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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가정 (롬 8: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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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가정 (롬 8:29-30)


‘가정’이란 말 자체가 따뜻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따뜻함 보다는 마음의 무거움이 더 커 오는 것이 대부분 한국의 가정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즘 우리 가정들은 ‘애들은 따로 놀고 아내는 갈수록 불만이 늘어간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년 남성들은 ‘회사도 집도 두렵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해외 유학으로 인해 가족이 붕괴된 경우도 이제 드물지 않습니다. 
위기를 맞고 있는 가정들이 너무 많아 ‘가정’이란 말 자체도 꺼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가오는 세계의 변혁’(The coming World Transformation) 의 저자 런드버그(Ferdinand Lundberg)는 ‘가정이 완전히 소멸되기 직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울프(William Wolf)에 의하면 미래는 ‘가정은 어린아이를 기르는 1-2년을 제외하고 죽은 것이나 다름 없어질 것이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만큼 미래 세계로 갈수록 가정이 지금보다 더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미래학자 알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미래쇼크’에서 앞으로 변형될 가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예측을 했습니다.

(1) 자녀 없는 결혼이 늘어갈 것이다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에 목 메 달고, 일에 쫒기다보면 아이를 가질 틈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점점 직장을 자주 옮겨야 하고, 이사를 가야 하는데 애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으면 이동하기가 힘들어 집니다.
벌써부터 우리 나라를 보면 한 명 자녀를 둔 가정들이 많고, 아니면 결혼을 했어도 출산을 계속 미루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독신으로 지내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가족계획에 대한 표어들을 기억하시지요. 
1960년대의 표어는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였습니다. 
1970년대의 표어는 “아들 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80년데 표어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2000년대는 “아들 딸 낳지 말고 우리끼리 행복 찾자”라고 합니다. 
시대를 반영하는 표어들입니다.
앞으로 자녀 없는 가정들이 늘게 될 것입니다.

(2) 직업적 부모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뇌수술이나 증권이나 주식을 투자할 때 아무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하급 공무원을 뽑을 때도 자격 시험에 통과해야 합니다.
사람 기르는 것이 얼마나 전문성을 요하는 것입니까?
자격 없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델리에서 끔찍한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정명석 이단에 빠진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정명석의 영문 이름 이니셜을 따서 ‘JMS’라고 부릅니다.
통일교에서 나온 이단인데 통일교의 피가름과 마찬가지로 재림 예수인 교주와 성관계를 해야 죄가 씻어 진다는 이단입니다.
왜 이런 이단에 빠지는 한국의 여대생들이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한국에서 이단에 빠져 델리에 JMS 지부를 개척하기 위해 델리에 와서 활동하다가 JMS 본부에서 시키는 데로 마음에는 없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인도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를 낳긴 했는데 어떻게 기르는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이미 이단에 빠진 딸을 집안에서는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에 잠시 나왔던 문 미순씨가 그 집에 갔는데 갓 태어난 아이를 한 달 동안 한 번도 목욕을 시키지 않고 계속해서 베이비 오일만을 발라 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뭘 해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한창 더운 여름에 단칸 방은 완전히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고 남편은 한 쪽 구석에 잠을 자고 있었는데 에어컨을 세게 틀어 놓아 피 덩어리 애기의 입술이 파래 있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아이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마추어 부모가 애를 죽인 것입니다.
애를 잘 기르는 것이 어렵습니다.
목욕 잘 시켜 주고, 우유 제 때 주고, 이유식을 잘 시켜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키우면 다가 아니고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키우는 일에 부모가 전문가가 되지 않는다면 잘못된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육아 전문 자격증을 가진 부모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부모님들은 아마추어 부모들입니다.
그저 애들이 잘 자라주면 ‘하나님의 은총’이라 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직업적 부모’입니다.
말하자면 ‘Pro-Parents’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미래 사회는 아이를 전문적으로 기를 수 있는 면허를 가진 ‘직업적 부모’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추어 부모들에게서 상당한 보수를 받고 아이들을 대신 양육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생 부모가 아닌 직업적 부모가 같이 사는 새로운 형태의 가정이 생기게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알빈 토플러가 쓴 ‘미래 쇼크’에 직업적 부모가 신문에 젊은 부부들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낼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 왜 부모의 역할 때문에 스스로 얶메여 삽니까?
우리가 당신의 자녀를 책임감이 강하고, 훌륭한 어른으로 키워 줍니다.
A 급 전문가정인 우리는 아버지 39세, 어머니 36세, 할머니 67세, 30세인 삼촌과 숙모는 동거하면서 현지에서 파트타임 직장에 나가고 있음.
4 자녀 가정으로 현재 6-8세 자녀 1 명의 자리가 비어 있음.
규정 식사는 정부의 기준을 상회함, 
모든 어른은 어린이 발육 및 관리분야의 유자격자임,
생물학적 부모의 수시 방문이 허용됨, 
전화 통화도 무방함, 
어린이는 생물학적 부모와 함께 여름방학을 보낼 수 있음. 
특별 계약에 따라 종교.미술,음악 등을 권장함.
최단 계약기간은 5년.
상세한 내용은 서면으로 문의 바람”

직업적 부모의 등장은 성인들이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의 우리 속에 갇히지 않고도 쉽게 부모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자유이혼의 커다란 물결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전망합니다.


(3)임시 결혼의 유행

기술사회에서 볼 수 있는 높은 이혼율과 별거 율은 변화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결혼생활을 단 기간에 끝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회용품 사용의 보편화, 자동차 임대, 인형의 교환 판매, 옷도 한 번 입고 버리는 사회 속에서 가지고 있던 것을 쉽게 버리고 새 것을 쉽게 고르는 것이 일상화 되어 결혼 풍습도 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미국사회가 결혼하는 쌍 중에서 4 쌍 중에 1 쌍은 재혼 이상입니다.
미래 사회가 되면 평균 3-4번 결혼하는 것이 하나의 사회현상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기는 아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회악을 제어하는 일은 경찰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에 조 승희 사건을 통해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임시 결혼의 결과는 무수한 조 승희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4)집단 공동체 가정이 많이 생길 것이다.

집단 공동체가 옛날에는 종교적인 공동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한국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아니면 교육적인 이유로 서너 가정이 함께 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청주 근처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아이들을 홈 스쿨 형식으로 교육하는 공동체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유기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 도시에 내다 팔고, 이익금을 공동으로 분배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교과서 같다 놓고 자연학습과 인간학습과 더불어 가르칩니다.
매우 만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 공동체나 취미 공동체는 다릅니다.
박태선을 좇던 무리들이 한때 경기도 부천에 신앙촌을 형성하고 살았었는데 제가 비밀리에 그곳을 정탐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평등한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촌에 헌금을 많이 한 가족들은 마당이 있는 약간 넓은 집에 살았고, 믿음만 가지고 헌금을 거의 안 한 가족들은 단칸방 닭장 같은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눈빛들이 다르고, 뭔가 홀려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사회와는 전혀 동떨어진 별세계를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집단으로 살고 있는 가정들과 아이들은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5)동성애자가 자녀를 입양하여 가족을 형성하게 된다

갈수록 동성애자에 대해 사회가 포용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성공회는 신부가 동성애자 결혼 주례를 서 주는 것을 공식화했습니다.
영국 성공회는 발끈 했지만 추세를 거스릴 수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워낙 전 세계에 넘쳐 남으로 이런 형태의 가정이 앞으로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동성애자 가정에서 자란 애들의 눈에 ‘가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변화될 미래 가정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부터 가정을 지키는 대안들을 확실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빈 토플러는 미래 세계를 크게 세 가지 특색으로 구분합니다.
일시성, 새로움, 다양성입니다.
이 특징 때문에 미래 세계의 가정은 더욱 더 붕괴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공상소설 같은 일들이 지금 우리 곁에 다가 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감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인류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가정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최초의 남자 아담을 흙으로 빗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 곧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비뼈로 최초의 여자이자 부인인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왔습니다.
자기의 부인 하와를 처음 본 아담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고 감탄했습니다.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볼 때 자기보다 더 소중하게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볼 수 있었을까요?
아담과 하와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볼 때 ‘나의 일부로 혹은 나 보다 더 소중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했습니다.
범죄한 후에 ‘내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라고 감탄했던 아담의 눈에 하와가 어떻게 보였습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저 여자!’라고 했습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란 말과 ‘저 여자’란 말이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같은 남자요, 같은 여자인데 왜 이렇게 달라져 보이는 것입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보이지만 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질 때는 ‘저 여자, 저 웬수’로 보이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요건은 먼저 부부 각자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을 뭐같이 보고, 아내 보기를 뭐같이 보고, 다른 사람을 보기를 뭐같이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 같은 사람이 됐기 때문에 뭐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마음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뭐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고 최소한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 자매로 보게 됩니다.
‘사랑 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졌습니다.
그 비극은 바로 자녀들인 가인과 아벨에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볼 때 어떻게 보았습니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본 것이 아니라 경쟁상대로 보았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아담 가정에 비극입니다.
가정이 회복되려면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이 될 때 다른 사람을 볼 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증오의 대상, 경쟁의 대상, 제거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가 선진화가 될수록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점점 더 삭막해져 가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되는 이유가 교육이 부족해서 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선진사회일수록 어렸을 때부터 교육에 올인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교육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교육과 지식 교육이 가정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고, 사회를 성숙한 사회로 만들고 있습니까?

요즘 모 기업 회장이 폭행 당한 아들을 위해 폭력배를 동원해 보복한 사건으로 시끄럽습니다.
아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을 찾아내어 공사장 창고로 끌고 가 아버지가 “내 아들이 눈을 맞았으니 너도 눈을 맞으라”며 때렸다고 합니다.
동행한 경호원들은 쇠파이프와 전기 충격기를 들고 “손목을 잘라버리겠다”, 
삽으로 땅을 파면서 “파묻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고 합니다.
내 아들 한 대 맞으면 당연히 부모의 마음이야 두 대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 겁니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총수가 이렇게 하면 안되겠죠.
그리고 그 아들도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까지 끌어 들여 복수를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인간이 안 된 것입니다.

문제는 왜 그들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가?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교육이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 아들 미국의 명문대 다니고 있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불우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결손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딴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것도 한 여자가 아니라 네 명의 다른 부인을 두고 살았습니다.
배 다른 형제들이 열 명이나 돼서 늘 패가 갈려져 싸우기 일쑤였습니다.
이 사람은 유난히 형들에게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정에서부터 왕따를 당한 것입니다.
왜냐면 아버지가 이 아이를 편애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온갖 욕설과 모욕과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결국에는 배 다른 형들에 의해 죽임을 당 할 직전에 다른 나라 노예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누군지 대강 짐작이 가리라 믿습니다.
요셉입니다.

사춘기 나이에 이런 엄청난 일을 당했습니다.
이집트에 유학을 간 것이 아니라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생각하지 마시고 내 아들이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아들이 남의 땅에 노예로 팔려가 그곳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요즘 캥거루 족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습니까?
결혼을 시켰는데도 전화 요금을 부모가 부담하는 콜랙트 콜로 건다고 합니다.
몇 대 맞았다고 아버지한테 일러 폭력배를 동원해 복수를 하려는 캥거루 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아이가 남의 나라 노예로 팔려가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살하고 말 것입니다.
사고치고 말 것입니다.

요셉은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인정을 받고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거기까지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이 무슨 소용입니까?
성실한 요셉에게 주어진 보상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가족으로부터의 학대와 배신, 사회로부터 겪어야 하는 모순들….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 오는 정 반대의 현실…
이것이 30 년 가까이 요셉이 겪어야 했던 가정과 사회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렇게 성장했다면 요셉의 성격이 어떻게 변해 있었을까요?
당연히 그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어야 했습니다.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지탱하게 해 준 어떤 것이 마음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만일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사회에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누구보다도 어떤 사회적 상황에도 적응을 뛰어나게 잘 했습니다.
심지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갔어도 그곳에서도 뛰어나게 적응을 하여 죄수들을 총괄하는 직임을 맡게 됩니다.

언제 누명을 벗고 감옥을 나오게 될 지 캄캄한 터널 속을 통과하던 어느 날 감옥에 들어 온 왕의 죄수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그 죄수는 다시 복권이 되어 이집트 왕 앞에 서서 왕을 모시게 됩니다.
그 신하는 복권이 되면 반드시 요셉을 감옥에서 나오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만 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희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속절 없는 2 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집트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를 못했습니다.
이때 옛날 요셉에게 꿈을 해몽 받았던 그 신하가 요셉을 생각해 내고 왕에게 추천해 줍니다.
요셉은 왕의 꿈 명쾌하게 해석해 줍니다.
그 꿈은 칠 년 풍년이 들고 그 후에 칠 년 흉년이 든다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해몽해 주었을 뿐 아니라 칠 년 풍년 동안에 어떻게 남은 곡식들을 관리하고 저장해야 하는지에 대해 대책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왕은 이집트 제국에 요셉만한 인재가 없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게 요셉을 총리로 임명합니다.
정말 요셉의 해몽대로 칠 년 동안 연속해서 이집트 땅에 풍년이 들었습니다.
요셉은 그 남은 곡식들을 차곡 차곡 저장했습니다.
칠 년 풍년이 끝나자 정말 흉년이 연속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와 근동 지역 전체가 가뭄으로 굶어 죽을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는 양식이 풍부했습니다.

근동의 국가와 부족들이 양식이 풍부한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왔습니다.
이때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형님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형들은 대 이집트 제국의 총리가 자기들이 옛날에 팔아 먹었던 동생 요셉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십여 년 만에 원수들을 외 나무 다리에서 만났습니다.
요셉은 대 제국 이집트의 실권자였고, 맘 만 먹으면 형님들을 죽이기란 일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모 재벌처럼 밑에 있는 사람들을 동원해 위협하지도 않았고,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형님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이곳에 먼저 보내신 것뿐입니다.
형님들이 노예로 나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형님들에게 책임이 없습니다.”
창세기 50장 21절에는, “형님들 내가 형님들을 헤칠까봐 염려하지 마세요.
내가 형님들을 보호하고 형님들의 자녀들을 다 기르겠습니다”

당연히 분노의 복수를 해야 할 요셉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기에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생애에 늘 따라 다니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요셉의 마음 속에 새겨졌습니다.
그 형상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적응하는 원동력을 제공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마음에 있는 사람은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만들면서 삽니다.

세상의 돈과 교육이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형상이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다른 사람을 볼 때 적으로 보지 않고, 경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나 보다 더 귀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형상으로 살 때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 행복한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돈과 세상의 교육이 아닙니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회복이 먼저입니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대기업을 일구어 성공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고향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지었습니다. 
작고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이 집을 본 동네 사람들이 “이건 너무 초라합니다. 
호화롭지는 않더라도 생활에 불편하지는 않아야지요”라고 하며 주위 사람들이 걱정을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헨리 포드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며 대답하였습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닙니다.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넘친다면 그곳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집일 것입니다.” 
지금도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 기념관에 가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헨리 포드의 성공의 비결은 꿈꾸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함께 이룬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부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미국의 백화점 왕이라 불리는 죤 와나메이커, 강철 왕 카네기, 정치가이며 사업가이었던 록펠러, 치약을 만든 콜게이트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좋은 가정을 이루었던 것은 그들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해 우리를 미리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을 때 복된 구원이 이루어지고, 복된 가정, 복된 교회, 복된 사회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형상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모시고 살 때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자리잡게 됩니다.

빌립보서 2장 5-7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당신 자신보다 그의 택하신 자녀들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낮아 지고 낮아져 종의 모습까지 되셨고, 우리 대속을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이 형상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볼 때 “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가 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사십시오.
이제부터 예수의 마음으로 아내를 보고, 예수의 마음으로 남편을 보고, 예수의 마음으로 자녀들을 보고, 예수의 마음으로 이웃을 볼 때 우리가 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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