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스승의주일] 스승을 가진 자의 복 (갈 6:6)

  • 잡초 잡초
  • 497
  • 0

첨부 1


스승을 가진 자의 복 (갈 6:6)  

  
승리하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정된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와 같은 발전과 진보가 가능케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바로 배움이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서 도전받고 그 배움을 통해 도전받은 사실을 이루는 힘을 부여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그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선생님이 있다면 아주 유용할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그들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전달하여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인류문화유산의 계승과 전달은 언제나 교육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먼저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배울 학생이 있어야 합니다. 또 선생과 학생이 배우고 가르칠 도구와 과정, 즉 교육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교육의 3요소라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선생님입니다. 선생이 없다면 배울 학생이 있을 수 없고 교육과정 역시 선생에 의해서 선택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 삶에 여러 종류의 선생님을 만나며 살게 됩니다. 

인생의 축복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동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 능력 없이 태어난 우리는 우리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배우게 되는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인생의 처음 선생님은 부모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위를 넓혀 우리는 학교가 되었건, 아니면 사회가 되었건, 교회가 되었건, 어떤 삶의 장면에서건 우리는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축복이요, 친구를 잘 만나는 것도 축복이요, 또 삶의 업무장면에서 동역자를 잘 만나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테두리와 근본구조가 형성되는 기초단계나 아니면 삶의 풍부를 이루는 발전의 단계에서 우리를 감동시키고 삶의 발전과 진보를 자극시켜줄 선생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더없이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 자녀를 가르치실 선생님을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자녀는 그 선생님을 통하여서 삶에 도전받고 삶의 터득을 이루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잘 가르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선생님이 잘 가르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이만큼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와 그 은혜가 부모, 친구, 주변사람들, 또 우리의 삶의 판단과 기준의 능력을 키워준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아마 우리 마음에 내가 진심으로 내 마음에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야’ 하고 한 분이라도 내 마음에 스승을 둘 수 있다면 그 분은 매우 삶이 풍부하고 행복하다고 말해도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내 삶에서 스승이라고 모실 수 있는 분은 한 분도 없어.’라고 생각하면 그 마음은 얼마나 척박한 마음이겠습니까?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죠. 

오늘은 특별히 교회에서 스승의 주일로 지냅니다. 교회역시 성령께서 역사하지만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믿음을 전수하고 은혜를 이루는 방법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생님을 향한 존경의 마음과 존중하는 삶의 자세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분들은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또 그분들을 통해 우리는 영적양식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사랑의 가르침을 받아 믿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나는 혼자 성경 읽고 잘 분별하여 결정을 다해.”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그 능력이 생긴 근거가 무엇 때문입니까? 

바른 가르침의 통로를 거쳤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능력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교역자, 각종 주일학교 교사, 새가족부 교사, 구역장, 부부구역장, 또 모든 각종 교사들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분들을 존중하고 교회의 아름다운 가르침과 전승이 주님 앞에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함께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가르침을 받는 모든 자들은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스승의 중요성입니다. 

스승이 있는 사람은 생복한 사람입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먼저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한 부분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안착한 후에 그들은 안타깝게도 하나님께 대한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가장 가슴 아픈 일이 그 후세대들의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이루어지는 계교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했지만 광야의 방황을 거쳤고, 가나안 정복의 지루한 전쟁을 통해서 어렵게 가나안에 안착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한 것까지는 좋습니다. 이들은 그러나 생활에 취해서 그 후손들에 대한 말씀의 교육을 잊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게을리 했습니다. 마침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은 광야에서 체험했던, 정복의 전쟁에서 체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고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 <사사기 2장 14절,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고 이방신상을 섬기고 선과 의가 없는 악한 일만 행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 그들을 붙여주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배격하고 이방신상 섬기고 마침내 죄악에 빠진 그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재앙의 매를 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15절>을 보니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재앙이 떠나지 않았다고 했어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축복이 떠나지 않아야 하는데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축복은 없고 재앙만이 그들을 따라 다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워하던 가나안 생활을 맞은 이스라엘 백성은 유랑하던 유목민에서 이제는 곡식을 뿌리고 거두어 정착하여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했고 이들도 소망했던 삶이 이들 앞에 열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 소망과는 전혀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그리고 교육을 상실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삶에 취해서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기보다는 생활의 안주와 쾌락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하나님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손들에 대한 교육도 이와 같이 상실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역시 이런 마음 계신 분은 없습니까? 
생활이 좀 나아지면 내가 어떤 시점부터 시작해서 내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하지만 그 상태가 되어도, 그 시간이 되어도 처음에는 감격하지만 그다음 며칠 몇 달이 지나가게 되면 흐지부지한 적은 없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 하나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기를 소원했어요. 정말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러나 생활이 풍요로워지면 풍요로워질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도 하지 못하고,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을 버리는 재앙가운데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생된 자들은 선생된 자들의 책무를 포기하고 백성들은 역시 배우기를 귀찮아할 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영적 추락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역사를 보게 되면 왕과 왕의 선생에 대한 내용이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제사장이나 선지자의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아서 나라를 선정했던 왕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선생들의 가르침을 뿌리쳤거나 그 선생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또 다른 선생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몰락하는 과정을 겪은 것을 보게 됩니다. 

<역대기하편 24장>을 보게 되면 7살에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요아스라는 왕이 등장합니다. 요아스는 안타깝게도 그의 아버지 왕이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의 모친은 자기 아들들까지도 다 죽여가면서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고 싶어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고모가 그 왕자를 몰래 숨김으로 말미암아 일곱 살까지 양육을 받았고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대 제사장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하여 요아스를 왕위에 세우게 됩니다. 

<역대하 24장 2절>을 보면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요하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호야다는 요하스를 왕으로 세운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그를 가르쳐 하나님 앞에 든든한 믿음의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던 요하스는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입게 되고 나라가 풍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기하편 24장 15절>을 보게 되면 ‘여호야다가 나이 많아 늙고 죽으니’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여호야다가 일백삼십 세가 되어서 늙고 죽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요하스의 마음이 달라진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도전이 되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스승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또 다른 스승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17절>이후를 보면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며 말할 때 왕이 그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간신의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상을 섬기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결과로 <18절>에 이르기를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고로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릇된 이방신상 숭배자들의 말을 듣고 그만 이 요아스가 흔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을 섬길 때 평안을 누렸지만 그를 세웠던 스승이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스승을 두지 못하고 만나지 못했을 때 그릇된 무리의 말을 듣고 판단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대기하 26장 5절>이하를 보면 웃시야라는 임금의 이야기가 또한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께 구하는 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 기록하기를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져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가랴라고 하는 훌륭한 선생님을 두었을 때 말씀을 배우고 말씀의 조언을 받고 말씀의 조명을 받아 그의 삶은 하나님을 구하고 구하는 동안에는 애굽 변방지방까지 나라의 위세가 떨쳐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1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가랴가 이 세상에 없어지고 저가 강성하여 갈 때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범죄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를 가르치던 말씀선생 스가랴가 세상에 없게 되고 다른 선생님을 맞이하지 못하고 그는 그만 그의 강성함에 스스로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 제사장의 위를 침탈까지 하였습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제사장의 위를 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 향단에 분향하는 제사장의 권위를 스스로 침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가지고 향단에 분향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평생 문둥병으로 고생하다가 문둥병 상태로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 바른 교육받고 그대로 하나님을 섬길 때 승하였고 변방까지 이름을 떨칠 수 있었으나 이 모든 것이 끝나게 되었을 때 삶이 몰락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훌륭한 선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훌륭하게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바른 교육이란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최고의 가치의 것을 만듭니다. 가끔 우리 성도님들의 기도제목을 볼 때 이런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학년이 바뀔 때, 새학기가 될 때 이렇게 기도제목을 기록한 것을 봅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데, 혹은 학년이 바뀌는데 좋은 선생님 만나게 해 주십시오.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주일학교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아이가 믿음 안에 잘 양육 받게 해 주십시오.” 

학교에서도 훌륭한 선생님 만나고 교회에서도 훌륭한 선생님 만나서 아이가 하나님 앞에 도전받고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을 세우기를 원하고 생활을 세우기를 원하는 부모들의 간절한 소원의 기도제목입니다. 이런 기도제목을 볼 때 참 지혜로운 분들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님과 더불어 신앙을 지도하는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물론 부모가 훌륭한 성경교사가 되어야 하겠죠. 그러나 또 한편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여러분, 저희 교회는 그런 분들이 없어서 제가 이런 말씀드리기에 아무부담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앞으로도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 돼요. 무엇이냐면 성도님들은 자녀들 앞에서 절대 다른 성도님들 비하하거나 비난하시면 안 됩니다. 

“~장로, ~집사, ~권사, 못됐어. 나빠.” 하고 얘기하거나 혹은 “~목사 나빠.” 하고 얘기하면 그 아이들은 OOO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성도, 이와 같은 직분을 기억해요. 
‘아, 교회 다니는 분이 그렇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죠. 

여러분, 교회 다니는 성도분의 자녀 중에 의외로 마음이 교회에 부정적인 아이들이 있습니다. 간혹 이요. 그런데 그 아이를 보면 대부분 그런 환경 속에 있을 수밖에 없겠죠.
 
여러분, 정말 나는 저 사람 욕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욕하고 사는데 나을 것 같아 하시면 하세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되냐면 절대 직분을 붙이지 말고 OOO이름만 말하고 욕하세요. 그러면 그 사람 나쁜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아이들에게 귀한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 아이들과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세요. 

여러분 식사기도하면 “오늘 좋은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음식 먹고 건강하고 주의 일을 이루게 하옵소서. 또 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이 음식을 제공해줄 수 있는 축복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시고 우리 목사님 위해서 기도하시고 가르치는 선생님 위해서 기도하시면, 매일매일 그와 같이 하면 당연히 그 아이에게는 평생을 통해서 배우게 될 겁니다. 아이들은 하라고 하는 대로 절대로 안 해요. 그렇지만 부모가 하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모범적으로 배울 수밖에 없는 거죠. 이것은 고리타분하게 옛날 책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제입니다. 
선생님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삶에 진정한 스승을 모셔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진정한 존중과 존경의 마음으로 우리를 가르치는 분을 존중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 스승의 자리에 있는 분은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스승을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고 우리 스스로를 위한 아주 중요한 결정입니다. 
건강한 사회는 스승을 존중하게 됩니다. 존중하고 존경하지 못하면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치를 부여하는 만큼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됩니다. 선생님이 중요하고 또 존중해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삶이란 선각자의 삶을 모방하고 따르고 개선하고 승화하여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 인격이 아니고 지식과 기술만 배울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자체를 못 믿는데 어떻게 부수적이 여러 가지 것을 신뢰하겠습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죄악투성이이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심정으로 존중하고 높여줌으로 서로에게 배울 수 있어야 돼요. 선생님에 대해서도 나쁜 점을 보고 굳이 밝히려고 하지 말고 좋은 점을 보고 영향을 받고 극대화시켜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를 포함해서 사람들은 다 죄악으로 물든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선함이 없고 죄악으로 물든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날마다 우리 자신을 이겨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하루하루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면만 보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있어서 좋은 면을 보시고 기뻐해주셔야 돼요. 
“누구지?” 그 사람 파헤쳐서 그 사람의 약점을 보고 검은 점을 본다면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오늘 여기도 자매님들 많은데요, 아주 예쁘게 화장들 하고 오셨는데 “참 잘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정성들여 화장하신 것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저 화장 다 벗겨보면 속에 어떤 모습이 있을까?’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잖아요. 
그건 매너가 아니잖아요. 여러분 그렇게 예쁘게 보여주고 싶어 하면 그냥 예쁜 모습을 보여야지 왜 예쁘지 않은 모습을 굳이 연상하며 마음에 상처를 받으시려고 하십니까? 

사람들 보면 정말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남에게 정말 평가받고 싶어 하는 그런 면모들이 있어요. 보시고 평가하시고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세요. 
늘 말씀드리잖아요. 화원에 갔으면 꽃을 보고 오셔야지 왜 화원에 가서 벌레 몇 마리 있는 것보고 마음 상해서 오십니까? 
교회 가시면 은혜를 받고 오셔야지 왜 몇 가지 마음 안 드는 것 때문에 시험받고 오십니까? 

여러분, 정말 우리의 삶 가운데 마찬가지예요. 늘 말씀드리잖아요. 
밥 한 상 딱 받으면 맛있는 것 먹으세요. 맛있는 것 드시고 “잘 먹었습니다.”하고 인사하고 나오시면 돼요. 왜 간장 퍼먹고 짜다고 하십니까? 

여러분, 우리 삶에 기쁘게 사셔야 돼요. 
저는 요즘 생각하는데 우리 삶에 기쁘려면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우리 삶에는 기쁨이 있을 수가 없어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셔야합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셔야 돼요. 

여러분, 내 옆에 사람 만날 확률이 얼마죠? 
지구상에 60억분의 일이에요. 글쎄 요새 복권 굉장히 어렵다고 하는데 복권될 확률보다 더 어려운 것 아니에요? 
60억분의 일인데요. 그러니까 내 옆의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기적중의 기적이에요. 그런데 그런 기적으로 만난 사람을 왜 기쁨으로 바라보지 못하십니까? 
기쁨으로 바라보고 은혜로 바라봐야 돼요. 
내 자식도 마찬가지예요. 60억분의 일로 나하고 맺어진 관계예요. 정말 우리 마음에 기쁨과 사랑을 가지고 바라봐야죠. 

그래요. 좋은 선생이 없다 말하지 말고 내가 좋은 제자가 되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의외로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존중하는 만큼 감동받고 존중하는 배움도 커지고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불신입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자도 자신을 가르치지 말고 진리를 가르치고 주님의 은혜를 가르쳐야 하며 배우는 자도 가르치는 자를 불신하지 말고 진정으로 존중하고 좋아하고 배움으로 말미암아 더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요즘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리는데 삶의 의미 있는 날들에 대해서 자주 말씀드려요. 
아마 목사를 통해서 자주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무슨 뜻이 있을 겁니다. 
저는 요즘 살아가는 날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생각해요. 삶의 수명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정말 삶의 의미 있는 날이 얼마나 있을까하는 겁니다. 살아있는 것이 생존의 수준을 넘어서 삶의 의미 있는 날로 우리들에게 화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내가 말하면 저 사람이 알아듣고, 저 사람이 말하면 내가 알아듣고, 내가 표현하라고 하는 것 다 표현하고, 또 내가 원하는 곳에 내 발로 걸어가 갈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 할 수 있다면 이것은 의미 있는 날이잖아요. 과연 그 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각종 병도 다 피해 가야돼요. 치매도 피해가야 되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러 가지 우환도 피해가야 되고, 또 나만 아니라 내 가족 중에 어려움이 있어도 또 내가 거기 같이 끌려들어가야 돼요. 모든 것 다 피해가야 돼요. 정말 쉽지 않아요. 마치 지뢰밭을 통과해가는 것 같아요. 멀리서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갑자기 나를 땅 치니까 갑자기 내가 팍삭하고 깨진단 말이에요. 삶에는 정말 어려운 일이 많아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뒤에서 차가 와서 쿵 박아서 갑자기 병원에 몇 달 입원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생이 정말 황당한 경우가 너무 많단 말이에요. 그런데 과연 내게 있어서 내가 정말 이와 같이 의미 있는 날을 보낼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여러분, 오늘 예배당에 이렇게 오신 분은 너무 너무나 소중한 분들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의미 있는 날 다 따지고 보면 몇 날이나 될까 생각해 보세요. 
마치 옛날 돈 엽전 같은 것 꺼내어 끼었다고 합시다. 그것 한 개씩 한 개씩 꺼내서 쓰고 있는 겁니다. 하루하루 쓰면 이게 하루하루 줄어듭니다. 점점 이쪽 손은 가벼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하루하루 한 개 한 개 꺼내서 쓰는 거예요. 
그럼 오늘 뭔가 이루셔야 되잖아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셔야 되잖아요. 
왜 분노하며 사십니까? 
왜 슬퍼하며 사세요? 
왜 가슴아파하며 사세요?기쁜 일하며 사시고 의미 있는 일하며 사시고. 
여러분 삶을 누리셔야 돼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쁘게 살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일에 우리의 삶을 보내야 돼요. 
정말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대처하며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갑자기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요. 
어제까지 건강했는데 오늘 갑자기 아픈 것 같더니 그것으로 환자가 되어 누워버려요. 
갑자기 전화 한 통 받았는데 갑자기 인생의 색깔이 흙빛으로 변해요. 
갑자기 누가 말 한 마디 했는데 갑자기 내 인생이 달라져요. 우리 인생에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우리 이렇게 매주 볼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큰 축복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의미 있는 날을 살아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냥 살지 마세요. 너무나 소중한 날이에요. 
소중한 시간이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소중한 사람이에요. 애틋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 가야돼요. 내 앞에 있는 사람 소중히 여기고 나에게 배움을 주시는 사람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는 사람이에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는데 그 사람은 또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죠. 배울 것 없는 사람은 뭐죠? 
남은 것은 추락밖에 없어요. 지금부터 쇠퇴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진보하는 사람 있는데 이제 남은 것은 쇠퇴할 것 밖에 없다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슬픈 삶입니까? 

<빌립보서 1장 8절>을 보면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이들 이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는 거죠. 
사도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열정과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열정의 사랑이죠. 
우리교회의 모든 선생님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선생님들을 존중하셔야 되고 정말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애써야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 교사했을 때거든요. 대학생 때. 
중학교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제가 그 때 이런 생각 했어요.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은-10여명 되었는데-매주 꼭 한 번씩은 찾아보리라. 그리고 그 때 학생 때니까 제가 용돈 받아쓰잖아요. 제가 쓰는 용돈의 50%는 꼭 이 아이들을 위해서 쓰리라.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오조였습니다. 아마 모든 주일학교 선생님들 다 그런 따뜻한 마음 가지고 아이들을 돌보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아까 예배시간에 참석하셨는데, 고등부선생님 하셨는데, 좀 되었습니다. 전에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건 고등부 가르치는 아이가 그 백에서 몰래 그 자동차 키를 가지고 가서 자동차를 몰고 나갔어요. 우리 교회에서. 그런데 그러다가 다른 차에 부딪혀서 사고를 냈어요. 그런데 그 얘기를 하시는데 그 아이를 하나도 탓하지 않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다행히 그 아이가 다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주 고맙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 아이는 지금도 우리 교회에 있습니다. 저는 알고 있어요. 누군지. 
지금 훌륭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몰래 자기 자동차 키를 가지고 가서 사고 냈는데 그 사고처리 다 하시고 그래도 그 아이 잘 돌보시고 잘 가르치시더라고요. 정말 감사하더라고요. 
그렇게 선생님들이 가르치시는 거예요.
 
뭐 내가 손해났고... 이런 것 생각하지 않고 그 아이 다치지 않은 것 고마워하고 또 그 아이가 믿음 안에서 또 회개하고 잘 배워주니 고마워하는 거죠. 그런 사고를 냈으니 선생님 말은 잘 듣겠죠? 
그래요. 우리도 그렇게 자랐고요. 또 그렇게 사랑으로 키우다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에게 임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요. 선생님들이 이러한 열정을 가지고 가르칠 때 정말 선생님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애를 써서 협력해 주셔야 하는 겁니다. 
선생님들이 또한 이러한 열정이 생기도록 마음을 합해서 이루어주시도록 해야 됩니다. 
손바닥도 마주칠 때 큰 소리가 나죠. 

우리는 좋은 선생님을 위해서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생도 사람인지라 반응도 없고 가르침이 소용없는 것 같은 허무한 마음이 되면 낙담할 수가 있겠죠. 
가르치는 자의 열정을 포기하지 않도록 애쓰는 것도 가르침을 받는 자의 몫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을 것을 함께 하라고 했어요. 
가장 좋은 것을 함께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겁니다. 마음 불편하게 해드리면 안돼요. 늘 배려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고 본인이 믿음 안에 잘 성장하는 것이 가르친 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제가 우리교회에서 가장 큰 기쁜 일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저희교회에서 저한테 직접 세례 받았던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이 서리집사도 하고 안수집사도 하고 교회에 아주 기둥 같은 인물들이 돼서 교회봉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기뻐요. 
저한테 세례 받았다는 것은 초신자라는 뜻 아니에요?그런데 그 사람들이 믿음이 자라서 교회에서 큰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거예요.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선교사님이 한 분 오셨어요. 
오셔서 저한테 뭐라고 얘기했냐면 “목사님 이게 말이예요, 내가 원주민들을 선교를 했는데 처음에 그들이 아무것도 몰랐는데 교회도 다니고 예수도 믿고 했는데 그 원주민들이 저한테 이걸-인도네시아 남방이 있어요.-하나 선물 했다는 거예요. 
한국에 올 때 그것을 입고 나오셨어요. 원주민들이 선물한 것이니까 뭐 좋기야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입고 나오셨더라고요. 그러면서 저한테 와서 자랑하시더라고요. 얼마나 흐뭇하셨겠어요? 
그 원주민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데려다가 이와 같이 가르쳐서 그 분들이 또 이렇게 선교사님을 선생님이라고 셔츠를 하나 갖다드렸는데 그게 그렇게 감격스러우신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에 올 때 그걸 입고 나오신 거예요. 또 그걸 입고 나와서 자랑하세요. 

여러분, 이게 가르치는 자의 마음의 기쁨이잖아요. 
말씀을 받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정말 믿음이 자라서 하나님 앞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기쁜 것이죠. 
그럼으로 우리는 믿음이 자라 기쁨으로 용기가 샘솟도록 해드려야 돼요.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해요. 
“구역식구가 있는데 그분이 믿음이 잘 자라서 요새 제자훈련 4학기까지 마치고 아주 교회에 봉사도 하시려고 하고 굉장히 믿음이 잘 자란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그 말씀을 들으니까 너무 기뻐요. 그분 전에 초신자였었는데. 
제가 그 분 전에 분명히 초신자로서 가르친 적이 있는데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하더라고요. 
여러분, 우리 믿음이 자라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봉사하면 청말 그것이 가르치는 자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거죠. 
그래요. 기쁨으로 용기가 솟게 해 드려야 되고 마음에 동기가 제공 해 주셔야 됩니다. 
정말 우리가 초신자에서 헌신자로 나갈 때 가장 가르치는 자를 기쁘게 해드리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은 모두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야돼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저희 교회 교역자로 오시면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요. 
“처음에 3년은 민폐만 끼칠 겁니다. 그리고 나중 3년은 아주 귀한 동역자로 사역을 잘하실 겁니다. 그리고 또 나중 3년은 정말 큰 기여와 공헌을 하게 될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거든요. 
그래요. 우리 처음에 뭐 잘하는 것 같아도 그것이 우리들에게 어려움을 끼치는 것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믿음도 크고 능력도 크고 헌신의 도도 높아져가는 것이죠. 그래요. 이와 같이 얘기하는 것은 끝까지 함께 해서 동역자가 되어 달라는 뜻이죠. 
그래요. 제가 저희교회 성도들, 또 청년들, 우리 자라는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꼭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대한민국 탑 리더 3,000명중에 1,000명 이상은 우리교회에서 교육받고 우리교회에서 믿음생활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한 사람이 천 명 안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우리 청년들에게 특별히 매번 기도할 때마다 그렇게 기도해요. 
“저는 우리 교회에서 대한민국 탑 리더 3,000명중에 1,000명 이상은 우리교회에서 자란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아멘 한 사람은 본인이나 자녀나 그렇게 될 거고 안 한 사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대한민국 3,000명의 지도자 중에 1,000명이상은 반드시 우리 교회 성도나 그 자녀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세요. 

“하나님 내 아들이, 내 딸이 반드시 그 1,000명중에 하나가 되어서 이 민족 백성을 정말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인도하는 주의 자녀 되게 해 주시고 또 저도 그러한 역사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제가 이 기도 시작한 지 15년 되었습니다. 
정말 하루하루 기도하는데 10년 이상 기도하면 그것이 문화가 되고 마음에 이미 굳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돼요. 정말 하나님께서 분명히 큰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서로를 아끼고 존귀한 삶을 살아야 돼요. 

우리는 서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을 소중하게 여깁시다. 
내 앞에 있는 사람 소중하게 여깁시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섭리하셔서 내 앞에 있게 해주신 사람이에요. 
서로 존중하고 가르치는 자도 존중하고 내 앞에 있는 동료도 존중하고 내 식구도 존중하고 내 아내도 남편도 자식도 모든 사람을 존중하시면 정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김을 갖게 되죠. 

<고린도전서 4장 1절>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자로 여길지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서 존중하라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9절>을 보니까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은 간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읽은 성구 갈라디아서, 갈라디아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갈라디아서의 가장 주된 내용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사상이에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럼 왜 갈라디아교회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내용을 이렇게 편지로 보냈을까요? 
갈라디아교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내용을 받아들여야 될 정도로 초보교회였다는 뜻이에요. 다 알고 있으면 뭐 하러 그와 같은 내용을 전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초보교회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너희는 이제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믿음이 큰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정말 믿음이 큰 성도들 되셔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마음의 기쁨을 주실 수 있는 성도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처럼 하라’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주님 앞에 부르짖고 주님 앞에 애타게 소원하는 이와 같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진심으로 순종하고 복종하고 정말 그들에게 기쁨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입니다. 
저희 교회 모든 사랑하는 선생님들, 모든 구역장님들, 또 부부구역장님들, 가르치는 모든 분들께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비슷한 모습으로 앉아있지만 마음은 각각이에요. 제가 예배드릴 때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마음에 어떤 애잔함을 가지게 돼요. 뭐냐 하면 오늘 예배드리는 분의 기쁘고 감동된 마음으로 감격해서 나와서 예배드리는 분도 있어요. 그런데 정말 노심초사하고 쫓기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꾸준히 어떻게 이번예배에 참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 주셔서 꼭 나에게 응답을 주셔야 돼 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조급하게 쫓겨 가면서 마음에 쫓기는 심정으로 예배드리는 분도 있어요. 

어떤 분은 낙심해서 예배드리는 분도 있고요, 어떤 분은 정말 몸이 너무 아파서 겨우겨우 몸을 이끌고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는 분도 있어요. 
어떤 분은 경제적으로 너무 피곤해서 지쳐있는 분들도 있고요, 어떤 분은 일이 잘돼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있는 분도 있고요, 또 어떤 분은 예배드리기 귀찮은데 안 나올 수 없어서 나온 분도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각각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각양의 상태에서 주님 앞에 나온 모든 이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마음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심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각양 각인에게 놀라운 은혜로 각각의 모습으로 임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결국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거하게 되는 겁니다. 
저는 어떤 마음으로 주의 교회에 오셨을지라도 예배당 계단 내려갈 때 믿음으로 살아야지.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내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지.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야지. 
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가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그 중에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였으니 우리 선생님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가지고 주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