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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라마 나욧이 되게 하라! (삼상 19: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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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나욧이 되게 하라! (삼상 19:18-24)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믿음 안에서 꿈을 꾸십시오.  제가 아는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믿음의 꿈에는 절대로 가짜가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냥 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대로 됩니다.  믿음 안에서 꿈을 꾸는 것만큼 이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믿음의 꿈은 우리의 삶에 놀라운 추진력을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위력보다도 어떤 저항보다도 어떤 고난보다도 더 강한 꿈의 위력을 붙드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붙들고 이러이러한 삶을 증거하고 말리라.  하나님 안에서 꿈의 증거자가 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입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그렇습니다.  입을 여십시오.  열되 크게 여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냥 좋으신 분이 아니라 언제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우리는 입만 열면 됩니다.  진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여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입을 크게 여십시오.  하나님의 더 큰 세계를 향하여 입을 크게 여십시오.  틀림없이 우리 주님께서 새로운 날들을 맞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미국의 갑부 카네기라고 하는 사람의 전집을 보면, 그 분의 재산 목록 제1호가 벽에 걸린 아주 남루한 그림 한 장이라고 합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저것이 무엇이냐?  왜 저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하느냐?"  그 그림의 내용은 그 안에 썰물이 되어 다 빠져나가고 아주 거의 다 파선되다시피 한 초라한 배 한 척이 모래 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닻도 다 떨어져서 모래판에 나뒹굴고 있는 참으로 초라한 배였습니다.  절망적이고 아무 희망이 없고 아무런 꿈도 없는 모래사장에 나뒹굴고 있는 그 배의 맨 밑에는 이런 글이 써 있더라고 합니다.  "반드시 밀물의 때가 오면 떠오르리라!"  카네기는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가 내 믿음의 입만 바로 열고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믿음의 때가 올 때에 떠오를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향한 내 입만 바로 열고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믿음의 때가 올 때 떠오를 것입니다.  내가 떠오르리라!  내가 떠오르리라!  반드시 믿음의 때가 오면 떠오르리라!  우리는 이 믿음을 붙잡아야 됩니다.  그리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은 반드시 우리들을 위하여 믿음의 밀물의 때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사실, 썰물의 때에는 그 어떤 배들도 아무런 가치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밀물이 밀려들면 삽시간에 배가 뜨고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이던 문제가 단번에 다 해결이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와 이 민족 위에 이런 믿음의 때를 한번 허락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신명기 28장에 약속하신 복의 때가 우리들 속에 한번 펼쳐주실 줄을 믿습니다.  틀림없이 나타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의 삶이 대단히 힘들고 어렵지만 반드시 믿음의 때가 오면 떠오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교회가 이 땅에서 제일 훌륭한 곳이란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하기를 기뻐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서 제일 훌륭한 곳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교회를 향해서 갖고 있는 하나님의 안목에 한 번 미쳐 보십시오.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가는 일에 다 미치고 뛰어들어 보십시오.  참여가 없으면 헌신도 없고, 보상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오면서 정말로 심한 통곡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날 초라해진 자기의 모습 때문에 후회를 해 본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행동하지 않았던 그 한 사건 때문에 한없이 초라해져서 밤을 새면서 며칠을 두고두고 울어야만 했던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결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초라해져서 현실 앞에서 울어야만 했던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꿈을 꾸십시오.  환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에 취해서 뛰어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에 취해서 헌신의 물결에 달려들어 보십시오.

제발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멀찍이 서서 구경꾼처럼 방관하는 자의 삶을 살지는 마십시오.  어느 한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 사랑하는 자녀들의 손을 붙잡고 이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들아, 아빠 엄마는 말이야 이 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정말 후회 없이 살았단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잘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야 됩니다.  그냥 말로만 잘 믿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바로 믿어야 됩니다.  잘 믿어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적인 사람들이 일어나서 성령이 철철 넘쳐야 됩니다.  시간마다 때마다 일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감이 철철 넘쳐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삶에 철철 넘쳐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다가 아무런 기력도 힘도 의욕도 다 떨어진 그런 경험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삶의 의욕이 갑자기 다 떨어지고 뭔가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집니다.  그것을 꼭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삶의 의욕이 사라져버린 그런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분명한 것은 생기만 오면 그 생명에 다시 활력이 넘쳐나게 됩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삶에 아무런 의욕이 없는 사람, 아무런 생기가 없는 사람과 동업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람도 생기나 의욕이 없는 사람을 쓰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신들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생기야,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성령에 취하십시다.  그래서 새로운 꿈을 꾸며 상상력에 들뜨십시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직관력으로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미치십시오.  이 어지럽고 혼돈된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바로 미쳐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심령이 아무리 황량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기의 바람만 들어가면 푸른 초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이 아무리 시들한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의 비만 내리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있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어느 가정이든 어느 자손이든 어느 생명이든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의 샘이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만은 기억하십시오.  어떤 좌절의 늪에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낙담과 고난과 고통과 실패의 늪에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생기의 바람만 불어오면 살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생기의 바람을 일으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이 생기의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심령의 메마른 골짜기에 생기의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오늘 우리의 메마른 심령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생기야, 들어가라!  사망을 당하여 저 어둡고 캄캄하게 된 저 심령의 골짜기 속에 하늘의 생기의 바람을 불어서 사망을 당한 저 생명을 살려낼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흔히 이런 생각들을 잘 합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재산이 많아지면, 돈이 두둑해지면...  그러나 그런 생각은 착각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절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의 희생자가 되어 있기에 저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에, 내가 처한 습관에, 자신의 과거에, 자신의 권태감에, 자신의 짜증스러운 성격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생포되어 희생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결의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가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중요한 한 지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라마 나욧이라는 곳입니다.  '라마'는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며 '나욧'은 어떤 지명이나 장소의 명칭이 아니라, '거처' '처소'를 뜻하는 말로서 사무엘이 세운 선지학교를 의미합니다.  라마 나욧은 다윗이 출발한 기브아에서 북쪽으로 3.2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선지자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으로 가게 된 원인은 사울왕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의 불순종하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음을 후회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라는 말이 몇 번 나오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크게 후회하신 사건이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일을 맡기심에 대해서 우리는 기쁨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보시고 칭찬하셨던 것과 같은 자부심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바라보심이 사울처럼 후회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음을 후회하시고 그를 버리기로 하시는 순간부터 그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떠나가고 악한 영이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악한 영이 사울을 공포에 몰아넣기도 하면서 괴롭히게 됩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불러다가 수금을 타게 하는데,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을 괴롭히던 악한 영이 떠나가게 됩니다.  원초적으로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했던 사울입니다.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 앞에서 수금을 타게 하고 창을 던졌습니다.  딸을 미끼로 폐백대신 블레셋 사람의 양피를 가져오게 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을 자기의 딸 미갈과 결혼시켜 놓고 사람을 보내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사울 왕이 꾸미는 죽음의 흉계로부터 살아났습니다.  이렇듯 다윗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울 왕을 피하여 다니다가 어느 날 지치고 고달픈 몸을 이끌고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의 선지학교를 찾아갑니다.

성서 주경학자 케일(Keil)에 의하면 다윗이 사무엘을 찾아간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자기가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고 기름 부어 준 분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지금의 자기를 보호해 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분이라고 신뢰했음이다.  셋째, 앞으로의 자신의 처신에 대하여 자문을 받고자 함이다.  어찌 되었든 다윗이 사무엘을 기억하고 라마 나욧으로 가고자 한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참 선지자였습니다.  참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담대한 용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몸을 바쳤으며, 위험도 불사하고 희생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다윗을 받아줍니다.  분명한 사실은 왕이 죽이려고 하는 자를 용납하면 자기까지 위험한 줄을 사무엘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윗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살아도 하나님과 함께 살고 죽어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자는 믿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사무엘을 지도자로 한 선지학교 라마 나욧이 성령 충만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라마 나욧에는 많은 선지 생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윗을 받아들이면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 사람도 사무엘이 다윗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부정적이거나 반대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라마 나욧의 지도자인 사무엘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까지도 하나같이 성령 충만했음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라마 나욧, 그곳은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계신 곳이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라마 나욧은 이스라엘의 한 지방으로써 한 나라의 수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닙니다.  군사적인 요새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상업이 번창하는 경제적인 중심지가 되지도 못합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한 시골에 있는 이름 없는 아주 작은 촌락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대단한 곳도 아닌데 이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잠깐 살펴보십시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사울의 칼날을 피하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로 피난을 갑니다.  사울은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윗을 잡으려고 부하들을 그곳에 보냅니다.  그러나 다윗을 잡으러 갔던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다윗을 잡지 않고 예언을 하게 됩니다.  사울은 그가 보낸 부하들이 다윗을 잡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예언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 번씩이나 부하들을 보내지만 결과는 똑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울은 자신이 직접 그곳에 다윗을 잡으러 갑니다.  그러나 그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하게 됩니다.  예언을 할 뿐만 아니라 하루종일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하여 잠시 머물렀던 라마의 이름 없는 한 곳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라마 나욧이 도대체 어떠한 곳이기에 이렇게 중요한 이름이 되었습니까?

첫째로, 라마 나욧은 의인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은 참으로 넓습니다.  이 넓은 땅에는 65억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우리가 개척하고 발을 붙일만한 곳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무리 넓다고 하지만 의인이 발붙일 곳은 없습니다.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그 이유라는 것이 지구가 좁아서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 너무나도 완악해서 마음놓고 편하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법대로 살고 양심껏 살아가는 사람이 출세를 하고 큰 소리 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어기고 양심을 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출세를 하고 큰 소리 치는 세상입니다.  거짓과 불의가 편만한 세상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나쁜 짓을 하고도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해야 할 세상입니다.

이스라엘 당시에는 유행가처럼 유행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다윗이 이와 같다면 그는 마땅히 대접을 받고 이름에 걸맞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존경을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다윗은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피난을 다녀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윗의 딱한 처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포 분위기로 인해서 감히 그를 도와주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땅에서 다윗이 발붙일 곳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다윗은 라마 나욧, 이름도 없는 그곳에 사무엘을 찾아갔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이 자신을 받아 줄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사무엘은 다윗을 받아서 그곳에 머물라고 합니다.  의외라고 하는 이유는 그 당시에 다윗을 숨겨준다던가 음식을 대접하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가족과 친족들까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라마 나욧은 의인이 찾아와서 쉼을 얻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로운 사람이 발붙일 곳이 없는 이 사회에서 라마나욧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교회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회가 악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교회인 이곳에서마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라마 나욧은 말 그대로 세상에서 발붙일 곳이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대피하는 곳입니다.  위안을 받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현대사회는 무죄한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닌 것처럼 악인들에게 의인들이 쫓겨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불의한 사람들로 인해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억울함을 당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쫓기고 쫓겨서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은 마음놓고 짐을 풀고 발붙여 살 수 있는 안식처요 피난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라마 나욧을 찾아 거기에서 거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이 감동된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언하는 작은 천국과 같은 곳으로 바로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에 두시리로다"(시 27:5)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사울 왕의 궁중에서는 불안한 나날을 보냈지만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라마 나욧에서는 평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궁중이라고 해서 다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초막이라고 해서 다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교회는 의인의 피난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에서 불의한 자들에게 쫓기고 고통 당하는 외롭고 의로운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처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이 와서 참 쉼을 얻을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땅에 있으나 하늘을 향한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주성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구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이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의 머리 위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사무엘과 그 생도들처럼 쫓기는 의인들을 이유 없이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신앙의 인격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라마 나욧이 되어야만 합니다.  쫓기는 의인이 쉴 수 없는 교회는 참된 라마 나욧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거나 어떤 집을 방문했을 때 평안을 주는 사람, 평안한 집이 있는가 하면, 평안을 빼앗기고 불안해지는 집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과 상관되어지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가 이민을 가거나 혹은 멀리 이사를 가서라도 잊을 수 없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으로 남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내 집을 찾아온 사람에게 참 평안을 주는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언양 영신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에서 쫓겨 들어온 자들의 아픔을 녹여주고 상처를 싸매 주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 속에서 방황하며 쫓기는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쫓겨다니며 방황하지 말고 이곳 하나님의 집에서 뿌리 내려 정착하십시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넓은 가슴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으십시오.  시집살이하던 새댁이 친정에 와서 평안을 얻는 것처럼 어려운 세상살이로부터 벗어나 참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라마 나욧은 어떤 곳입니까?
두 번째로, 라마 나욧은 속된 죄인이 찾아와서 변화를 받는 곳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부하들을 세 번씩이나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서 감동을 받고 예언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려 왔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변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사울이 보낸 사람들이 이곳 라마 나욧에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한 사울이 나중에는 그 자신이 직접 라마 나욧에 내려갔습니다.  그가 미처 라마 나욧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종일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라고 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라마 나욧은 죄인과 침입자들이 들어와서 감화를 받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 라마 나욧인 우리의 교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악한 사람이 들어와서 선하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신앙에 확신이 없는 사람이 들어와서 신앙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이 들어와서 부활의 소망이 넘쳐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성령님의 뜨거운 역사가 끓임 없이 일어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소망의 기쁨이 강물같이 넘쳐흐르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멋진 라마 나욧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라마 나욧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쫓기는 의인의 피난처만 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을 변화시켜서 의인들과 함께 하나가 되게 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 온 다윗이나 그 다윗을 잡으려고 왔던 사람들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영에 취하여 하나가 되어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던 라마 나욧은 모든 악인들이 녹아져 의인들과 하나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계신 성령 충만한 라마 나욧에서 사울 왕의 악한 계획이 허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악인들이 의인들과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영국의 '스로스츠'라는 죄수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0년간 교도소 생활을 했고 400회 이상 가죽 채찍을 맞았으나 전혀 생활이 변화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그가 변화되어 구세군 출옥자 보호소에서 18년간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스로스츠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400번의 가죽 채찍이나 40년 간의 교도소 생활로도 변화되지 않았던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불과 2분만에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강한 능력이 인간 속에 들어오시면 인간은 자신의 의식적 통제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새로운 능력인 성령에 붙잡히게 되면 그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되고,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통제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악인의 어두운 마음의 방을 새로운 빛으로 조명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거역하며 소멸하던 역행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라마 나욧은 어떤 곳입니까?
마지막으로, 라마 나욧은 온 이스라엘의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라마 나욧에서는 명령을 발하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곳이 라마 나욧입니다.  라마 나욧에는 창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던 사무엘과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라마 나욧, 거기에는 속된 사람들,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는 성령이 역사를 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믿음과 사랑과 평화가 정착되는 곳입니다.  그곳에 믿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다윗이 그곳에 찾아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곳에 사랑이 없었다면 한 나라의 왕인 사울이 그곳에서 하루종일 옷을 벗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울이 옷을 벗었다는 것은 무장을 해제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평화가 없었다고 한다면 다윗이 살아 있었겠습니까?

물론 라마 나욧 그곳에는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곳은 가난합니다.  그곳에는 권력이 없습니다.  소위 정치인들이나 권세자들이 가지고 있는 백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곳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던 곳입니다.  그곳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뢰가 있었습니다.  분열과 다툼이 없는 평화로움이 넘쳐흘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세움을 받은 우리 언양 영신교회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빛이 없는 이 사회에, 미움과 시기와 불만과 소망이 없는 이 사회에 우리 언양 영신교회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라마 나욧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인 이곳에는 의인이 와서 평안을 누리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이곳에는 속된 사람들이 와서 거룩하게 변화를 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이 사회에 큰 감동과 감화를 미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의로운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왔다가 깊은 상처를 받고 간다면, 속된 사람들이 찾아 왔다가 변화됨이 없이 그대로 속된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이 사회의 앞날은 어두울 수 밖에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가 세상 속에서 희망을 줄 수 있을 때 세상도 희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기대를 가질 수 있을 때 세상도 미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의 교회는 한국의 라마 나욧이 되어야 합니다.  울산의 라마 나욧이 되어야 합니다.  언양의 라마 나욧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힘써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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