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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 스데반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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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스데반 (행 7:54-60)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 예수의 이름 

베드로는 긴 오순절 설교를 이런 말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2:36). 이 말씀의 청중은 ‘이스라엘 동포’ 혹은 ‘이스라엘 온 집’으로 지칭되는 사람들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 지중해 일대에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을 찾아온 사람들을 다 내포하는 말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를 따르던 이들도 있을 것이고,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온 집이 예수를 무법자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2)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다. 이 설교는 매우 위험하고 선동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의 뒤안길로 쓸쓸하게 퇴장한 한 인물의 이름이 또다시 호명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마음이 찔려서 그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가 무려 삼천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예수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나누어 먹고, 또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더 많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인류였고, 경쟁과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 등장한 ‘낯선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이들의 중심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그리고 예수야말로 사람들을 악에서 돌이키게 하고 또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보내신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믿고 돌이킨 이들에게 ‘예수의 이름’은 구원이었고 기쁨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못내 불편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죽이는데 가담했던 이들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사도들을 소환해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4:7)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기회를 만났다는 듯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당혹스러웠고 또 불쾌했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병이 나은 증인이 있는지라, 그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 지시를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4:19) 

제도나 조직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몸 구실을 할 때도 있지만, 그 뜻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때도 많습니다. 사도들은 조직의 종이 되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로 작정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 안에 있는 이의 자유와 당당함을 봅니다. 

• 스데반

오늘은 ‘그 이름’에 붙들린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놀라운 인물인 스데반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가 선출한 일곱 명의 집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6:8). 그는 치유의 은사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말씀의 은사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논쟁을 통해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이끌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논쟁은 불필요한 갈등만 야기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논쟁 뒤에는 한 사람의 독특한 성격이 숨어 있습니다. 토론은 사상과 의견의 교환이 아니라 두 성격 사이의 싸움이며 두 감정의 대립일 때가 많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논증으로 누군가를 굴복시켰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필시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을 터이니 말입니다.

스데반은 리버디노 회당(Libertinus; Synagogue of Freedmen)에 속한 이들과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리버디노는 ‘노예였다가 해방된 이들’을 가리키는 라틴어 단어입니다. 그들은 주전 63년에 벌어진 유대전쟁 때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다가 자유민이 된 이들의 후손들일 겁니다. 그들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승복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이고 진리인가는 이제 뒷전입니다. 패배에 대한 부끄러움과 원한감정만 남습니다. 말로 안 되니 이제 편법을 동원합니다. 그들은 군중들의 맹목적인 증오심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라며 군중들을 선동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함할 때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부추김을 받은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를 붙잡아서 공의회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쉴 새 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을 합니다”(6:13). 흥분으로 상기된 그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스데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의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 어떤 얼굴이 천사와 같은 얼굴인가요? 그의 얼굴에 하늘빛 고요가 떠올랐던 것일까요? 두려움에 짓눌리지도 않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 겁니다.

• 불을 머금은 말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묻습니다. “이것이 사실이요?” 그러자 스데반이 말을 시작합니다. 그는 담담하게 하나님의 구원사의 흐름을 서술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야기로부터, 모세를 통해 수행하신 출애굽 사건,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이르기까지. 공의회원들은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어조가 갑자기 변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6:51-53)

‘부형’이라던 다정하게 부르던 호칭을 버리고 스데반은 그들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이 말만으로도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의 불길을 당겼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더욱 신랄해집니다.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말은 비수와 같이 예리합니다.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의 불길에 사로잡힌 그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거룩한 의상과 교양 그리고 전문 지식 너머에 숨겨져 있던 그들의 적나라한 실상이 속절없이 드러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은 격분했습니다. 감추고 싶은, 그래서 스스로도 직면하려 하지 않는 자기 ‘그림자’를 누군가가 폭로할 때 우리는 죽일 듯이 달려듭니다. 자신을 돌아볼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지도 못한 채 허를 찔리면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되곤 합니다. 공의회원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 속에 있던 스데반은 분노로 이를 가는 이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7:56) 물론 이 때 ‘본다’는 말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고 있다는 말은 공의회원들에게 신성모독적인 말로 들렸기에 그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질러 참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못난 인간들의 버릇입니다. 13세기의 성인인 막데부르그의 메히틸트(Mechtild of Magdeburg)는 “나의 영적 각성의 날은 내가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보고,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을 본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를 보든지 하나님 안에서 본다면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면 세상은 신비로 가득 찬 곳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일찍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이를 고쳐 주신 후에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9:41)

참 소리에 귀를 막은 그들은 폭도로 변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리고 돌로 칩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릴 사법권이 없었지만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잃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으면서도 주님께 기도를 바칩니다.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죽음을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에 빗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새 하늘 새 땅에서 깨어날 테니 말입니다.

• 흩어진 교회

그런데 스데반의 이런 죽음은 너무 허망해 보입니다. 꼭 이렇게 죽어야 했나 싶습니다. 어느 나이 든 개그맨은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고 했습니다. 신앙적 양심을 따른 대가가 죽음이라니 너무 가혹합니다. 게다가 스데반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커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박해 받은 이들은 대개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니 말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이제 또 다시 금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망각의 강에 묻힐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쫓겨난 신자들이 이르는 곳마다 예수의 이름은 오히려 들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에서 그리고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1:8) 하신 말씀은 이렇게 성취되었습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지켜야 했던 그 이름 예수는 그들에게 생명이었고 길이었고 진리였습니다. 이보다 순수한 신앙이 또 있을까요? 그 이름이 그들에게 준 것은 무엇입니까?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고난의 가시밭길입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그들에게 권세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사람들은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날 사울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영혼의 당당함, 의연함이 아니었을까요?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회심을 경험했지만, 사실 사울의 회심은 스데반이 순교하던 그 자리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이 아닌 가시밭길을 택하는 사람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의인의 피는 허비되는 법이 없습니다. 무고한 이들의 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창4:10)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은 무고한 이들의 피가 외치는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하듯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피가 땅에 떨어지면, 땅이 더러워진다. 피가 떨어진 땅은 피를 흘리게 한 그 살해자의 피가 아니고서는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나 주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머물고 있다.”(민35:33-34)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예수 정신’은 더 옹골차게 지켜졌습니다. 이것이 무고하게 흘려진 피가 하는 일입니다. 30년 전 5월 빛고을에서 국가 폭력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결국 그들이 흘린 피는 이 땅에 민주주의의 나무를 자라게 한 자양분이 된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Στέφανος)은 헬라어로 ‘면류관’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얼 얻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은 의의 면류관입니다. 그 소망으로 오늘 자유인의 새 삶을 시작하십시오. 주님과 함께라면 태산도 넘을 수 있고, 가시밭 위를 맨발로 걸을 수 있고, 대양도 능히 건널 수 있습니다. 이런 확신으로 어두운 세상에 불을 밝히는 새벽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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