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청년주일] 희망을 노래하자 (민 14:4-10, 26-30)

  • 잡초 잡초
  • 200
  • 0

첨부 1


희망을 노래하자 (민 14:4-10, 26-30)

   
오늘은 청년주일 입니다. 청년들을 위하여 “도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목회칼럼을 썼습니다.  우리 청년들은 한번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5월, 이 아름다운 계절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모든 청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한 마디로 고통스럽습니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힘든 가운데 있는지 모릅니다.    청년실업이란 말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20대 청년들 태반이 백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젊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청년들은 우리 시대에 소망을 전해주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람들입니다.    현실만 탓하고 낙심하고 절망에 빠져 있지 말고 팔을 걷어붙이고 과감하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스코틀랜드가 낳은 유명한 역사가요 사상가인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3권으로 이루어진 불후의 명작 프랑스혁명(The French Revolution)이란 책을 지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젊은 시절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정적으로 어려움의 연속이었고 매우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장로교회를 다니시는 아버지의 권유로 목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소명도 없었고 적성도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학교 교원으로 수학을 가르쳐보기도 하였고, 법률을 공부하려고 하였으나 신통치 않았고, 언론사에 취직하여 일하여 보았으나 보람도 긍지도 없었습니다.  

그는 고집스럽게 ‘프랑스 혁명’이라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의 탈고할 무렵 평소에 절친하게 지내던 존 S. 밀(John Stuart Mill)에게 그 책을 읽어보라고 원고뭉치를 전해주었습니다.    이 원고는 무려 7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룩한 것으로 토마스의 전부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밀의 책상에 놓여 있던 노랗게 빛바랜 원고는 하녀의 눈에 띄었습니다. 난로에 불을 피우려고 그만 불쏘시개로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칼라일은 너무나 기막힌 나머지 일 주일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고 실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곧 생각을 바꾸기로 합니다.  

“더 좋은 작품을 쓰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먼저 밀에게 편지를 써 보내었습니다.  그는 밀에게 화를 내지도 아니하였고, 부드럽고 온화한 문장으로 위로하면서 절대로 지난 일에 대하여 미련을 두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의 불행했던 시간들에 비추어보면 이번 사건도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라고 하면서 큰 시련을 통하여 성숙한 사람이 되어 일을 마무리한 것입니다.  토마스는 또 다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온 정성을 다하여 7년에 걸쳐 새롭게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불후의 명작 ‘프랑스 혁명’이 된 것입니다. 

토마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거침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아주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우리가 넘어가기 힘든 오늘이라는 큰 돌을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거센 물결을 헤치고 도전하기를 바랍니다. 토마스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천직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토마스 칼라일의 ‘오늘’이라는 시가 있다. 

“어제는 이미 과거 속에 묻혀 있고 /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라네/ 우리가 살고 있는 날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오늘/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날은 오늘뿐/ 오늘을 사랑하라/ 오늘에 정성을 쏟아라....”  

일생에 혼신을 다할 수 있는 한 가지 일, 그런 일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에게 붙잡힌 청년들, 오늘을 최선을 다하며 보람 있게 살아가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저는 오늘,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실만 보고 좌절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와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호주에 다녀오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대륙이지만,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나라입니다.  우리 남한의 면적보다 77배나 큰 나라입니다.    그런데 인구는 우리나라보다 절반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영국 사람들이 들어가 나라를 만들고 원주민들을 죽이고 쫓아내었습니다.  아주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영국인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산으로, 산으로 숨어들어갔습니다.  순박하던 사람들이 도시로 나와 부랑인으로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평화의 나라요, 순박하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된 것입니까?    그들이 이렇게 불행한 위치로 전락한 것은 그들이 오랜 세월동안 섬에 갇혀 살다보니 외부와 연락을 끊었고,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최소한의 말만 있었고, 멀리 있는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서로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글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 원주민은 자기네 땅을 영국인들에게 그냥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원주민 가운데 상원의원도 나오고, 그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관광지로 개발하여 조금은 부유하게 살게 되었지만, 오랜 세월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말과 글 즉 언어는 인간이 이 지구촌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사였습니다.  사람의 말이란 뜻을 담아낼 수 있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말에 어떤 의지를 담아서 말할 것입니까?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 걷다가 피곤함을 느낀 할머니가 “영감, 나 좀 업어줄 수 없소?”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싫었지만 나중에 들을 잔소리가 겁이나 할머니를 업어주었습니다. 업혀 가던 할머니는 조금 미안해서 “나, 무겁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럼, 무겁지!”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습니다. 할머니가 “왜?”하고 되묻자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머리는 돌덩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으니까 그렇지.”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쳤답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주라.”  할머니가 갈 때의 일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업어주었습니다. 미안한 할아버지가 “나, 무겁지?”하면 자기가 말한 대로 따라할 것 같아서 “나, 가볍지?”하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럼 가볍지!”, “왜”하고 되물었습니다.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잔뜩 들었으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말에는 격려와 위로가 있고, 긍정적인 생각이 담겨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평소에 어떤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마 제가 사용하는 말 중에 즐겨 사용하는 말은 어떤 말이 있었는지 설교문을 읽어보면서 찾아보았습니다. 희망, 기쁨, 축복, 은혜, 믿음, 성령, 소중하다는 말, 복되다는 말, 그런 말을 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은 어떤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아마도 긍정적인 말, 소망적인 언어를 주로 사용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교우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말을 많이 사용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향우 10년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향후 10년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앞날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로 덮여 있습니까?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의 앞날이 불투명하고 뿌연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대로 살만하고,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는데, 우리의 평소 사용하는 말이 우리의 앞을 어둡게 만들고, 스스로 절망에 빠져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어떤 말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자기를 그 말에 얽어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을 주는 말이 있고, 불행을 불러오는 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우리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부터 구별된 말, 세련된 말, 성숙한 말들, 믿음이 가득 담긴 말을 해야 합니다.  짧지만 그런 한 마디의 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사랑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잘 했어요”, “기도해 줄게요”, “믿어요”, “잘 될 거야”, “네가 참 좋아”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시인 이해인의 “나를 키우는 말”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성공의 비결은 험담하지 않고 상대의 장점을 드러내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은 그 사람의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12명의 정탐꾼을 뽑아서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였습니다.  12명은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선발하였으니, 젊고 패기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을 책임질만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런 12명에 선정되었다는 것은 장차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유다지파에서 갈렙,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여호수아라는 사람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 외는 이름은 있으나, 다수의 부정적인 사람으로 기억할 것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역사에서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 인류평화에 기여한 사람, 사람을 사랑한 사람들만 기억해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 성읍을 이루고 사는지, 산성을 이루고 사는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담대해야 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은 40일 간 정탐하며 헤브론이란 성읍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는데, 성읍도 크지만, 그곳에 사는 아낙자손은 거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가지고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로 따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모여 있었던 바란 광야의 가데스로 돌아와서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정탐꾼들은 그 땅의 소산을 보이면서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이 “그러나”라는 말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자손을 보았으며”(민13:28-29)라고 했습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  이런 보고서를 내는 사람은 희망보고서를 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올라갔던 많은 사람들 10명의 사람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나안 땅을 악평하는데,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의 거인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2-33)  이들은 절망보고서를 낸 사람들입니다.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라고 증명한 사람들인데,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라고 통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며,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이제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에게 맞아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정탐꾼 중의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온 회중에서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7-8)고 했습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14:9)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온 회중은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불신앙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7-28)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29-30)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보고서를 낸 사람들처럼 현실만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보고서를 낸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현실은 엄연한 현실이지만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해야 합니다.

지금 이곳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여 주시지 않았다고 하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주셨기에 올 수 있었습니다.   내 삶 속에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나를 인도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셨고,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이끌어주셨기에 오늘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고, 앞으로도 나와 함께 하여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나의 경험으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들어가야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완악하고 강퍅한 바로를 꺾으신 분입니다.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만 바라보고 절망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려고 하시면 말부터 고쳐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시기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14:28)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장래에 대한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과 절망을 말하는 사람의 차이는 그가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비전이라고 하니, 꿈과 이상,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꿈과 이상, 그리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런 것이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차이가 있어도 정말 하늘과 땅의 차이가 생기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당장 편하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노예근성입니다.  노예는 오늘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고, 공동체성도 없고, 자유와 평등, 사랑, 인격 그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만 편하면 그만, 잘 먹고 잘 살자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삶,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나의 편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환경을 바꾸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좀 힘들어도 하나님 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어 드리는 삶이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갈렙이란 분은 보면 여호수아 앞에 나아와 헤브론을 점령하여 유다자손에게 주겠다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자손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14:12)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말하고 노래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할 수 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고, 나를 통하여 이루실 목적을 발견하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