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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엡 5: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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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엡 5:25-28)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가정의 달인 5월 지난 주일에는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춘추전국 시대에 진나라의 천하통일의 기초를 놓았다고 하는 무시무시한 ‘백기’ 장군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울다가도 “백기 장군이 온다.” 하면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무서운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기 장군에게는 하나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 앞에 서기만 하면 겁이 나고 또 싸움에서 언제나 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고자 부하 장병들을 연병장에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내가 무섭지 않은 병사들은 홍색 깃발에 모이고, 아내가 무서운 병사들은 청색 깃발에 모이라.” 그러자 모든 군사가 청색깃발에 도열했지만, 유일하게 군사 한 명이 홍색 깃발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기’ 장군은 “옳거니 오늘 저 군사에게 한 수 배워서 기어코 아내를 이겨보리라.”는 큰 기대를 걸고서 홍색 깃발의 군사를 장군의 방으로 불러 물어보았습니다. “귀관은 계급으로 보면 나보다 아래이지만, 오늘 내 귀관의 아내 이기는 법을 배우고자 하노니, 부담 없이 한 수 지도해주면 내 그대에게 큰상을 내리리라.” 그랬더니 그 군사가 말하기를 “장군님 그게 아니옵니다. 저는 아내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아내가 항상 주의시키기를 ‘남자들이란 세 사람만 모이면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니,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보니 붉은 깃발 아래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가 있으므로 아내의 명령대로 거기는 가지 않고, 아무도 없는 청색 깃발 아래 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옛날에도 아내가 그토록 무서웠다면, 여성의 파워가 하늘을 찌르는 듯한 이 시대에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설교 제목이 아내 된 여러분의 귀에 거슬리고, 떫고,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말씀으로 들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믿는 정통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미 그는 변질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변질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어제 동아일보 25면에 보면 충북 보은군 보은읍의 학림교회 이근태 목사는 석탄일인 21일 옥천군 옥천읍에 있는 ‘대성사’라는 사찰을 찾아가 ‘반야심경’ 260자를 사흘에 걸쳐 금가루로 필사한 사본을 선물하면서 “불경과 성경 모두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데, 남의 종교 것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또 그는 “내가 믿는 종교가 귀하다면, 다른 사람이 믿는 종교도 귀한 것이므로 타종교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는 말을 했다고도 합니다. 그럴 듯한 말 같지만 불경과 성경을 같은 수준에 놓고, 기독교와 타종교를 동등하게 여기는 목사는 진정한 목사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 맨 먼저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남자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을 주관토록 ‘주’와 ‘지도자’와 ‘머리’로 삼으신 창조 질서 때문에서요, 둘째는 이러한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남편의 지위를 찬탈함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타락이라는 참화를 가져온 것을 거울삼아, 다시는 남편을 주관하려 들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서 인간이 범죄 타락하게 되고, 어떻게 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고, 사망이 인간들 위에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불행과 질병과 인격적인 뒤틀림 현상이 이디서부터 비롯되었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일 하와가 그때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집에서 남편에게 조용히 배우는 자세를 취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뱀이 유혹할 때 조용히 아담에게 가서 듣는 아내의 도리를 취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랬더라면 오늘날 인류에게 불행이 찾아왔겠습니까? 죽음이며 질병이며 죄며 인격적 뒤틀림 등의 현상이 왔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범죄한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위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아내가 똑똑하다고 해서, 아내가 부부 평등을 부르짖는다고 해서, 인류 평화와 이상의 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을 돕는 위치에서 그 다스림과 지도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것을 깨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태를 볼 때 이미 사탄의 역사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와 함께 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법은 하나 오직 교회가 주님께 복종하듯,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그리스도인 아내라면, 반드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교훈에 이어서, 사도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남편들에 대하여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랑임을 볼 수 있습니다. 남편에 관해서 주도적인 사상은 사랑입니다. 아내에 관해서 주도적인 사상은 복종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아내 측에서는 복종이요, 남편 측에서는 사랑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남편들이 아내와의 관계성을 풀어나가기 위한 관계성 해독의 코드는 사랑입니다. 남편들은 반드시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잊는 순간 부부 관계는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편이 아내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남편도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이상, 아내의 머리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남편의 다스림은 사랑의 다스림이며, 사랑의 통치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지도력입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 그러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헬라어에는 영어의 ‘Love’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넷이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단어는 언제나 ‘아가페’ 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편들이 아내를 향해 가지는 사랑은 반드시 이 아가페이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높은 사랑의 차원은 없습니다. 물론 부부간의 사랑에 ‘에로스’의 요소가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성을 포함한 이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인의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행복한 결혼 생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에로틱한 요소에다, 서로 좋아함의 요소를 더하게 되면, 어느 정도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는 오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인에겐 이를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오르기를 원하는 수준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왜 남편에 관한 교훈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까?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에 대하여 진정으로 인식할 때만이, 그리스도인 남편들이 자기의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의 신부인 교회를 대하시는 태도의 특징들을 보십시오.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같이” 주님은 교회가 보잘 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고, 교회의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누더기 같음과 비열함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 교리의 위대한 핵심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선하고 아름다운 이유 때문이 아니고, 교회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아내의 많은 허물이나 어리석음이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셨습니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희생적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교회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것은, 주님처럼 희생적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원리인 것입니다. 이 사랑은 육정적인 ‘에로스’나,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필레오’ 따위와는 비할 수 없는, 차원 높은 사랑인 것입니다. 에로스나 필레오는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자기중심적이고, 항상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특징은, 자기를 생각지 않습니다. 희생이 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희생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결혼에 있어서 진수가 되는 점은, 남편과 아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과 같습니다. 남편들은 바로 이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남편은 반드시 아내가 자신의 일부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으로, 자신의 일부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취하여진 아담의 일부인 것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속해 있는 남편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만일 자기 몸의 일부분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의 온 몸이 함께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의 일부인 아내를 고통스럽게 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는 곧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인생인 것입니다. 아내가 고통을 당하면, 남편인 여러분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이 아프게 될 것이고,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러분의 생 전체가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를 모욕하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아내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들이 자신의 취미나 모임 등을 즐기느라고 밤늦도록 싸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와서는 그냥 잠자리에 들어 곯아떨어집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나갑니다. 그러나 가정은 남자가 잠자기 위해서 돌아오는 기숙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벧후 3:7에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가 체질적으로 연약한 그릇임을 알고,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아내의 일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가 그러해야 하듯이, 남편 역시 한 아내만을 사랑하는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잠 5:18-19에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고린도 전서 13장을 패러디 한 글입니다. <다 남자겠느냐? 다 남편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선물을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아무리 성공한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는다 할지라도, 아내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모든 사람에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탁월한 힘을 지녀 세계를 제패한다 할지라도,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가진 모든 것으로 아내를 위해 제일 좋은 옷, 가장 훌륭한 저택을 제공하고, 심지어 가정부를 고용해 주며 자가용을 사준다 할지라도, 아내의 마음을 헤아려 읽어 주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참된 사랑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당신에게 변화하라고 잔소리 하지 않겠소. 나는 당신을 실족시킬 어떠한 일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친절하게 당신을 대하겠소. 나는 당신의 성장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보다 더 나은 것에 대해 질투하지 않겠소. 

나는 당신 앞에서 나를 높이거나 자랑하지 않겠소. 나는 당신을 빈정거리거나 잘못을 꼬집지 않겠소. 나는 나의 출세나 성공을 위해 당신을 이용하거나 나의 욕심을 위해 당신을 착취하지 않겠소. 나는 쉽게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폭발하지 않겠소. 나는 당신이 상했을 때 같이 아파하며 당신이 불행할 때 당신을 위로할 것이오. 나는 내가 틀린 것은 언제라도 틀렸다고 인정하며 결코 거짓을 꾸미지 않겠소. 나는 항상 당신 곁에서 당신과 더불어 살려 하오. 부부관계의 최선은 사랑이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내가 이전에는 당신을 위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이 나 중심적이었고, 당신의 필요와 요구를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가정을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이제는 그 모든 나의 잘못을 버리기로 결심하였소.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과 부부관계가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유머입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부부가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장의사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부인을 고국으로 운구하는데 5,000$이 듭니다. 그러나 당신이 신성한 이 땅에 부인을 묻으시겠다면 150$만 있으면 됩니다.” 남편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장의사에게 부인을 고국으로 운구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장의사는 너무 이상해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부인을 운구하는데 5,000$이나 쓰시나요? 이 성스러운 땅에 묻으면 150$만 있으면 되는데…” 그러자 남편은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예전에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이 땅에 묻혔는데 3일 후에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저는…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요.” 이런 심보를 가진 남편들이 있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내의 말의 실제 뜻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자기, 나 사랑해?” (나 사고 싶은 게 생겼어.) “자기, 나 얼마만큼 사랑해?” (나 오늘 일 저질렀는데.) “나 화 안 났어.” (당연히 열 받았지. 이 멍청아.) “맘대로 해요.” (하기만 해봐.) “부엌이 불편한 것 같아요.” (이사 가자.) “우리 얘기 좀 해요.” (내 불만이 뭐냐면.) 좋은 남편이 되려면 이러한 아내의 말뜻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식사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도 귀한 음식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이 음식을 제공하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믿음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을 주시옵소서. 일용할 양식과 식욕을 주심을 감사 감사 감사 합니다. 말씀 식욕도 함께 허락해 주셔서 양떼들에게 풍성한 만나와 살찐 꼴로 공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듯 저는 식사기도 중에 아내의 수고에 대해서 한 번도 감사하거나 축복을 빌어 본 적이 없는데, 어제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저녁 식사기도 중에 아내의 수고에 대해서 감사와 아내에 대한 축복 기도를 드려보았습니다. 

소위 목사인 제가 이 정도이니 여러분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5월 달에 많은 애경사비 지출로 아내가 상당히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거금의 비자금 백만 원을 풀어 선심도 써보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꽤 잘했지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동안 이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후에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남편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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