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의 보내심 (행 12:25-13:13)

  • 잡초 잡초
  • 248
  • 0

첨부 1


성령의 보내심 (행 12:25-13:13)
  

제가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그 지역 교회들 간의 '친선 소프트볼 리그'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 가지 놀랐던 것은, 그 미국 교인들이 교회 소프트볼 팀을 운영하는 방식이 아주 철저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시골 동네에 있는 몇 교회끼리 친선 시합을 하기 위하여 조직된 순수한 아마추어 팀들임에도 불구하고 각 팀마다 다 감독과 코치는 물론 기록원까지 정식으로 임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감독이 선수 선발 및 교체를 비롯해서 작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진짜 프로 야구팀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면서 팀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야 '동네 야구' 하면 그냥 대강 모이는 대로 적당히 포지션을 잡고 시합을 하면서 작전이라는 것도 그야말로 중구난방으로 하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교회 대항 친선 소프트볼 경기에 참여하면서 생전 처음으로 감독이 저의 개인 타격 성적과 수비 실적에 대하여 노트에 기록까지 하면서 저를 시합에 투입하기도 하고 교체하기도 하며 작전 지시까지 내리는 시합을 해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역시 야구는 정식 감독이 있어야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관중의 눈에는 경기장에서 던지고 받고 치고 달리는 선수들밖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그 선수들의 모든 세세한 움직임들과 경기 전체의 운영은 오직 더그아웃 밑에 앉아 있는 감독 한 사람의 방침과 작전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팀이라 해도 어떤 감독의 리더십 하에서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시합의 결과와 팀의 성적이란 엄청나게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 선교' 즉 복음을 주변 이웃과 지역 사회에만 전도하는 수준을 떠나서 이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까지 찾아가서 전파하는 선교 활동이 정식으로 막을 올리게 되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선교 활동은 우연히 발족되거나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식 감독'의 분명한 목적과 철저한 계획과 완벽한 선수 선발 가운데 진행된 것이었는데, 그 감독이란 바로 '성령 하나님'이셨습니다.
본문에 밝히고 있는 대로 첫 선교 활동은 오직 "성령이 가라사대"로 시작되었고 "성령의 보내심"을 받고 "성령에 충만한" 중에 진행되어 갔습니다.
성령께서 감독하신 일이니 물론 완벽하게 모범적인 선교가 되었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오늘 '총회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주어진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친히 주장하시는 참된 선교'는 과연 어떤 것인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선교는 '교회를 통한 파송'에서 시작됩니다.

본문 12장 25절부터 13장 3절에 "25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1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안디옥교회에 있던 여러 "선지자들과 교사들" 즉 교역자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바로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안디옥교회의 초대 담임목사였습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아닐까 하는 추측'구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 둘이 같은 사람이라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왜 같은 사람의 이름의 철자를 다르게 표기했을까 하는 반증이 있어서 확실히 알 길은 없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입니다.
"마나엔"이란 사람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이 말은 '어린 시절에 왕자의 동무가 되어 궁중에서 같이 자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바나바의 부름을 받아 안디옥교회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해 왔던 "사울"이 있었습니다. 
출신 배경과 신분을 따진다면 정말 제각기 천차만별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오직 '주를 섬기는' 일에 하나가 되어 안디옥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성령께서는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즉 성령께서 친히 계획하시는 어떤 특수 사명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의 총감독 되신 성령께서 안디옥교회에 내린 첫 지령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에 있던 여러 교역자들 중에서도 가장 말씀을 잘 가르치던 "바나바와 사울"을 특별히 뽑아서 복음을 해외로 널리 전파하고자 하는 작전을 바로 성령께서 친히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지금 막 "부조의 일을 마치고" 즉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일을 위해 함께 다녀온 것도 바로 이 선교 여행을 위하여 미리 손발을 맞추는 일종의 전지훈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성령님의 지시를 받자마자 안디옥 교회는 곧 "금식하고 기도하고 안수하여" 그 두 사람을 선교사로서 파송했습니다.
우선 기도로 준비하는 기간이 있었으며 또한 안수식을 통하여 공식 선교사로 임명하는 순서 역시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14장 26-27절에 나타나는 대로 선교 활동을 끝내고 돌아온 후에 그 사역에 대한 보고 역시 안디옥교회 앞에서 하게 됩니다.
'선교사를 교회를 통하여 공적으로 파송하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지시하신 선교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첫 해외 선교는 이처럼 교회의 공적 결정을 통한 공식 사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판단'이나 무슨 '특별한 사명 의식'만 가지고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사의 첫 선교 활동은 결코 제멋대로 하는 개인플레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회를 중심으로 성령께서 치밀하게 계획하시고 지시하셔서 발동된 완벽한 팀플레이였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파송을 받지 않고 그저 '개인적으로 소명을 받아서' 선교 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물론 어쨌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볼 때에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근본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선교사들은 우선 지속적인 지원이 없는 까닭에 개인적인 후원을 받기 위해서 여기저기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게 되고 자연히 선교사역 자체는 뒷전이 되기 일쑤입니다.
또한 전 세계 선교지에 골고루 파송되지 않고 선교 사역이 '잘 될 만한' 지역에 너무 많은 선교사들이 편중되는 현상도 나타나기 쉬운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 교단에서는 선교사 파송을 반드시 공적으로 시행합니다.
즉 어느 한 지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하면 그 교회에서 그 선교사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일단 책임집니다.
그리고 총회 선교부에서 그 선교사의 파송식을 거행함으로써 '선교사'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고 적절한 선교지를 선택해서 파송한 후에 그 신분 보장과 사역 여건 조성을 위하여 모든 법적, 행정적 지원을 해 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교단의 선교사들은 한 지역에 중복되지 않고 꼭 필요한 지역 곳곳으로 파송되고 있으며, 또한 어느 한 선교사를 지원하던 교회 내에 무슨 문제가 생겨도 총회에서 대신 책임을 지고 그 파송되어 있던 선교사가 계속 사역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총회선교주일을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지키면서 특별선교헌금을 드리는 것이나, 평소에도 '경향선교회 후원회원'으로서 기도와 후원회비로써 지원하는 것 역시 이런 완벽한 '팀플레이'를 수행함에 있어서 아주 요긴한 역할입니다.
  
왜냐하면 첫 선교사 파송 때부터 그랬듯이 선교 사역은 항상 '교회'에서 출발되는 것이며 '교회'의 지원 하에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서도 바로 이러한 '교회중심의 선교 사역'을 진두지휘하고 계시는 것을 깨닫고, 그 성령의 파송을 받아 '가는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맡은 '보내는 자'의 사명을 더욱 충성스럽게 감당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선교는 '영혼을 구원해내는 승리'를 거둡니다.

13장 4절 이하 12절 말씀에 "4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6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7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파송 받은 선교사들이 가게 될 선교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 역시 어디까지나 "성령의 보내심"을 통하여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실루기아"는 지금 그 "두 사람"이 출발한 안디옥에서 서쪽으로 25km 지점에 있던 항구였습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도착한 첫 선교지가 바로 "구브로"였는데, 지중해에 있는 이 섬은 당시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던 곳이며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그 섬의 주요 도시가 바로 "살라미"였고 이들은 그곳의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선교 전략이 벌써 잡혀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선교여행 코스를 택할 때 로마 제국의 주요 교통로를 이용함으로써 교통의 편리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전도하기 위하여 인구가 많고 산업과 문화가 활발한 대도시들을 방문했습니다.
또한 대도시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을 선교 활동의 기초적인 접선 장소와 전초기지로 십분 활용했던 것이었습니다.

살라미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선교 활동이 끝난 후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즉 섬을 가로질러서 "바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 "바보"라고 음역되어 있는 말은 '파보스'라는 지명으로서 당시 구브로 섬의 행정수도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그 섬의 총독, 즉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과 "함께 있는" 즉 그를 보좌하고 있는 "바예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다른 이름은 "엘루마"였는데 이것은 '박수' 즉 '마술사' 혹은 '점쟁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그를 가리켜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라고 했듯이, 그의 이름은 그럴 듯하게 "바예수" 즉 '구원의 아들'이란 뜻이었지만 실상은 종교적 사기꾼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총독쯤 되면 개인적으로 궁중 점성가, 다시 말하자면 전속 무당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한 '클레오파트라'라는 영화에 보면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가는 곳마다 자기 전속 여사제 한 명을 대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런 예입니다. 

서기오 바울 총독은 "지혜 있는" 사람이었던 까닭에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했습니다.
그때 이 바예수라는 자는 만일 총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자기 직장이 없어질 것이 뻔함을 알고서 바나바와 사울의 전도를 방해하며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부렸습니다.
  
바로 그때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크게 책망합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부터 '사울'이 '바울'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며 '바울'은 로마식 이름인데, 앞으로 헬라 사회에 선교 활동을 계속해야 할 것을 고려한다면 '바울'이 더욱 부르기 쉬운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바울이 성령에 충만하여 그 바예수라는 박수를 크게 꾸짖었습니다.
"악행이 가득한 자, 마귀의 자식, 모든 의의 원수"라고 책망하면서 "주의 바른길을 굽게 하는" 즉 복음에 대적하는 행동을 당장 그치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그 바울의 저주대로 바예수는 "얼마 동안" 즉 일시적으로 눈이 어두워지는 벌을 당장 받게 됩니다.
눈이 머는 것은 바로 바울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꾸짖음을 들었을 때 함께 당했던 것이었고 그 기간 동안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바예수에게도 그것이 회개의 촉구 수단이었고 기회가 되었겠지만 그 결과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소위 '사람 좋게' 대하는 것만이 전도의 상수가 결코 아니라 '명백한 죄를 크게 책망하는' 것이 한 영혼을 제대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잘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바예수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총독은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또한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겼다"고 했는데 이 말은 '깊이 감동 혹은 감명을 받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바울 속에서 충만히 역사하셨을 때, 그 마지막 결과는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감동받고 변화되는 구체적인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혹 서기오 바울 총독의 회심이 그 구브로 섬에서 단 한 명의 선교 열매였다 할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성령께서 세우신 목적의 달성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 활동 중에서는 이 최종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서 끝나는 소위 '프로젝트 선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무슨 의료사업, 구제사업 혹은 교육사업 등을 선교의 이름으로 시작하고서 그런 프로젝트에 선교 헌금을 끌어 쓰는 것입니다.
그런 사업들은 그 결과가 대단하게 보이며 불신자들조차 그 업적을 칭송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선교 사업'들이 선교의 최종 목적인 '개인의 영혼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인적 물적 낭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프로젝트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통해 영혼 구원의 결실이 반드시 따라야만 성령께서 의도하시는 진짜 목적이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혼 구원은 '빵 한 조각을 얻거나' '무상 진료를 받으려' 하는 마음만 가진 자에게는 결코 일어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들으려" 하는 심령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말씀 전파를 방해하려는 마귀의 온갖 공작을 물리치고 끝내 한 영혼을 말씀의 감동을 통하여 믿게 하시는 역사는 무슨 '선교 사업'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심으로써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 교단에서 파송 받은 선교사들은 각자의 선교지에서 그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 설립'에 최우선을 두고 사역합니다.
'믿는 자에게 세례를 주어' 진정한 구원인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만들고 그런 신자 두세 사람을 모아 교회를 세움으로써 계속해서 직분자들을 세우는 동시에 그들 스스로 자기네 동포들을 전도하여 교회를 부흥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이 요란한 '선교 사업'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한 영혼을 구원해 내는 구령운동'을 구체적으로 성취하는 것이 오늘도 성령께서 친히 주장하시는 참된 선교 활동임을 깨닫고, 우리 '경향선교회'와 '총회선교부'의 이와 같은 선교 사역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선교는 '사람의 실족에 상관없이 부단히 진행'됩니다.

13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13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선교팀은 이제 구브로 섬을 떠나 "밤빌리아" 즉 소아시아의 한 해안도시에 도달하여 "버가"로 갔는데, 이 '버가'는 '밤빌리아'에서 내륙으로 20km 정도 더 들어간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버가에서는 무슨 선교 활동에 대한 기록은 아무 것도 없고 그 대신에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요한'은 혹은 '마가'라고도 불렸는데 이 바울 선교팀의 일행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까 5절 하반절에서 그 두 사람이 구브로섬에서 선교 활동하는 중에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즉 이 마가 요한은 원래부터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 받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구브로가 바나바의 고향이고 마가 요한이 바나바의 사촌인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 구브로 선교 활동 도중에 "수종자" 즉 일종의 '조사'로 이 선교팀에 합류하게 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 즉 이 선교팀이 버가에 이르렀을 때 그 요한이 갑자기 선교 여행에서 도중하차하여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무슨 신병에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고 혹은 선교 여행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때문에 낙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선교 활동의 주역이 자기 사촌인 바나바로부터 바울로 넘어가는 것에 불만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본문 7절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소개되었던 것이 여기 13절에 와서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 즉 바울이 이 선교팀의 리더로 소개되고 있는 것도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런 마가 요한의 행동은, 사도행전 15장 37절과 38절에도 나오듯이 바울에게 엄청난 실망을 주게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바울로 하여금 그처럼 가깝게 지냈던 동역자 바나바와 대판 싸움을 벌이게 만들 정도로 바울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선교 여행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4절 이하에 보면 바울의 나머지 일행은 그 후에도 제1차 전도여행을 계속 진행해 나갔으며 14장 마지막 절에 이르기까지 원래 계획했던 모든 사역을 완전히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귀환했습니다. 
즉 비록 불미스러운 일로 도중하차한 멤버가 있었지만, 그 선교 여행은 원래 성령께서 계획하신 대로 일사천리로 추진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사람 편의 잘못 하나 때문에 그 행하시는 일에 지장을 받을 만큼 약한 리더가 결코 아니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교 그 자체는 더 없이 고귀하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선교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선교 사역에 참여하는 다른 성도들과 사역자들에게는 분명히 큰 타격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특별히 선교 사역에 사명을 받았다는 사람이 실족할 때 그 여파는 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 교단의 총회 파송 선교사들 중에서도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인 선교 사역 자체가 타격을 입거나 중단된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제 와서는 여러 선교지에 고려신학교 분교들까지 곳곳에 세워져서 원주민과 현지인들이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로 안수를 받아서 그야말로 자기네의 '원어'로 '자국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 최고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선교란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친히 그리고 끝까지 주도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람은 부분적인 실수도 저지르지만 성령께서는 그 모든 것까지 다 합력하여 결국은 선을 이루도록 오묘하게 주장하고 계심을 확신하면서,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피곤치 아니하고 '때가 이르매 거두는' 영광에 이르기까지 이 선한 일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선교 활동은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 개시되었습니다.
'교회'라는 팀을 통하여 성령께서 대표선수를 선발하시고 작전을 지시하셨습니다.
그 선수들은 연봉만 받고 자기 인기만 누리는 스타가 아니라 오직 '영혼 구원'이라는 점수를 내고야 마는 진짜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이었습니다.
때로 선수들의 실책도 있었지만 전체 팀은 결코 흔들림 없이 끝까지 그 '연전연승'의 선전을 지속해 나갔습니다.
성령이라는 훌륭한 감독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향교회를 통하여, '경향선교회'와 '총회선교부'를 통하여 지난 30년 동안 이루어진 일은 그야말로 오직 '성령이 가라사대'로 시작되어 '성령의 보내심'으로 진행되고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난 위대한 '세계선교사' 그 자체였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처음으로 발족된 세계선교운동은 바로 오늘날 이 경향교회에까지 문자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교 사역의 총감독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받은' 경향교회를 통하여 '가든지 보내든지' 쓰임 받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실로 황공스럽게도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부에 '별처럼 높이 빛나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도 계속하여 바로 그 '성령의 가르치심과 보내심과 충만함'을 받아 이 경향교회를 중심으로 어찌하든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이 위대한 선교 사명을 위하여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더욱 충성스럽게 힘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