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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소금으로 증인이 되라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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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으로 증인이 되라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등지거나 세상과 동떨어져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음은 세상이 문제가 있음을 전제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의 병들고 오염될 가능성과 더럽고 썩을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인류역사상 세상의 성향은 항상 사악했고 타락한 부패의 온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틴 루터는 “세상은 곧 십계명의 역이며 악마의 가면과 그림이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갈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가운데서 소금이 되어, 소금의 삶을 살아감으로, 세상이 변화되도록 영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은 소금의 가치와 같습니다.

소금의 가치는 여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순결함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 음식의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 치료제의 역할을 합니다.
- 생명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제물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어느 가게 주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가까운 교회의 새로 부임해 온 목사님 칭찬을 하더랍니다. 특히 그분은 설교를 참 잘한다고 하더랍니다. 한 번은 손님이 물었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지난주에는 어떤 설교를 했습니까?” 주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번도 그 목사님 설교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손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목사님이 설교 잘하는 줄 압니까?”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이 그 목사님 오신 후에 외상값을 잘 갚아요.”

예수님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버리어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대에는 대부분의 소금이 바닷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땅속에서 캐낸 소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 가운데는 불순물이 섞여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길에 버리어져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밟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밖에 버리어 밟히는 쓸모없는 소금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소금의 본질인 짠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짠맛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버리어 지고 밟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행동 이전에 변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곧 짠맛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근본이 짠맛이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맛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맛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는데서 생기는 맛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맛을 내지 못하는 것은 죽어있거나 예수님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서 4장18절에서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명력을 상실하면 양심이 죄악에 오염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격이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양심이 살아나고, 인격이 바르게 회복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며, 그 분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을 따라가고, 그 분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분명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아들(예수님)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5: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맛을 내십시오. 그러므로 살아있는 양심으로 맛있는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소금과 같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맛을 낼뿐 아니라 희생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리 짠 소금이라도 그대로 있으면 소금일 뿐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자신이 녹아져 희생해야 합니다. 예수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은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소금은 소금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은 자신 밖의 것을 위해 존재할 때에 그 가치가 최상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 있다."(새 번역/ 마22:35-40)

인간의 가치는 자기 자신을 위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존재하는 데서 그 가치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을 위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희생인 것입니다.

소금은 말없이 자신이 녹아지는 데서 맛을 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맛은 말없이 겸손하게 자기를 희생하는 그곳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2-6)

요즈음 봉사하는 단체도 많고 사회공의를 위해서 일하는 기관도 많은데 사회가 시끄럽고 아픈 것은 자기를 들어내며 과시하고 떠들어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일하는 사람이 많은데 아프고 시끄러운 이유는 소금과 같이 말없이 녹아지는 겸손함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들어내려 하거나, 또는 오만함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2:24-25) 자기만의집착을 죽이고 극복하는 겸손한 희생은,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맛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자바 섬에 한 여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웨덴 사람으로 선교활동 중에 심한 향수병에 걸렸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선교의 큰 성과도 나타나지 못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향수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생하는 그녀의 눈에 성냥갑 하나가 눈에 뛰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스웨덴에서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무심코 성냥갑을 붙들고 중얼거렸습니다.
“오오, 성냥갑아 너는 이렇게 멀리 본국을 떠나 무엇 하러 여기까지 왔니?”

그때 성냥갑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이 느꼈습니다.
“나는 불을 켜기 위해 아득히 멀리서 왔습니다. 그러나 나의 임무가 끝나면 나는 버려지고 말지요”

이 한마디는 그녀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이곳에서 성냥불처럼 복음의 빛을 전하게 하옵소서. 누가 알아주지 않을 지라도 이일을 위해 겸손하게 말없이 희생하게 하옵소서.” 그 후 그녀는 10년 동안 겸손히 자기를 부인하며 기쁨으로 희생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은 선교의 큰 결실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금이 말없이 녹아짐으로 맛을 내듯이 겸손히 말없이 희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은 그 영향력으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같은 맛을 낼 때에 세상이 살아있는 세상이 되도록 하고, 썩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로 부패 없는 사회가 되게 합니다. 맛을 내는 역할로, 사랑, 평화 기쁨을 창조해 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세상이 되도록 치유와 함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도록 하는 제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생산의 80%는 20%의 사람을 통해서 생산되고 우리가 소비하는 80%의 소비는 20%의 사람들이 소비한다는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을 경영학에서는 ‘80대 20법칙’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어느 학자가 근면과 성실의 상징인 개미를 가지고 연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학자가 개미를 자세히 연구해 보니 실제로는 개미 가운데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20%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80%의 대부분의 개미를 열심히 일하는 20%의 개미가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오늘 우리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 중에 20%를 차지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추구하며 주님의 바램처럼 소금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사회와 역사는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20%가 아니라 10%만이라도 정말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말씀을 삶의 원리와 지침으로 여기고 소금과 같이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의 역사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1899년 3월 1일자 미 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님이 발행한 최초교회신문 ‘대한 그리스도인 회보’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 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야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수 없느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빼앗을 지경이면 그것은 쉽게 빼앗기지 아니할 터이니 그 양반의 갈수 없다는 말이 그 까닭인 듯.....”

당시 기독교인은 장로교 감리교 합해서 1만 명 조금 넘는 정도였습니다. 인구가 1천 5백만 정도였으니 전 인구의 0.1%도 안 되는 미미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있는 곳에는 단 한 건도 부정부패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못된 관리들도 기독교인이 있는 곳에서는 부정을 저지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데서 복음이 증거 되는 증인의 역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소금이니.....’라고 단언 하셨습니다. 우리는 소금과 같이 맛을 내는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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