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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예배 제단을 수축하자 (왕상 18: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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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제단을 수축하자 (왕상 18:30-40)
  

오늘 설교의 주제는 가정예배입니다.
‘가정예배회복이 기도응답의 비결이다.’라는 사실을 선포하려고 합니다.
그 진리를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정착해 살아가면서 서서히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이 풍요의 신, 생산의 신이라고 믿는 바알신을 섬겼습니다. 
특별히 북이스라엘 왕국의 아합왕과 그 부인 이세벨이 통치할 때에는 바알숭배의 극치를 이뤘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를 짓는 가나안 땅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가뭄 때문에 물 한 방울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왕조차도 ‘어디 물 근원이 없을까’ 찾아나서야 할 정도로 극심한 가뭄이었습니다. 
가뭄이 그렇게 심하니 도처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합왕은 이렇게 가뭄이 들게 된 것은 엘리야란 하나님의 선지지가 바알신을 공격하므로 비를 주관하는 바알신이 진노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렇게 가뭄이 들게 된 것은 아합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바알 신을 섬김으로 하나님이 진노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맞아요? 
아합왕이 맞습니까? 아니면 엘리야가 맞습니까? 
그래서 누가 참 신인지, 누가 살아계신 신인지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갈멜산 위에 두 개의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송아지를 각을 떠 제물로 삼고 각자 자기 신에게 불로 응답해주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의 제단에 불이 임하면 바알신이 참 신이고,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임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입니다. 
갈멜산상의 1:850의 대결! 
생사가 판가름 나는 대결, 입술이 마르고 손에 땀이 나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한 사람과 바알과 이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을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그러나 아무 응답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알선지자들은 제단 주위를 절뚝발이 춤을 추면서,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몸에 상처를 내 서로를 흥분시키면서 극렬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저녁때까지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었습니다. 
그렇지요! 
원래 없는데 어디에서 누가 응답하겠습니까? 

이제 엘리야가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고 기도를 올립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36-37절)
기도를 마치자 여호와의 불이 임하여 제단의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았습니다. 
하나님이 참 신임을 멋지게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똑똑하게 증거 했습니다. 

1. 엘리야는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먼저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수축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하여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불을 체험하기 위하여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무너진 제단을 수축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엘리야의 제단은 ‘회개의 제단’이었습니다.

31절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엘리야는 돌 열둘을 가져다가 제단을 수축했습니다. 
엘리야가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제단을 수축할 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백성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열두 돌! 
먼저, 이 열두 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상기시켰을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는 이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징표로 열두 돌을 세웁니다.
출 24: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야가 열두 돌을 헤아려 제단을 쌓는 것을 볼 때,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약속했는데…”, “우리가 한 목소리로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약속하고, 그 약속의 징표로 지파수대로 열두 돌을 세웠는데…” 
가만히 열두 돌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머물러서는 안 될 자리에 서 있습니다. 

손가락 걸고 약속한 하나님을 저버리고 알지도 못했던 외간 남자인 바알신과 짝하여 정신없이 놀아나고 있거든요! 
“이래서는 안 되는데…”,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첫 사랑, 첫 믿음 회복해야 하는데…” 라는 회개의 역사가 심령, 심령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열두 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상기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줄기가 끊어져 마른 땅위로 걸어가듯이 요단강을 건넌 후 그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을 기리기 위하여 지파수대로 열두 돌을 세웠습니다. 
수4:24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우리가 아무리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잊지 말자!’ 
‘우리가 아무리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산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잊지 말자!’ 
이렇게 다짐한 표로 열두 돌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그 능하신 여호와의 손을 뿌리치고, 바알의 손을 붙들고 살아갈 궁리를 하고 있거든요. 
그 능하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외하리라던 첫 신앙은 온데간데없고, 그 하나님을 면전에서 무시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후회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엘리야의 제단은 백성들의 죄를 자각케 하는 회개의 제단이었습니다. 

진정한 교회의 부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회심 신자’가 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직면케 만드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재미’(fun)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심’(conversion)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2) 엘리야의 제단은 ‘속죄의 제단’이었습니다.

33절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우리의 죄는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고서야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죄는 그 정도로 무겁다는 것이지요! 
히 9:22절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먼 옛날 구약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양이나 송아지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그 생명을 대가로 우리가 용서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 ‘송아지의 각을 떼서 나무 위에 놓았다’는 것은 생명을 대가로 용서받는 ‘속죄의식’을 뜻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쉬운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요 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제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네요. 주님이 이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피 흘려주심을 믿고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 주님만 의지하오니 저를 받아주세요” 하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어려운 구원이 아닙니다. 
어려운 고행도 필요 없습니다. 
어려운 금욕생활도 필요 없습니다. 
어려운 참선도 필요 없습니다. 
어려운 백일, 천일기도도 필요 없습니다. 
자기 재물을 다 팔아 선행하는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고, 감격해하고, 감사해야 할 일은, 우리의 구원은 값진 대가가 지불된 ‘비싼 구원’이란 사실입니다.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어떤 피라고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보배로운 피라는 값진 대가를 지불하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 연세대의 정신적인 지주인 용재 백낙준 박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는 무당이었습니다. 
어떤 예수 믿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당신 무당 짓하다가 나중에 지옥가면 어떻게 하겠소? 자식들 멸망 받을 짓 그만하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러자 화가 난 백무당이 “아니 재수 없게 무슨 소리야. 너나 잘 믿고 천당인지 만당인지 가라.” 
그런데 역사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이 백무당이 잠만 자려고 하면 그 예수쟁이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거든요. 
‘자식들 멸망 받을 짓 그만하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이 소리에 못 견뎌서 나중에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백낙준 박사 같은 사람이 나온 것입니다.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의 용서를 받아야합니다.

3) 엘리야의 제단은 ‘기도의 제단’이었습니다.

36절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가 기도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①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능력이 크신 하나님! 지혜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 사랑이 끝이 없으신 하나님! 
나에게 보여준 대로 저들에게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②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 아닙니까? 그런 내가 굴복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 내가 창피를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창피당하면 하나님의 체면이 뭐가 됩니까? 우습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생각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셔야 됩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내가 누군지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제단은 기도의 제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기도응답을 받으려면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라는 것입니다.
무너진 새벽기도 제단을 수축하라는 것입니다.
무너진 가정예배 제단을 수축하라는 것입니다.

2. 가정예배의 예

엘리야 제단의 여러 특성이 잘 녹아있는 것이 가정예배입니다.
기도응답을 받기 위하여 가정예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우리교회의 정애숙 집사님의 가정예배를 잠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그의 간증문 중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가정예배! 흉내만 내어도 축복이 됩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담임 목사님은 매 주일 설교 말씀이 끝나면 그 날의 말씀 중에서 우리가 꼭 마음에 새겨야 할 핵심말씀을 인사말로 주시면서 옆자리에 앉아 있는 교우들과 그 말씀을 나누게 하십니다. 작년(2009년) 5월 어느 주일에는 가정예배에 관한 설교 말씀이 끝난 후 “가정예배! 흉내만 내어도 축복이 됩니다.”라는 인사말을 주셨는데 그 말씀이 제게는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는 가족의 생일이나 기념일 등 행사가 있는 날에 모여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정도였던 우리는 그 날 이후로 주 1회 가정예배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믿음생활을 시작한 남편과 저는 어떻게 가정예배를 인도해야 할 지 몰랐지만 “가정예배! 흉내만 내어도 축복이 됩니다.” 라는 목사님 말씀에 용기를 내어 무작정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찬송가를 부르고, 잠언 말씀을 교독하면서 각자에게 은혜가 되는 요절을 나누고, 한 사람이 기도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치는 정말 흉내만 내는 정도였습니다. 이 흉내만 내는 것 같은 예배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고쳐주시어 가족끼리 더 이해하게 하시고, 화목하게 하시어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몇 달간은 꼬박꼬박 주 1회 가정예배가 잘 지켜졌지만, 요일을 정하지 않고 특별한 일이 없는 날 주 1회 가정예배를 드리다보니 날이 갈수록 가정예배를 드리지 못할 이유가 많아졌습니다. 

2009년 12월에 교회에서 ‘하늘양식’이라는 가정 예배서를 두 권 구입하여, 한 권은 우리가, 한 권은 큰아들 가정에 주면서, 새해(2010년)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정예배를 드리자고 권면하였고, 그 후로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매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부담스럽고, 스스로 얽매이는 것 같아서, 깜빡 잊어버린 것처럼 슬쩍 지나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연약한 육신을 입고 세상 속에서 바쁘게 살다보니 하루도 빠짐없이 가정예배를 드리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지요. 

어떤 날은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예배도 드리기 전에 ‘간단히 끝내요~’하며 예배를 시작했는데 예배를 마치고 나면 어디서 힘이 솟는지 몸과 마음이 가뿐해져서 미루어 두었던 집안일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건성건성 정말 흉내만 내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우리 가족은 하나님께서 가정예배를 얼마나 기쁘게 여기시는가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얼마나 축복해주시기를 원하시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작은 부흥회처럼 가족들이 성령의 뜨거운 감동으로 한 사람씩 양심의 가책이 되는 죄의 고백을 하므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고,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시며, 또한 같이 살고 있지 않는 친척들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가족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십니다. 한번은 남편과 사소한 일로 다투었는데, 제가 먼저 가정예배를 드리자고 말하면 왠지 지는 것 같아 싫고, 그냥 잠자리에 들려니 마음이 편치 않아 어정쩡하게 왔다 갔다 하니까 남편이 퉁명스럽게 ‘예배 안 드려?’하였습니다. 

저는 못이기는 척 예배의 자리에 앉았고, 마음이 불편했지만 찬양을 하고, 말씀을 읽고 나누는 가운데 속상했던 마음이 풀리며, 기도하는 가운데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하므로 화해의 눈물로 예배를 마친 일도 있습니다. 천국이 따로 없지요, 바로 이 가정이 천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정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주시는 시간임을 깨닫고 부터는 “가정예배 드리자 ~”하지 않고 “축복받자 ~”합니다.

30여년 한 직장에서 일하고 퇴직한 남편에게 생각지도 않던 새로운 사업장을 열어주시고, 뇌출혈로 쓰러지셨던 연로하신 친정어머니를 기적적으로 쾌유시켜주시고, 작은 아들의 일터를 허락하셨습니다. 매일매일 가정예배를 통하여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려 그날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대듯이 기도하다보니까, 일마다 때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하나님께 여쭙는 습관이 배어 늘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가정예배! 흉내만 내어도 축복이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이 달에 가정예배를 시작해봅시다. 
이 설교를 계기로 가정예배를 시작해봅시다.
가정의달에 무너진 가정예배제단을 수축합시다.
어머니가 드렸던 가정예배, 첫 신앙의 감격 속에 드렸던 가정예배를 수축합시다.
그러면 엘리야의 기도처럼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 직통되는 축복을 누리게 돌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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