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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국제적인 리더가 필요한 때에 (요 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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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리더가 필요한 때에 (요 4:3-26)


한 지성인의 고백 

지금까지 TV 토론회 출연자 가운데 가장 지성적인 분을 손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분의 저술이나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분에게 따르는 수식어인 ‘시대의 지성, 살아 있는 백과사전…’에 전혀 손색이 없다는 생각을 들곤 합니다. 하지만 지성과 문명과 존경을 누리는 그분도 자신의 저서에 『좌우로 파도가 치는 험한 바다를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큰 딸이 갑상선 암에 걸려서 투병 과정 중 실명할 위기에 처했을 때, 태어나서 예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던 딸의 아름다운 눈이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의학과 과학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던 그는 하와이의 작은 교회에서 “나의 첫 생명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쳐다봤던 내 딸의 그 눈을 지켜주신다면 당신을 따라 사역하겠습니다.”고 간절히 기도했고, 기적같이 따님은 실명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령 씨는 자신이 한 약속대로 2007년에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은 지 3주 후에 미국의 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대 로스쿨을 준비하던, 딸처럼 기른 외손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그 때, 신앙심이 깊던 생물학자인 다윈이 자신의 딸이 열 살에 요절한 뒤 ‘인간의 생사 결정은 신앙과 관계가 없구나, 무슨 원칙이 있다는 말인가.’ 라며 신앙을 버린 것을 생각하면서 신앙의 대한 심각한 갈등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왜 나입니까....?’ 출근하려고 나설 때면 넥타이를 붙들고 출근하지 말고 같이 놀자고 귀엽게 투정을 부리던 손녀의 생각에 하나님께 절규하다가 더 큰 의미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교회와 민족 그리고 가정과 우리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본문에서 깨달아야 할 커다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좌절한 여인의 발견 

사마리아 여인은 정오에 혼자 우물가에 왔습니다. 덥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물에 오지 않는 시간에 혼자 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 다섯 남자와 혼인해서 살다가 현재는 여섯 번째 남자와 혼인식을 하지 않고 살고 있기 때문에 창피해서였을 거라고 추측해 봅니다. 이 여인이 원해서 남편을 바꾸었든지 아니면 원하지 않았음에도 할 수 없이 남편을 바꾸었든지 간에 이 여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리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욕먹는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여인 자신이 남편을 바꿨다는 생각은 당시의 사회문화 배경 상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아마 남편들이 죽었든지, 남편들이 이 여인을 버렸든지 했을 것입니다. 이런 기구한 상황에서도 여인은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한편 인생에는 사람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적어도 자신과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사람이 선지자라는 것을 깨달은 여인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 둘 중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인은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말한 그 사람을 가리켜 “와 보라 그분이 그리스도 이다.” 라고 외쳤습니다. 


영적으로 갈급한 세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발달된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삶을 위하여 준비하고, 노력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 그 종류는 다르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남편을 5명이나 바꿔야 했던 사마리아 여인 같은 어려움을 누구라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우리 가정과 자신을 위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인들은 영적으로 갈급해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이 이것을 깨달아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민족의 정신환경은 극도의 공황이 올 것입니다. 그 증거를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를 비교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미국교회: 미국 교회는 지난 70여년 크게 세 단계를 거쳐 오고 있습니다. 첫 단계는 1940년에서 1960년 사이입니다. 미국은 세계 제2차 대전과 한국전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 자신감과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을 신앙과 결부시키면서 미국 개신교회는 초고속 교회 성장을 성취했습니다. 

1960년 초, 미국의 전 인구 대비 65%가 개신교인이 되었으며, 이 때 미국 개신교회는 미국 사회를 주름잡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인 1960년에는 ‘문화혁명’(여기에는 학생 파워, 히피 운동, 여성 파워, 흑인 파워의 등장이 속함)이 ‘백인중산층문화’를 무너뜨리면서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상황에서 요구하는 영적인 것을 충족했다면 미국교회도 성장했고, 미국사회도 정신적으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대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1970년 이후 세 번째 단계인 ‘교회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2] 한국교회의 경우에는 

1970년 산업화를 등에 업고 ‘잘살아보세’를 신앙의 모토로 하여 한국교회의 초고속 성장이 1990년대 전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영향력으로 개신교회는 한국 사회 속에 ‘주역’(major)의 자리를 점유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을 전후하여 불기 시작한 ‘민주화’ 바람과 함께 교회에 대한 기대와 영향력이 서서히 줄어 갔습니다. 침체 현상은 1990년에서 2000년 21세기 문턱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월식 현상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상황에서 요구하는 소리는 듣지 않은 채 무너져가는 작은 교회에서 나온 교인들로 대형교회는 더욱 대형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것을 뒤로 하고 모든 성도들은 심각한 경쟁과 노력해도 해결이 보이지 않는 삶의 현장에서 지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정한 생수를 전달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뒤를 이어서 교회와 교인이 없는 신학만 남고 말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사명 

우리 민족의 역사인 배고픔과 눈물, 질병과 죽음, 침략과 수탈의 비극을 거치면서 살아온 ‘고난의 영성’이 바로 한국인의 영성입니다. 고난의 영성 위에 현대인은 화려해 보이지만 또 다른 더욱 심각한 고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 때 긴 세월의 고난을 묵묵히 이겨낸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화려하지도 않고, 자랑할 것도 없는 우리교회입니다. 그러나 상처 난 모습이지만 고난을 이겨내면서 만난 살아계신 하나님을 와서 보라고 증거 할 때입니다. 단순히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져 내려가는 한국교회와 우리민족의 정신세계를 붙잡기 위해서 필요한 사명입니다. 지금은 세계가 고난 중에서 건강을 신앙과 정신을 한 리더를 찾고 있습니다. 이 민족을 구원하는 소박하지만 건강한 리더의 사명을 감당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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