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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겟세마네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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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22) : 겟세마네 (마 26:36-46)

 
성경은 인생의 길에서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갖고 사는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 고난’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여성들의 출산, 남성들의 군 생활 경험입니다. 왜 남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군대 이야기를 할까요? 그것이 남자들이 공통으로 경험한 보편적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군대 생활의 고난을 풍자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잠들만 하면 기상, 먹을 만 하면 식사 끝, 쉴 만 하면 집합, 움직일 만 하면 동작 그만, 휴가 갈만 하면 비상, 편지 쓸 만 하면 소등, 공부할 만 하면 사역, 편할 만 하니까 전역>이라고. 

그러나 인생의 길에는 이런 보편적 고난 말고 아주 특별한 고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그런 고난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사망은 아니지만 사망을 느끼게 하는 그림자 같은 골짜기)를 지나는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그런 고난을 ‘불 시험’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소중한 것을 다 태워버리는 파괴적인 불의 위력처럼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불같은 시험 말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2-13)

예수님의 생애에서 그런 아주 특별한 고난의 자리가 바로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십자가의 고난 이상의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무서운 일을 당하는 순간보다, 그런 일을 당할 것을 예감하는 순간의 두려움이 더 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에 보면 “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그는 고백하고 계십니다. ‘겟세마네’라는 말의 의미가 ‘기름 짜는 틀’이란 뜻입니다. 아마도 예로부터 이 동산에 감람나무, 정확하게 말하면 올리브 나무(올리브와 감람나무는 실상은 다른 것)가 많아 이것으로 기름을 짜는데서 유래한 명칭으로 생각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감람산의 일부인 <겟세마네 동산>(Garden of Gethsemane)에 가보면 세월이 오랜 8개의 올리브 나무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이천년이 된 나무도 있습니다. 이 나무들은 이천년 전 예수께서 이 동산을 찾아 기도하던 그 역사적 사실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원 바로 옆에 교회 전승에 의해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며 바위를 붙들고 기도하시던 자리에 세운 ‘만국인 교회’(Church of All Nations, 비잔틴 시대인 379년 교회가 있던 자리에 1924년 16개국 성도들의 헌금으로 세운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기름 짜듯 피와 땀을 흘리며 고뇌하는 한 밤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주님도 이런 고난을 당하셨다면 그의 제자 된 우리의 삶에도 왜 고난이 없겠습니까? *인생의 특별한 고난을 만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1.신앙의 길에도 고난은 예외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의 고난 때문에 예수를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 믿고 고난을 탈출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 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인생의 고난의 색깔은 다양합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3)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은 결국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약1:4)이란 주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이런 특별한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불시험이 오거든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남자들이 비교적 군대 생활을 잘 견딜 수 있는 것은 각오를 하고 군대를 가기 때문이 아닙니까? 요즘은 옛날보다 군대 생활이 너무나 좋아졌는데도 적응하지 못하고 사고가 잦은 것은 결국 정신력의 빈곤,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군대 시절에 들었던 유머가 생각납니다. 당시의 한국군대의 열악한 상황을 풍자하는 유머였다고 생각됩니다. 

외국 군인들을 한국군인 훈련소에 집어넣어 보았더니 한 주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 죽었는데 그 원인이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냄새나는 양말에 질식사, 썩어가는 라면 국물에 익사, 상한 돼지고기에 식 중독사, 매일 밤 집합으로 인한 수면 부족사,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단체기압 묵상으로 인한 공포사, 목숨 걸기 고스톱 관전으로 말미암은 충격사> 군 생활이 그렇게 힘들었다는 일종의 풍자적인 이야기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각오는 이 모든 것을 견디게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고난은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각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때 영국 교회에서는 예수 믿기로 한 초신자들에게 반드시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히게 했다고 합니다. 천로역정의 주인공 기독도가 천성에 도달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습니까? 그것을 미리 마음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그 책을 읽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오하십시다. 성도에게도 고난은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2.특별한 고난을 특별한 기도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 성도들이 고난을 만날 때 할일을 가르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고난은 기도에의 초대장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고난은 특별한 기도에의 초대장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한번의 기도가 아닌 세 차례에 걸친 아주 특별한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그의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는 당신의 제자들을 인하여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40절) 

특별한 고난의 때는 특별한 기도를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날 밤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에 열중하셨다고 전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과 한 시간도 그분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40절) 왜 그랬을까요?

원인은 다양하게 진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했던 탓도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싫어하는 마귀의 방해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진지하게 수용하지 못한 원인도 있었습니다. 그분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제자들에게 아직도 기도가 습관이 되지 못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도들 중에 5분만 기도하시면 기도할 거리가 없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몰입하는 기도가 습관이 되시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기도는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처음으로 기도하고자 겟세마네 동산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거기서 기도하시는 일은 주님의 일상의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눅22:39의 말씀을 읽어 보실까요?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러나 그 날 밤 예수님은 다음 날 십자가를 앞두고 계셨기 때문에 특별하게 더욱 기도할 필요가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특별한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눅22:43을 읽어 보실까요?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특별한 고난을 직면한 성도들이 계신가요? 이제야 말로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신 시간입니다.

3.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우는 예수님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레슨은 기도는 단순히 인간들의 소원의 관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날 밤 기도의 절정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이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꺽어 아버지께 드리는 위대한 항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이 선하시고 기뻐할만 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말씀하십니다. 위대한 설교가 조지 트루엣(George Truett)은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가장 위대한 성취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고, 가장 위대한 삶은 발견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순종이야말로 고난에 대한 가장 완벽한 승리요 극복인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하늘의 뜻,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더 소망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유머도 생겨났을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택시를 탔는데 두 자매사이에 끼어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만 보니까 한 자매는 잘 생겼고 또 한 자매는 안 생겼습니다. 택시가 코너를 들며 몸이 안 생긴 자매 쪽으로 기울 때마다 이 형제의 기도는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였고, 잘 생긴 자매 쪽으로 기울 때마다 “뜻대로 하옵소서”였다고 하지요. 그것이 우리 인간의 실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을 본받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까?

실제로 우리의 기도체험 중에는 내가 기도하고 내가 소원한 대로 안 이루어지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감사하게 된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2002년초 우리 교회 수지 성전이 과포화되어 분당에 기도처를 찾고 있었을 때 누군가가 오늘 날 분당 성전의 장소인 문 닫은 뉴코아 백화점 구입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알아보니까 당시의 가격이 950억이었습니다. 제직회에서 토론해 보니까 의견은 찬반이 정확하게 반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을 더 기도하고 의논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라면 절대 다수가 동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한 달 후 여전히 의견은 반반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건을 접기로 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미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건에 하나님의 싸인이 없었던 것 때문에 마음을 접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일년 후 이랜드에서 연락이 왔고 그때 건물 가격은 450억으로 내려가 있었고 그 두 동의 건물을 2001아웃렛과 나누어 구입하자는 제의였습니다. 제가 그 전갈을 받은 순간 제 입속에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은 “하나님의 뜻이로구나그래서 일년을 기다리게 하셨구나!”였습니다. 그보다 일년 전 무리하게 950억의 건물을 매입하고자 했다면 모르면 몰라도 우리 교회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고 기뻐할만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 청빙위원회가 승계 리더십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 그런 하나님의 인도를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위원회에서 최초 11명의 후보를 선임할 때(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존경받는 목회자들의 추천, 선임된 부목사님들의 추천, 교인들을 대표한 청빙위원들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선임 과정)저는 의도적으로 빠져 있었습니다. 제가 일부러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다시 우리 교회 청빙 기준에 근거한 4분을 뽑았을 때 저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4분이 다 신뢰할 수 있는 정말 좋은 후보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되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분들 중에 제가 어떤 분들을 더 선호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도하면서 다시 제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최선의 뜻대로 해달라고” 그리고 마지막 두 분이 남았을 때 저는 다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제가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청빙위원들을 통해 주님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그 결과로 오늘 우리는 진 재혁 목사님을 승계 리더십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결론이 났을 때 제 마음에는 한 구름 한 조각의 의심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 결론이 하나님의 인도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감사한 것은 청빙 위원들도 저와 동일한 마음과 기도로 마지막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해 주신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위대한 동역의 시대가 열려 올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위대한 명령을 받들고 위대한 동역을 실현하는 교회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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