를 절단당하는 궁형(宮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동정 받는 인생으로 끝맺지 않고 사기를 썼습니다. 동료의 질투로 모함에 걸려 두 다리를 절단 당하고 얼굴에 죄인 표시인 문신(文身)까지 당한 손자(孫子)는 나폴레옹까지 애독했다던 만고의 병법을 남겼습니다. 사지(四肢)의 수족을 전혀 쓰지 못하고 오로지 보고 듣는 것 이외에 다섯 감각마저도 마비된 스티븐 호킹 박사를 아인슈타인 이래의 세기적 물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얼마든지 인간적인 집념으로도 동정을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우리의 아름다운 흔적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제까지 내 인생 이렇게 살다 끝날 것인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얼마든지 다 끝난 것같은 인생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삼손이 인생을 보십시오. 눈이 빼임 당하고 착고에 매여 마지막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습니다. 그의 젊은 날은 부모에게 짐 덩어리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잘못 사용하였습니다. 동정받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삿 16:28)" 

하나님은 마지막에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삿 16:30)"

성경에 보면 안나라는 여인을 보십시오. 출가한 지 일곱 해에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짐 덩어리 같은 인생입니다. 동정 받는 인생입니다. 84년 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고 금식 기도하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었습니다.(눅 2:36-38) 짐덩어리 같은 인생, 남의 동정만 받던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는 데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예수님 만나면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에게 짐스러운 상황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오히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지옥 같은 집을 천국으로 바꿔 주신 예수님의 소문을 내는 인생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대지(大地)'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자폐증을 앓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녀는 "차라리 이 아이가 죽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거듭 외친 적도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절망적인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의 삶과 죽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고통으로 위대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진주는 보석입니다. 그러나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는 그것은 아픔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 아픔을 통해 진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동정의 행렬을 영광의 행렬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에 놓여 있는 수많은 고통과 문제, 장애 안에는 그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큰 이익이나 기회가 숨어 있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고난은 겸손하게 하고 고난은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줍니다. 몸의 열은 괴로움을 주지만 건강을 위한 희망입니다. 

죽은 남편과 아들로 절망하는 과부를 찾아가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사람은 넘어지고 쓰러지면 도망하고 피하지만 우리 주님은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에게 찾아 오셔서 손을 내미십니다. 

절망의 행렬에서 소망의 행렬로 일어서기 바랍니다.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일어서기 바랍니다. 동정받는 행렬에서 영광은 드러내는 행렬로 소문난 인생으로 일어서기 바랍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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