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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참으로 한 가족입니까? (출 4: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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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한 가족입니까? (출 4:24-26) 


1. 정말 하나입니까?

오는 21일은 부부의 날로서,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를 가진 법정 기념일입니다. 1995년, 창원에서 사역하시던 ‘권재도 목사님’은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일구려는 목적으로 ‘부부의 날 제정 운동’을 벌였습니다. 가정의 핵심은 부부이고, 그 부부가 화목해야 청소년 문제, 고령화 문제 등 각종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운동이었습니다. 2003년 12월 18일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가 “부부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을 위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것을 국회 본 회의에서 결의하여 2007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부의 날이 생겼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두 사람이 하나라고 여겨지십니까? 매사에 그렇게 느끼시는가요? 어느 순간 문득 여러분의 배우자가 너무 낯설게 여겨지지는 않습니까? 

『우리 부부 정말 괜찮은걸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KBS-TV <아침마당>의 고정 패널로 나오는 精神科 專門醫 김병후 박사가 정리한 ‘부부 클리닉’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묻는 12 가지 질문 가운데 10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결혼생활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지 않다(결혼생활이 별로 행복하지 않다). 2. 배우자와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훨씬 편하다. 3. (상대에게) 말하거나 간섭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4. (상대로부터) 이해받거나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없다. 5. 나의 성격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이 괴롭다. 

6. 자기식대로만 끌고 가는 것을 참기 어렵다. 7. 우리 부모에게 하는 행동을 마음속으로는 용납할 수 없다. 8. 배우자는 자기 문제를 모르거나, 안다 해도 고치지 않거나 결국은 고칠 수 없을 것이다. 9. 나처럼 억울한 대접을 받고 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10. 아이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참고 산다.” 이 가운데서 여러분이 동의하는 개수가 3~4개이면 이혼 가능성이 있는 상태이고, 5개 이상이면 이혼 위험에 직면한 상태라고 하니까 잘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 자신을 잘 살피라는 뜻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 하나 되지 못한 부부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구이며, 그들이 가진 문제는 무엇이고, 또 그들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살펴보면서, 건강한 부부, 행복한 가정으로 거듭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부부가 하나, 가족이 하나!

1) 따로 또 같이

➀ 모세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 아이는 태어나는 대로 다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 집행 되는 가운데, 이스라엘 아이로 태어난 모세는 그 부모에 의해 세 달간 길러지다가, 더 이상 몰래 키울 수가 없어 나일 강에 버려집니다. 그때 마침 나일 강에서 목욕을 하던 애굽의 핫셉수트 공주에게 발견되어 애굽 왕실의 왕자로 입양되어서 거기서 성장했습니다. 모세를 입양하여 애굽 왕자로 키운 핫셉수트 공주는 사실 역사적으로 대단한 인물입니다. 

역사가들은 그녀를 “男裝한 女王 파라오 핫셉수트(Hatshepsut 1504-1484 BC)”라고 부르는데요. 그녀는 이집트 제 18 왕조의 3대 파라오 투트모세 Ⅰ 세의 딸로서, 本 王妃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본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버지가 後宮을 취하여 왕자를 얻었고, 아버지는 핫셉수트를 그 후궁에게서 태어난 아들, 즉 이복동생과 결혼을 시킵니다. 이복동생 투트모세 Ⅱ 세와 결혼한 핫셉수트는 자녀를 낳지 못했고, 그 남편이 病死하자, 남편의 후궁이 낳은 어린 왕자를 자신의 양자로 입양하여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고서는 나라의 실제적인 권력을 자신이 쥐고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그러던 중에 모세를 얻어 투트모세 Ⅲ의 뒤를 이을 생각까지 했습니다. 차기 왕에 거론될 정도로 핫셉수트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모세는 애굽의 최고 학문과 기술, 군사, 건축 등의 교육을 받으면서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떨쳐버릴 수 없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애굽인이 아닌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젖먹이 때부터 자신을 길러준 친 어머니 요게벳을 통하여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과 히브리인의 역사와 율법과 신앙을 익혀온 그로서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러던 중, 그가 40세가 된 어느 날, 애굽 사람 감독관이 한 이스라엘 남자를 학대하여 때리는 것을 목격했고, 그 순간 충동적으로 그 애굽인을 때려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그 순간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낳았습니다. 우선 모세에게 잔뜩 기대를 걸고 있던 핫셉수트의 분노가 컸습니다. ‘호랑이를 기른 줄 알았더니 고양이 새끼 같은 놈이 구만!’하면서 모세를 내치고 말았습니다. 또 모세의 이 충동적인 행동에 박수치면서 환호하는 경쟁자들과 그 뒤에 있는 정적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모세는 이제 끝났어!’라면서 자신들의 승리를 장담했고, 강력한 경쟁자인 모세를 견제하고 있던 투트모세 Ⅲ세는 모세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출2:15). 그리고 자신들을 위하여 잔인한 감독관을 죽였음에도 고마워하기보다는 더 견제하기만 하던 히브리인들은 ‘우리는 반쪽짜리 히브리인을 원하지 않는다’ 하면서 모세를 거부했고, 도리어 미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이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모세는 더 이상 애굽에 머물 수가 없어 “개인적인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말이 “출애굽”이지 사실은 “도망”이었습니다. 

그렇게 애굽을 빠져나온 모세가 어디까지 갔는지 아십니까? 미디안 광야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애굽에서 미디안 광야까지는 약 240km 정도 되는데, 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무리들이 3개월 만에 거기에 도착했으니, 모세는 아마 1개월 정도 만에 거기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애굽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도망을 한다고 한 것이 그 멀리까지 간 것입니다. 그렇게 도피한 그곳에서 그 땅의 제사장인 ‘르우엘 혹은 이드로’라고 불리는 사람의 일곱 딸 가운데 하나인 ‘십보라’를 아내로 얻어 가정을 꾸렸고, 그때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목동이 되어서 양을 쳤습니다. 그러던 중 아들을 낳아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의 “게르솜”이라 부르는 등, 이방 생활에 잘 적응하여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 서편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양떼를 돌보고 있던 중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활활 타고 있으나 나무는 전혀 타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가, 그 불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 “지금 선 곳이 거룩한 땅이라” 하시면서 모세의 ‘신발을 벗으라’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들로부터 당하는 고통과 슬픔과 부르짖음을 아시고 이제 그들의 애굽 생활을 청산할 때가 되었다는 것,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낼 것이라 하시면서, 그 일을 지휘하고 인도할 사람으로서 바로 모세를 택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등장하셔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 일도 놀라웠지만, 모세에게 주신 말씀은 더더욱 놀랍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비록 40년이 세월이 흐르긴 했어도, 모세로서는 애굽과 애굽에서 있었던 일들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라!’ 자신을 죽이려던 ‘바로와 그 신하들 앞에 서서 그들과 맞서 싸우라!’ 그리고 자신을 외면하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서라!’ 이러한 말씀은 한편 두렵고, 또 혼란스럽고, 그래서 정리가 잘 안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애굽의 위력과, 변죽이 죽 끓듯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늙고 약해진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핑계한 것이 있었는데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➊ 첫째는 “이스라엘 자손이 저에게 누가 당신을 우리에게 보내었고 누구의 명으로 이러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였습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 여호와가 보내었다고 해라.”라고 하셨습니다. 

➋ 두 번째 모세는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들이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되고 그것을 다시 집으면 지팡이가 되는 기적과, 모세가 자기 손을 품에 넣었다 빼면 문둥병 걸린 손이 되고, 다시 넣었다 빼면 정상이 되는 이적을 보이시면서 ‘이렇게 하면 그들이 믿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➌ 세 번째 모세는 ‘그래도 못하겠다’면서 물러서면서 자신은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해서 도저히 못하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형 아론을 언급하시면서 그 아론이 바로 앞에서와 이스라엘 앞에서 그리고 출애굽 여정에서 모세의 대변자 노릇을 할 것이라 하시면서, ‘그러니 제발 믿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핑계를 댈 수도, 피할 수도 없게 된 모세는 잊고 싶었던 애굽으로, 바로 앞에 서기 위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➁ 십보라

➊ 시내 산에서 집으로 돌아간 모세는 장인과 처가 식구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면서 그들을 설득해야 했으나,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양떼를 돌보는 일 외는 달리 한 것이 없는 모세가 뜻밖의 사명을 받아 그 사명을 위하여 집을 떠나야 하는데, 그들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마 모세는 시내 산에서 집까지 오면서 십보라와 장인과 처남들을 무슨 말로 어떻게 설득할 지를 고민하고 걱정했을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자신도 애굽과 이스라엘을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애굽이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십보라와 그 가족들이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는 이교도인데, 여호와 하나님과 그 말씀의 권위 앞에 전적으로 복종하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에 대해 말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막에서 양치면서 더위 먹었냐?’ ‘나이는 못 속인다.’ 그래도 ‘가야 한다’고 우기면, ‘당신이 애굽 사람을 죽인 일로 인해서 지금이라도 갔다가는 즉시로 붙잡혀 햇빛도 안 드는 지하 감옥에 갇혀 고문으로 처절하게 죽게 될 것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볼 때 모세는 자신들과 함께 살면서 미디안 목동으로 사는 것이 더 나아 보였습니다. 왜요? 아무리 태생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몸에 더 깊게 배인 것은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그러나 애굽인 감독관을 죽인 일로 애굽으로부터만 아니라 이스라엘로부터도 버림을 받았고,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제 3국인 미디안에서 미디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시 애굽으로 가겠다고 하면 ‘잘 생각했다’면서 쉽게 보내주겠습니까?

➋ 그리고 모세의 부인 십보라의 반응은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 히브리인의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사 애굽의 종살이 중인 동포들을 구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라고 하셨소. 나는 이제 애굽으로 떠나야 하오. 이 일에 당신이 나와 동행해 주었으면 좋겠소!’ 이러한 모세의 청을 들은 십보라가 생각해보니,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민족이지 자신의 민족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도망쳐 나온 살인자인 남편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가족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 그것은 가족 모두를 死地로 끌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거기다가 자신은 둘째 아들 엘리에셀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假定입니다만, 이 엘리에셀 문제로 부부가 심하게 다투었을 것입니다. 첫 아들 게르솜을 낳았을 때, 남편이 자기 민족의 전통이고 신앙의 표현이라면서 할례를 행하자고 했을 때, 두 사람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어떻게 태어난 지 8일 밖에 안 되는 아기의 포피를 잘라서 피를 흘린단 말입니까? 십보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잔인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다투다가 그때는 그럭저럭 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둘째를 낳자 할례 문제는 다시 대두되었고, 이번에도 십보라는 반대했습니다. 그 어린 것에게 할례라 하여 살을 잘라내는 것도 그렇고, 만약 지혈이 안 되어서 계속 피를 흘리면, 자칫 아이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갈등이 있던 중, 느닷없이 남편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서 ‘애굽으로 가겠다, 같이 가자’했으니 쉽게 받아들였겠습니까? 어쩌면 모세와 십보라를 밤새 ‘가자, 안 된다’, ‘굳이 가겠다면 당신 혼자 가라, 나와 아이들은 친정아버지와 함께 여기 있겠다’ 하면서 싸웠을 것입니다. 십보라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은 모세가 객이지만 애굽으로 가면 그때는 자신이 이방인이 될 것이고, 그리되면 자신의 신을 섬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린 아들의 포피를 자르자는 이스라엘의 법에 자신과 아이들이 매여 살 것을 생각하니 답답했을 것입니다. 

낯설고, 물설고, 살아가는 방법과 율례와 법도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그것도 지도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앞이 캄캄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그냥 이대로 여기서 행복하게 살자’면서 달래도 보았을 것이고, ‘나와 아이들은 못 가니 갈라면 이혼 도장 콱 찍어주고 당신 혼자 가라’고 협박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아내로 인하여 모세는 더더욱 고민과 갈등에 빠졌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다시 모세를 찾으셨습니다(4:21). 그 하나님의 찾으심으로 인하여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부터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나귀에 태우고 미디안 광야를 떠나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2) 부부와 가족이 하나가 되어야 ‘산다!’

결단을 내려 떠나긴 했지만, 모세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습니다. 그렇게 애굽으로 향하면서 십보라의 잔소리는 아주 대단했을 것입니다. 이 역시 가정입니다. ‘왜 사서 고생이냐?’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엘리에셀을 생각해서 좀 천천히 갑시다.’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하자는 말은 말아요.’ ‘당신보다 당신의 형이 말도 잘하고 애굽에 오래 살았으니 애굽과 이스라엘에 더 정통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다이렉트로 아론과 거래하시라고 부탁하소.’ ‘바로 앞에서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당신은 한걸음 뒤로 빠지고 아론을 내세워요, 그게 안전한 길이예요.’ 가뜩이나 심란한 모세에게 십보라의 잔소리는 그를 더 정신 차리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모세의 발걸음은 더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던 길에서, 숙소에 들러 한숨 돌리고자 하던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하신 사건입니다. 정말 황당하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못한다’, ‘안한다’면서 그렇게 거절하던 모세를 억지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서 왜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서 모세를 죽이려하신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받고 가던 길에 이 무슨 충격적인 일이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벌이신 데에는 모세에게, 그리고 십보라에게 뭔가 부족한 것, 애굽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해결되어야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 하자 십보라가 그 아들의 포피를 차돌로 베어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면서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라고 외쳤고,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놓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열쇠가 되는 것은 “할례”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하나님,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분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표시입니다. 모세에게는 당연히 그 표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겐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➊ 우선 모세에게 ‘정체성의 혼란’이랄까, ‘내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아마 애굽도, 이스라엘도 다 잊고 싶었겠지요. 

➋ 모세가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두 번째로 미디안 광야, 이방인들 틈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아이들에게 자신이 어릴 때 겪었던 갈등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세는 어린 시절 이집트의 왕궁에서 다른 왕자들과 같이 지냈습니다만, 그에겐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도저히 감출 수 없는 표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목욕을 가면 자신이 다르다는 것이 뻔히 드러났으니까요! 

그것 때문에 아무리 이집트인이 되고 싶고 이집트 왕자가 되고 싶어도 자신은 히브리인이요 노예 출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소문이 퍼져서 궁내에 있는 사람들은 다 ‘모세는 핫셉수트가 주워온 아들이다.’ ‘모세는 노예 민족인 히브리인이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오는 괴리감, 피해의식, 외로움, 그 갈등과 아픔을 자기 아이들에게는 주고 싶지 않아서 할례를 행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십보라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는 점입니다. ‘당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잊어라.’ ‘애굽과 애굽에서의 모든 일들도 다 잊어라.’ ‘당신이나 우리 가족 모두 철저하게 미디안 사람으로 살자.’ 이렇게 십보라는 자신의 아이들이 이스라엘 핏줄이라는 것을 거부했고, 남편마저도 철저한 미디안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의 할례는 당연히 행치 않았지요. 여러분, 십보라가 이해되지 않습니까? 

이제 나이도 들만큼 든 모세에게 젊은 아내인 십보라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냥 자신의 고향에 살면서, 부족장이자 제사장인 친정아버지의 덕을 누리면서 친정 재산 물려받아 편안하게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으로 가는 십보라의 발걸음은 정말 내키지 않고 무거웠습니다. 그렇게 내키지 않는 걸음을 마지못해, 억지로 가고 있던 자신에게 갑자기 남편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벌어졌고, 그 순간 남편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자신에게서 발견한 십보라는 이제까지 미적거리던 것과는 달리 아주 신속한 행동을 취하여 아들의 할례를 행했습니다.

십보라는 눈치가 빠른 여인이었습니다. 신앙이 없으면 눈치라도 빨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을 죽이려 하시는 것을 보면서 십보라는 문제의 핵심을 간파했습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법을 거절한 것 때문에 남편이 죽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칼날처럼 날카로운 돌을 찾았고, 그것으로 아들의 포피를 베어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돌로 포피를 자르는데 그것이 한 번 만에 잘리겠습니까? 

무딘 돌칼로 몇 차례 찍어서 잘랐거나, 아니면 여러 차례 베듯이 잘라내었을 것입니다. 마취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시대라 아프기는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리고 피가 철철 흐르는 가운데 아파서 견딜 수 없어 하는 아들을 보는 어미의 마음은 오죽 했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고, 아들들이 아비 없는 자식이 되는 것보다 할례의 아픔을 참고 견디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고 그 일을 감행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십보라는 아들의 포피를 잘라서 길에서 할례를 행한 최초의 어머니였고, 길에서 외과 수술을 한 최초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후에 모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6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놓으셨다”는 말을 ‘몸이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사건을 통하여 십보라가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➊ 하나님은 모세만이 아니라 그의 부인 십보라와 두 아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 모세만이 아니라,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택함 받은 選民이라는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애굽에 들어가 봐야 소용이 없었습니다.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든 이방인처럼 여겨질 테니까요! 사실 십보라는 모세를 처음 만난 후 그 아비에게 “이집트인을 만났다”고 했습니다(출2:19). 십보라의 말대로, 모세는 히브리인도 아니고 이집트인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모세는 이제 히브리인도 아니고, 애굽인은 더더욱 아니고, 게다가 미디안인도 아닌 더 어정쩡한 모습이었습니다. 십보라도 남편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➋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주어진 그 막중한 사명을 부인인 십보라와 아들들이 함께 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가족에게도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자의 가족은 사명 공동체입니다. 즉 한 가족이라는 것은 사명에 있어서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족이란 사명에 있어서도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통해 십보라와 그 아이들은 그렇게 꺼려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사명에 동참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당신도 나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 당신이 사명자인 것처럼 나도 사명자라는 것, 부모가 사명자라면 자녀들도 사명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 일을 벌이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모세는 십보라와 아이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냅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 자신이 자신의 어정쩡한 모습을 깨닫고 확실한 태도를 갖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보라가 자신은 더 이상 미디안 여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여인이라는 것과,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자의 아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제 되었다’ 하면서, 자신이 같이 있지 않아도 두 아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잘 키워 줄 것을 믿어서 처가로 돌려보내고, 홀가분하게 혼자서 애굽으로 간 것입니다. 

3. 모든 것에서 하나인 가정!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특히 <부부의 날>을 앞둔 부부 여러분!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입니까? 단순히 함께 살아가는 부부라는 면에서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에서 하나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하나입니까? 주님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도 하나입니까? 오늘 본문은 부부와 가족들이 하나 되지 못하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 되지 못하면 부부와 그 가정이 위험할 것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남편이 죽게 되자 그때서야 비로소 십보라는 자신이 남편과 하나 되지 못한 것을 깨닫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향하던 모세를 죽이려 하신 그 일로 인하여 십보라와 두 아들들은 진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고, 남편과 아버지의 사명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부는 물론이고 한 가족은 모든 면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종종 어떤 부부, 혹 가정들은 서로 이방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이 다르거나 신앙관이 달라 이방인 같고, 섬김과 봉사에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이방인 같고, 때로는 헌금이나 교회 참여 문제 등에 뜻이 맞지 않아 이방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본문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김병후 박사의 『우리 부부 정말 괜찮은걸까?』라는 책에 나오는 10 가지 질문들을 소개했습니다만, 부부와 가족들이 신앙과 교회생활에 하나가 되지 못한 것 역시 “위기”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교회생활과 교회봉사 등에 있어서 부부가 하나 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죽음과도 같다는 것을 알고, 그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하나가 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를 위하여, 자녀들을 위하여,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하나가 되고, 사명에 있어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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