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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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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엡 6:4)


어린이 주일은 1855년 6월 둘째 주일에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제일 유니버설교회 G. H. 레오날드 목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어린이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수많은 아이들을 모아 놓고 헌신적 신앙생활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이때는 꽃이 많은 계절이기 때문에 꽃을 준비하여 환자들을 위문하며 찬송을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후부터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게 된 이유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계절적으로 5월은 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계절이기 때문에 5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정하고 꽃같이 아름답고 맑은 어린이를 생각하며 꽃 주일이라고도 부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최제우와 최시형에 의해 일어나게 된 민족주의 종교단체인 동학교의 사상체계 가운데 인시천(人是天)사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내천은 손병희가 나중에 고친 용어입니다. 이 사상은 어린이들을 사랑해야 된다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동학이란 이름은 서학을 도전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인시천이란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상입니다. 곧 사람의 가슴 속에 하나님을 저마다 하나씩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과 같다고 하는 사상체계입니다.
이 사상은 사람은 모두 지고지귀(至高至貴)하신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평등하고 지고지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한 동학은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누구나 다 똑같은 하나님을 마음속에 하나씩 모시고 있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인격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평등사상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놓은 평등사상 중에서 평등의 확신을 가장 강하게 심어줄 수 있는 사상이었습니다. 

서학도 인간의 평등을 말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 밑에서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동학의 평등사상은 똑같은 하나님을 모든 사람들이 각각 평등하게 하나씩 가슴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강한 확신을 심어주는 평등사상입니다. 동학의 평등사상은 신분평등 뿐만 아니라 남녀평등에도 해당되었습니다. 최시형은 부녀자는 하나님을 낳은 하나님이므로 남성과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어린이에 대한 평등사상도 정립하여 어린이는 어린 하나님이므로 동학신도는 남녀를 불문하고 절대로 어린이를 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동학의 원칙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독실한 동학교도이며 손병희의 사위인 방정환과 김기전 등에 의해 어린이 운동으로 이어지고 어린이날로 제정되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일년 12달 가운데 모두가 가정의 달이 아닌 달이 없지만 특별히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한 것은 어린이날과 관계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먼저, 

Ⅰ. 교육이념과 교육 목적입니다. 

1) 교육이념(Education Ideological)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그대로 가르치며 또한 장로교 원본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서의 교리대로 교리와 신앙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며 신앙과 생활을 순결케 할 인재 양성을 교육이념으로 합니다. 

2) 교육목적(Education Purpose)

(1) 성경을 가르쳐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예배적 인격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2)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인화협동적인 인격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3) 자기의 존재 의의와 특수한 사명을 자각하며 자기의선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성하는 문화적인 인격자를 양성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전인교육은 체육(體育)과 지육(智育)과 영육(靈育)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영적인 기초 위에 체육과 지육이 서야만 전인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Ⅱ. 전인교육(全人敎育)입니다(Whole man Education). 

일반적으로 교육이라고 할 때 학교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의 모습은 교과지도와 생활지도 즉 '교(敎)'라는 기능과 '육(育)'이라는 기능이 상호보완적으로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일반 교육학에서의 전인교육(全人敎育)은 바로 학교교육의 두 기능이 어느 한쪽에 편중됨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양자의 기능이 균형을 이루면서 인간의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하도록 하는 교육이라고 합니다.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교육이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이라고 할 때에도 일반적인 교육의 개념을 소외시키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을 자신 있게 포함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교육이념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일반교육과 교회교육의 차이입니다. 

1) 체육(體育)입니다(Physical Education). 

(1) 유년기의 체육입니다. 
누가복음 2장 40절에 『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라고 했습니다. 

(2) 소년기 체육입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의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의 건강을 해치는 여러 가지 질병에서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들에게는 필수의무요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기오염이나 산업공해로부터 최대한 보호를 해주어야 합니다. 발달된 첨단 의료 장비와 의료 기술에 의해 병원에서 정기진단 등을 통하여 질병으로부터 예방 방법을 알아서 적절히 대처해야만 합니다. 더욱이 사회적인 퇴폐 향락문화로부터 정신적으로 오염되지 아니하도록 우리의 어린이들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육체적으로 강인하게 자라나야 합니다. 

2) 지육(智育)이 있습니다(Intellectual Education). 

누가복음 2장 40절에 『 지혜가 충족하며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육체는 날로 성장해 가는데 지혜와 지식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체육과 지육은 정비례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소위 바보가 됩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을 능히 정복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애굽의 궁실에서 40년 동안 이 세상 학문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갈대아 학문을 배우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소대학과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대 학자였습니다. 2000년 기독교 교회사에 별처럼 빛나게 살았던 수많은 종들은 모두가 세상 학문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린 자녀들에게 공부할 수 있도록 모든 환경과 조건을 구비시켜 주어야 마땅합니다. 본질적으로 볼 때 이 세상을 위한 학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 학문의 출처는 하나님 자신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초등학문을 정복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육의 기회균등은 우리 교육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이른바 신분상승을 꾀하는 도구적 학문은 바람직한 교육제도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영육(靈育)입니다(Spiritual Education).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타락한 지육은 하나님에게서 더욱 멀어질 뿐입니다. 영적 교육이 삭제되거나 무시되는 교육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중심으로 치닫는 인본주의 교육입니다. 
무신론주의 교육은 이 세상의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도록 합니다. 과학지상주의 교육은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면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아서 경험이 주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면 모두를 부정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 타락한 인간이 예수의 보혈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온전한 전인교육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Ⅲ. 교육(양육)방법입니다(Education Process).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6장 4절에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노엽게 하다'(파로르기조)는 '노엽도록 책망하다'라는 의미로 본문에서는 반복적 행위를 나타내는 현재 명령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당한 이유와 적절한 훈계 없이 도를 넘어서는 요구는 자제해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요구나 기능과 역할마저 평등하게 생각한 나머지 상대적 박탈감이나 상대적 열등 감 속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자식을 통하여 대리 만족을 꾀하기 위해 분노하는 것은 합당치 못합니다. 부모의 정당한 권리를 남용하여 자녀들을 분노케 하는 부모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일체 자녀를 징계할 수 없다거나 부모의 권위를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녀는 채찍과 꾸지람으로 징계 받아야 마땅합니다. 

잠언 29장 15절에 『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감정과 폭력으로 하지 말고 사랑과 희생으로 해야 합니다. 프랑스 속담에 "소금에 절이지 않은 생선과 부모의 책망이 없는 자녀는 반드시 부패한다."고 했습니다. 

2)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해야 합니다. 

본문 6장 4절에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했습니다. 
칼빈은 "부모는 자녀를 소중히 양육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핸드릭슨(Hendrikson)은 "자녀는 마음을 싸서 길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했습니다. 

'교양'(파이데이아)은 훈련이나 체벌을 동반한 책망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엄격한 규율을 의미했습니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에서 '교육'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잘못에 대한 교정(矯正)의 수단으로 양육하는 '훈육'(discipline)과 '연단'(training)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욱 합당합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는 꾸짖거나 징벌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2절에 『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9절에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에 『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라고 했습니다. 
'훈계'(누데시아)는 말로 하는 교훈이나 교정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힐책과 꾸짖음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충고와 격려의 뜻도 있습니다. 

(1) 말로 가르쳐야 합니다(Tell him Why). 
우선 언어(言語)적인 매체가 훌륭해야 합니다. 왜 교회에 나가야 되며, 왜 믿어야 되며, 왜 찬송해야 하며, 왜 감사해야 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왜 건강해야 되는지, 왜 공부해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들의 책임입니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바른 삶의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2) 본으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Show him How).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충분한 시청각자료이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른바 '등 교육'이라고 합니다. 믿고 따르는 순종의 생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건전한 생활을 보여주고 학문의 필요성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의 부족을 합리화시키면 우리의 자녀들은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자녀들에게 본이 되지 못한 과거는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실패한 그것마저도 보여주어서 제 2의 부모 자신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오해하지 말 것은 부모가 실패한 과거를 보여준다고 해서 부모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은 모르겠으나 장차 자식이 부모의 용기를 이해할 때가 오면 그 부모는 자식에게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본이 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 나를 본받는 자가되라 』고 성도들에게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3) 사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의 총체적인 표현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희생적인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적인 사랑은 최고의 덕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적인 사랑은 최고의 권위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적인 사랑은 미래의 찬란한 희망입니다. 부모는 이 위대한 사랑 전달의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받은 고유한 권리입니다. 부모가 왜 자식에게 위대하고 존경의 대상이 됩니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가정은 자녀에 대한 통제기능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부(父)권이 상실되고 모(母)권이 상실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회복하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갱신작업(更新作業)입니다. 
그것은 부모들이 신권(神權)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신권이 부정되는데 부권과 모권이 설 수 없습니다. 영적인 교육은 인간화의 필수교육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래를 회복하는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과학교육(학교교육)이 너무 크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교육은 고사하고라도 가정교육이나 사회교육, 교회교육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 과학교육(학교교육)이나 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가 아닙니다. 다만 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 주는 기능일 뿐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7절에 『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은 진리 안에서 자유합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했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과학문명의 만세소리 앞에서, 지고한 철학 앞에서 오히려 인간은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책임 있는 말로 자녀들을 교화(敎化)하며, 본이 되는 삶으로 자녀들을 감화(感化)하며, 희생적인 십자가의 삶으로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지 아니하셨더라면 그에게 무슨 권위가 있겠으며, 무슨 존경의 대상이 되겠으며, 무슨 가치가 있겠으며, 그의 말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정교육만을 고집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편협된 윤리와 주관적인 도덕 윤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학교교육만을 고집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식만능주의로 치우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학교교육만 의지하게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취업수단으로, 도구적 학문이 되어 그 방법이 지극히 야비한 것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를 말할 정도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교육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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