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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행복한 삶을 위하여 (눅 15: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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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을 위하여 (눅 15:22-34)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그저 한 핏줄로 묶여진 공동체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내 배 아파 난 자식이라고 해도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가족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 어느 화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보기로 결심하고 화구를 준비해서 나섰습니다.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까 생각하다가 개선장군이 말을 타고 승리의 입성을 하는 장면을 그려보았고, 또 두 젊은 남녀가 꿈에 부풀어 결혼식을 하는 장면도 그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썩 마음에 들지를 않았습니다. 또 농부들이 밭에서 추수하는 광경을 그렸지만 이것도 마음에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의 집에 돌아왔을 때 가족을 위해서 앞치마를 두르고 정성껏 음식을 장만한 사랑하는 아내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 손을 잡고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때 그 화가는 그 모습을 그렸고 이제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그렸다고 만족했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모습은 바로 우리의 가정에 있습니다. 뿔뿔이 헤어져서 하루의 모든 일들을 마치고 돌아온 가족들이 마음과 마음을 터놓고 하루의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용서와 사랑의 보금자리가 바로 가정입니다. 서로 인내하며 노력하는 가족들의 정성이 행복한 가정의 울타리를 만들고 기쁨의 모닥불을 피웁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인내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마음과 마음을 터놓고 하루의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용서와 사랑의 보금자리를 이루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할 수 있는 대로 어머니의 품에만 있으려고 합니다. 막무가내 어머니의 품으로 안겨듭니다. 거기다가 낯가림은 또 얼마나 심한지요? 흔히 아무개는 참 순둥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누구 여러 사람이 있으면 혼자서도 잘 노는 것 같은 아이가 그러나 엄마하고 단 둘이 있을 때 보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은 어린아이들조차도 선악을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얻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결코 자기를 미워할 수 없는 부모 앞에서는 한껏 투정을 부리며 자기만 위해달라고 하다가도 누구 한 사람이라도 찾아왔다 싶으면 처음에는 낯가림도 하고 막무가내 싫다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지 여전히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고 안아주겠다고 하고 그러면 슬그머니 안겨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어른들 틈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더 관심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품에 안길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고 조금 더 자라게 되면 점점 더 부모의 품에 있기 보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개척 정신을 발휘해서 자기가 관심을 갖는 쪽으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잠시만 눈길이 떨어져도 어느새 저기 가 있고 어느새 뭐 하나를 집어당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모의 품에서 멀리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미운 네 살이 지나면서부터는 친구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실상 이때부터 아이는 부모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친구에게로 그리고 세상으로 넓혀지게 되고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전히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자라가면서 아이는 부모로부터 떠나는 삶을 연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학업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실질적으로 자녀는 더 이상 부모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 때는 이미 독립해서 따로 사는 자녀들도 많아집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모의 품에만 있으려고 하고 부모의 도움만 받으려고 한다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녀들은 정서적으로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문제는 소통입니다. 몸은 떠나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으로는 항상 함께 있는 그런 모습 언제나 곁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서로 간에 대화할 수 있는 좋은 도구들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서로 대화가 어려울 때는 편지나 쪽지를 통해 자기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건 요즘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휴대전화 문자라든가 인터넷을 통해 몇 마디 간단할 문장을 통해 자기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마음은 연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죠.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저 가슴에만 담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때가 되면 자녀는 부모를 떠나야 하고 부모 역시 자녀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더 이상 부모 의존적인 자녀가 아닌, 비록 힘들다고 해도 비록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기는 한다고 해도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가 아닌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삶을 책임질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늦게까지 자녀들을 품에만 안고 있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무능한 자녀로 그저 부모만 바라보고 있는 자녀로 남아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요? 언제까지나 부모가 자녀 곁에서 자녀를 책임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부모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녀의 곁을 영원히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 의존적으로만 살아왔던 자녀들은 아주 혼란을 겪게 되죠. 자기를 지켜주던 방패막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세상과 홀로 마주설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를 않습니다. 부모로부터 약간의 유산이라도 물려받을 수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을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삶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기 독립적인 삶을 살아왔던 자녀들은 어떤 경우에도 당당합니다. 옆에서 조금이라도 도와주면 더 좋겠지만 오히려 도와준다고 하는 것을 더 부담스러워하기도 합니다. 힘들지만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 보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로서는 그런 자녀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떠나보내야 합니다. 

문제는 소통입니다. 아무리 몸은 떠나있다고 해도 언제나 가까이 곁에 있는 것과 같은 마음이 들 수도 있고 항상 함께 살아가면서도 전혀 별개의 세상을 사는 것과 같은 모습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입장에서도 같이 살기를 더 좋아하는 자녀도 있는 반면 따로 살기를 더 좋아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그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고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같이 있어도 좋고 따로 살아도 좋은 것입니다. 오히려 같이 있어서 불편하기도 하고 따로 살아서 더 편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떠나고자 한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니고 같이 있겠다고 해서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어떤 때는 반대로 자녀가 같이 있기를 원해도 부모가 자녀를 떠나보낼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싫다고 따로 살자고 하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자녀가 결혼이라도 한다고 치면 요즘 세상은 같이 살기보다는 따로 살기를 더 좋아하는 그런 세대입니다. 아니 사실은 떠나보내야 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고 하나님도 말씀을 하십니다. 

나중에는 다시 합하더라도 처음에는 부모를 떠나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 가정을 이루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적응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내고 사귀었다고 해도 결혼은 사귐이 아닌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보이기 위한 모습이 아닌 삶 자체가 보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점들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을 둘이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면서 절충점을 찾아가는 그런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때는 아무리 답답해도 부모는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자녀들을 더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과정입니다. 때로는 보따리를 싸려고도 할 것입니다. 그때 헤어지라고 뭐 하러 그러면서까지 살겠냐고 하지 마십시오. 그게 다 성숙해져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모난 마음을 잘 다듬어주어서 서로에게 적응해가도록 도와주고 그래서 행복을 찾아나가도록 돕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그럴수록 더 부모에게 마음으로는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어야 하고 전화를 통해서건 문자를 통해서건 함께 마음을 주고받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작은 아들 그는 개척 정신이 강한 아들입니다. 독립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보려고 하는 그 마음이 없이 어찌 세상을 품에 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부모에게 돈도 좀 있겠다, 그러니 사업 자금 좀 대달라고 합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그럴 힘이 없다면 모를까 집이라도 한 채 있다 싶으면 그걸 저당 잡혀서라도 사업 자금 좀 대달라고 하는 자녀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자녀들은 다 나쁜 놈들이냐 하면 아니잖아요. 

그리고 부모 역시 어떻게든 자녀들이 일어설 수 있게 옆에서 돕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지를 않습니까? 좀 멀리 떠나 있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살다보면 사람을 잘못 만나기도 하고 그 사업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근데 우리는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는 관심도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만 바라봅니다. 로또도 마찬가지이고요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전도 못 찾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아니 본전까지 다 잃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사업 역시도 열이 시작했다 하면 성공하는 사람보다는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사람 로또 당첨자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당첨자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기에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업 역시도 아무리 충분히 준비를 하고 철저하게 갖추어서 시작을 했다고 해도 성공하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한데 사실은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자기 개발을 계속해야 하는데 너무 쉽게 포기를 합니다. 물론 더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완전히 바닥을 보인다면 달리 어쩔 도리가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중물을 생각한다면 옆에서 마중물이 효과를 발휘하도록 새나가는 구멍을 막아줄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둘째 아들에게는 그런 사람이 옆에 없었습니다.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게 만들어준 친구들을 있었는지 몰라도 그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던 이웃들은 없었다는 것이 그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웃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이웃을 그렇다면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진정한 친구로 삼아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주실 뿐 아니라 심지어도 그 목숨까지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떠나는 것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사업을 하다가 다 들어먹은 것 역시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렇게 된 과정입니다. 허랑방탕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업에 전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을 잘못 만났을 수도 있고 사업하는 방법이 잘못됐을 수도 있고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그런 것에 도전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재산을 낭비한 꼴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결코 포기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가 어려운 때에 그냥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취직을 한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비록 돼지를 칠지언정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업을 한다고 뛰어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형편이 너무도 어렵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들보다 더 마음이 아프고 힘든 사람이 있다면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주 밑바닥 인생까지 추락한 그 아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십니까? 그런데도 이 아버지는 기다릴 뿐입니다. 누구 사람을 보내서 도와주겠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혼자 힘으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그 아들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그래 그렇게 해서 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아들이 힘내” 하며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십니까? 아버지는 자기의 삶이 비록 망가지더라도 자녀를 세워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에게 끝까지 손을 내밀지 않고 자기 스스로 살아보겠노라고 몸부림치는 이 아들이 사실은 진짜 효자입니다. 단지 그 방법이 잘못됐고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허랑방탕했다고 하는 것이요 그래서 재산을 다 낭비하고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고 하는 안타까움은 있어도 이 아들로서는 결코 반복하지 않을 좋은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동구 밖까지 나와 기다리면서 아들을 새롭게 격려해줄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처음부터 아들을 안 떠나보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결코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자기 꿈을 포기한 패배자로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꿈을 포기한 아쉬움만 안고 한숨만 쉬면서 살아간다면 그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사업 자금을 들려 보내면서 아버지는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숨깁니다. 마치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면서 아쉬움을 감추고 저를 축복해주는 이삭처럼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을 축복했을 것입니다. 허랑방탕할 때 사람을 보내서 그러면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 그 때를 기다립니다. 비록 밑바닥까지 추락했어도 자기 스스로 마음을 열고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아주 망가지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고요? 아주 망가지면 다시 새롭게 빚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실 떠나겠다는 아들 떠나보내기가 쉬운 일인지 아십니까? 

저에게도 두 자녀가 있지만 지금은 이들이 다 제 곁을 떠나 있습니다. 결혼을 하니 따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합칠 수도 있겠지만 마음으로는 그러고도 싶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경제적으로도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없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그런지는 몰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해도 그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제는 아버지 어머니 인생을 위해서 쓰시라고도 합니다. 그 마음이 참으로 예쁩니다. 그러면서도 녀석들 그렇게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나 싶기도 합니다. 

무엇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그들이 언제나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래요 부모의 나이가 되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그 마음을 알겠습니까? 하지만 떠나보내는 것이 부모로서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는 더 그렇습니다.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 신앙을 갖추기를 원해서 다른 교회로 가겠다고 했을 때 보통의 부모도 그럴진대 어찌 목회자로서 그것을 허락하기가 쉬웠겠습니까? 성도들 역시 이런 저런 이유로 떠나갈 때 가슴을 저미는 것과 같은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내 자식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더군다나 항상 제가 가르치기를 데려오는 결혼은 되도 떠나가는 결혼은 안 된다고 했었는데요. 그리고 주일 부모와 함께 예배하며 그 시간을 통해 부모를 찾아뵙는 효도도 하고 그 자리도 채워가도록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고 놀랍도록 역사할 것이라고 가르쳐왔는데 다른 자녀들도 아닌 바로 그런 목회자의 자녀들이, 아니라고 자기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해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교회를 찾아보고 안 된다고 할까봐 미리 교회를 다 정해놓고 와서야 “저 이 교회 등록했어요” 할 때 그 무너지는 마음을 아십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그리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섭섭한지요? 그래 그렇게 해서 너희들 신앙이 더 성장할 수 있다면 더 좋은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휑하니 구멍이 뚫려 있어요. 그러다가 섭섭한 마음이 밀려올 때는 다시는 그 얼굴 보고 싶지도 않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게 부모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건 본문의 아버지 역시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달려가서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펄펄 뛰는데 거기에 반발하고 뛰쳐나갈 자녀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참으로 지혜로웠습니다. 그러게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기다립니다. 마냥 기다립니다. 마음으로부터 깨닫고 돌아서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다 망가진 아들이 다시 돌아올 때 그래 그 모습이 저 동구 밖에 보일 때 아버지는 그 모습만으로도 감격합니다. 고마워합니다. 그래 체면불구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뛰어갑니다. 

왜 그런 마음으로 처음부터 아들을 훈계하지 않았냐고요? 그래서는 아들이 홀로 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진정한 승리자로 우뚝 설 수가 없습니다. 좌절을 아는 사람만이 진짜 승리의 기쁨도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얼싸 안습니다. 그리고는 새 옷을 입히게 하고 손에 가락지도 끼워주고 새 신을 신기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제부터 진짜 새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진짜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진짜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형의 말처럼이나 다 말아먹은 아들이 아닙니까? 

아니요. 재산은 다 말아먹었는지 몰라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진짜 좋은 경험을 그것도 아주 비싼 경험을 이 아들은 했습니다. 그 뒷이야기를 우리가 알지만 그럼 떠나지 않고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큰 아들은 어때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는 큰 아들도 작은 아들 못지않습니다. 말만 부모를 안 떠났을 뿐 그는 오히려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보다 더 못한 아들입니다. 그 애타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항상 마음에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고 했지만 결코 자기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양이라도 잡아 잔치하고 싶은 마음을 아버지에게 아뢰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만 부글부글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아버지가 몰랐을까요? 아버지가 먼저 그런 제안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데 역시 큰 아들을 향해서도 사실을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비록 속이 상해서 하는 말이기는 해도 그 마음을 열어 보일 때 그래 불평을 터뜨릴 때 아버지는 그런 큰 아들도 다독거려 줍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잖아. 한데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가 그런 큰 아들을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다독여줍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아버지는 작은 아들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두 아들이 다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아들이 될 때 그 아들들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억지로 알게 하기보다는 스스로 깨닫도록 기다렸습니다. 

그게 지혜입니다. 아마 아버지가 이런 깨달음을 그냥 아들들에게 전해주었다면 아들들은 그 지혜를 버렸을 것입니다.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픔들을 겪고 실패도 겪고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비로소 아들들은 깨닫습니다. 그건 큰 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 사실은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구나” 아버지의 다독여주는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습니다. “그래 나는 내 마음만 알아주기를 원했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었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비단 부모와 자녀만의 이야기겠습니까?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자세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야말로 우리들의 가정에 꼭 필요한 마음입니다. 그건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입장만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가 내 입장부터 생각해 달라고 합니다. 내 입장만 이야기를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입바른 말을 하지만 정말 그 마음을 안다면 어떻게 다시 돌아가 내 입장을 또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밖에서는 참을성이 많아도 집안에서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밖에서는 다 밖입니다. 너도나도 남들 앞에 보이고 싶은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면을 씁니다. 한껏 옷도 갖춰 입기도 하고 화장을 하기도 하고 하나같이 그려낸 모습입니다. 벌거벗은 모습이 아닙니다. 잘 보이려고 하고 잘 보여야 하니까 그러니까 밖에서는 서로에게 잘 합니다. 없어도 있는 체 해야 할 때가 있고 싫어도 좋은 체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가면입니다. 

하지만 집에 들어오면 그 가면들을 다 벗어놓습니다. 그러니 서로 부딪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옷도 훌훌 벗어던지잖아요. 심지어는 속옷 차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화장도 다 지우잖아요.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롭니다. 그건 성격적으로도 더 이상 가면이 아닌 자기 모습 그대로 자기 하고픈 대로 말하고픈 대로 그냥 편하게 편하게. 근데 그것이 아내에게는 눈에 거슬립니다. 남편도 마찬가지고 부모도 마찬가지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밖에서 보는 모습과는 너무 다르단 말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도 밖에서는 다 멋지잖아요. 그래 당신도 누구처럼 누구처럼 누구처럼 그렇게 좀 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나는 그렇게 합니까? 그리고 나는 그 누구가 아닙니다. 꿈을 깨세요. 내가 말하는 누구처럼도 그 누구 본 모습이 아닌 밖에서 보이는 가면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나를 그런 너를 우리가 인정해주는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작은 아들이 자기의 어려움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아들은 그 어떤 사랑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소통은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받아 달라 내 마음을 알아 달라가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주고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세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데 사실은 여기 이렇게 기다리고 계신 분이 누구시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갖 불평불만만 터뜨렸지 그리고 온갖 것을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만 했지 그런 우리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시며 동구 밖까지 나와 기다리고 계신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왜 이대로 내버려 두셨냐고요? 그러면 처음부터 그건 안 된다고 했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요? 

그러면 그는 집안에 남아 있는 아들처럼 사실은 속으로 더 곪아있는 아들이 되고 마는데요? 그리고 언제까지 야단만 치고 있어요? 스스로 설 수 있게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길은 결국 광야를 통과하도록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방임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눈과 마음은 항상 자식에게 가 있습니다.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회를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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