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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의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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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 (왕상 19:1-8)


여러분,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망원인 중 가장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위 암 2위 교통사고 3위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살이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부터 지난해부터 이 순위가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증가하여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른 2002년도의 자살 건수는 총 1만3천 건으로 하루 평균 36명, 한 시간에 약 1,5명 이상씩 자살을 한 셈입니다. 2002년 통계가 이러니 지금은 그 숫자가 더 늘어났을 것입니다. 

이런 통계대로라면 이 시간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음의 길을 선택하여 이 세상을 등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작금엔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사들까지 자살을 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 시대는 자살 신드롬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쉬운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 역시 삶을 살다보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이제 더 이상 삶을 살 필요도 없고 살 수도 없을 만큼 느껴지는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요, 수 많은 유혹과 시험 환란과 고통이 가득한 나그네 인생길의 정거장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생각이 찾아올 때 반응하는 모습은 적어도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에 우리가 때로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고 힘겨운 순간을 만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무책임하게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살을 거꾸로 하면 뭐가 됩니까? 살자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자살이란 단어가 떠오를 만큼 절망적이고 힘겨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면 자살이 아니요 살자라고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이대로 끝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우리는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극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한 사람 역시 이러한 고민에 빠져 힘겨워 하며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게도 갈멜산의 위대한 기도의 승리자, 능력의 종 엘리야가 바로 이런 고민에서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어떤 상황에서 그토록 힘겨워하고 있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1절입니다. 1절에 보면 아합이 자신의 아내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이방 선지자들을 죽인 것을 말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의 전장인 18장에 나오는 갈멜산의 대결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야 시대의 왕은 아합 왕이었습니다. 그는 시돈의 엣 바알이라는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면서부터 이세벨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고 사당을 지어 여호와를 믿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을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세우셔서 아합 왕에게 우상을 숭배함으로 인하여 그 나라에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전 이스라엘 지역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풀들과 나무들은 말라가고 짐승들과 가축들도 극심한 가뭄 속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합 왕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고 왕비 이세벨은 오히려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잡아다가 처형을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아합 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기로 하고 바알이 진짜인지 여호와가 진짜인지 대결을 하자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멜산에 모였을 때, 엘리야는 바알선지자 450명에게 먼저 너희들의 신을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을 쌓아 놓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심지어는 칼로 몸을 그어 피를 흘렸지만 하늘에서는 불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차례가 되자 그는 단을 다시 쌓고 도랑을 만들어 거기에다가 물을 네 통이나 더 가져다 붓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18장 36-37절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을 다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모두 마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고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고백하게 되고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잡아서 기손 시내에서 전부 죽이게 됩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이세벨이 사자를 보내 엘리야 선지자에게 ‘내일 이맘때에는 너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처럼 죽을 것이다’ 하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19:2절 말씀입니다.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얌전히 말하고 있어 그렇지 표현 그대로 하면 너 내가 죽여버릴거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게 되자 엘리야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3절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이 형편을 보고 무서워서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브엘세바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보고 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엘리야가 왜 낙심하여 브엘세바로 황급히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까?
그는 지금 자기가 처한 형편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처한 위기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고 나아가느냐에 따라 그 길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분당에서 누구를 만나려고 한다면 분당으로 가는 표지판을 보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분당이 아닌 신갈쪽으로 가는 표지판을 보고 가게 되면 분당이 아닌 신갈쪽으로 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명이 위협받을 만큼 극한 절망과 좌절의 상황속에서 우리가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12:2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이 아니라 바로 그 모든 상황속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실 믿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인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보십시오.. 물 위를 걷는 기적적인 체험을 하던 그가 왜 물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던 시선이 세차게 다가오는 풍랑을 바라볼 때 그는 바다 가운데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엘리야가 왜 브엘세바로 도망쳐 갈 수밖에 없었습니까? 주의 제자 베드로가 왜 바다 가운데 빠져들고 말았습니까?
만군의 주 하나님을 바라보던 엘리야의 시선이 그의 처한 형편으로 옮겨지게 될 때 사랑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던 베드로의 시선이 불어 닥치는 거친 풍랑에 옮겨지게될 때 그들은 도망치고 물에 빠지는 안타까움을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생명이 위협 받을 만큼 우리의 살을 에이고 마음을 도려내고 뼈를 삭게 만들 정도의 고통이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의 거친 파도가 우리를 삼키려고 우리에게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주위의 누군가가 마치 이세벨과 같이 우리를 죽이려고 우리를 괴롭히고 힘겹게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그 모든 상황과 사람들을 다스리시고 온전케 하실 예수님, 만군의 주 우리 주 하나님인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에 혹시 마음에 많은 상처와 아픔 그리고 삶의 힘겨운 무게로 고민하는 성도들이 계시다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모든 상황을 주님 보시기에 가장 합당한 모습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브엘세바로 도망가서 엘리야는 사환을 그곳에 두고 또 다시 하룻길을 더 들어갑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을까요? 
이 4절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해 보아야 할 단어는 스스로 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himseif입니다. 그는 자신 스스로 자기 혼자 그 고통의 순간들을 걸어갔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순간 우리는 우리 혼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렵고 힘든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그 어려움가운데 혼자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갈멜산의 불의 응답과 승리의 기쁨과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의 능력속에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은 절망의 광야 길을 힘없이 걷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에 여전히 함께 하셨던 주님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들을 잘 감당하고 기도한대로 응답되며 주님 주신 승리의 기쁨이 있는 신앙의 갈멜산에서만 함께 하시고 절망의 광야, 좌절의 로뎀나무에는 함께 하시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있든지 최선의 상황에 있든지 그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갈멜산이십니까? 아니면 절망의 광야, 좌절의 로뎀나무와 같은 회복과 치유가 필요한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이십니까? 그 어떤 상황에도 함께 하시는 그 분을 만나는 이 시간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엘리야가 이 좌절의 로뎀나무 아래서 무엇을 합니까?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하는 기도였습니다. 나는 내 열조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는 어쩌면 기도라기보다 죽음의 고통의 외마디 신음이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신음 같은 고통의 기도 속에서 그는 누구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바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시선이 하나님께로 향하여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다시 한번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신음같은 기도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삶을 살다보면 정말 힘들고 지쳐 낙담하고 좌절하여 오늘 본문의 엘리야와 같이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을 그야말로 밑바닥이 다 드러날 정도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절박하고 힘겨운 상황에서 우리가 내뱉는 신음 같은 기도도 하나님은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나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나에게 귀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바라고 주만 바라볼지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쉼과 회복이 필요한 성도들에게 새로운 회복을, 위로가 필요한 성도들에게 위로를, 소망을 잃어버린 성도들에게 소망을 회복시켜주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떻게 지쳐 쓰러져 있는 엘리야를 회복시키십니까? 5절 말씀입니다.
누워자던 엘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를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먹으라고 말합니다. 
여기 천사는 7절에서는 하나님의 사자로 언급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는 곧 하나님 당신이심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창16:13절을 볼까요? 하갈이 고통속에서 광야로 도망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만나 위로하고 축복합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다고 하지 않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의 사자는 곧 하나님 당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쳐 쓰러져있던 엘리야를 어루만지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 힘들어 쓰러질만큼 지쳐있는 여러분을 하나님이 만져주시기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의 손길로 보살펴주시기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삼화실업’의 김현식 사장의 간증입니다. 강원도 태백 출신인 그는 서울에 올라와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20여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푼푼이 돈을 모아 40세가 되었을 때 공장을 차렸습니다. 오랜 직장생활로 인한 경험과 노하우로 사업은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직공도 많아지고 형편이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뜻밖의 전기누전으로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렇게 1차로 화재를 당하고 2차, 3차로 화재를 당한 후에 잘 나가던 공장이 문을 닫게 되고 부도가 나서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극한 상황 속에서 절망에 빠져 죽음밖에는 택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더 이상 재기할 기력도 없고 가능성도 없자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얼굴이라도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고향으로 가기 위해 청량리 역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두 팔과 다리가 없이 구걸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두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 저 사람도 저렇게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사지가 멀쩡한 내가 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누군가가 1억을 준다고 하면 과연 내 팔을 팔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을 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계산하니 그는 4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다시 사업을 시작하였고, 연간 매출 120억 원의 튼튼한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고통스럽고 힘겹지만 어찌보면 그 고통보다 더 힘겨운 고통과 어려움속에서도 변함없이 꿋꿋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감당할 시험과 어려움만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또한 하나님은 그 모든 시험과 어려움속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어루만지고 회복시키시길 원하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우리를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실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일어나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눈을 들어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해 지금 현재 엘리야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창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따라 그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급히 아브라함을 불러 말리시고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알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수양을 준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창 22:13에 보면 바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볼 때 하나님이 수양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아들 이삭 대신 바쳐져야 했을 수양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 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의 지쳐있던 엘리야를 위해 떡과 물을 준비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위해 수양을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다시 회복되고 새롭게 되기 위해서 놀라운 계획과 뜻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그것을 이미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의 부모도 자녀가 태어나기전에 그 자녀가 태어날 모든 준비를 합니다. 자녀가 태어나면 그 자녀를 위해 또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의 교육을 위해 준비하고 결국 그 자녀가 결혼하여 독립할때까지 부모는 그 자녀를 위해 평생을 준비하는 분으로 그렇게 살아가십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의 앞날을 바라보고 계획하며 준비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데 하물며 사랑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위해 아무 준비 없이 여러분을 인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보다 앞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그 길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준비해주신 그 주님께서 이 밤에 여러분 각 사람을 위해 필요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풍성함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의 최고조 갈멜산에 있을때에나 신앙의 밑바닥 로뎀나무 아래 앉았을때에나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처해 있는 형편이나 처지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여 여전히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 앞에 외마디 외침과 같은 기도라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루만져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일어나 우리에게 먹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되시사 우리에게 필요한 그것들로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밤 기도하는 가운데 엘리야가 만난 그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할 수 있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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