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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삼상 17: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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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삼상 17:41-49)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무저항 ․ 비폭력입니다.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 악으로 악을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에는 왜 이렇게 전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전쟁을 하게 하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라고 까지 말씀하시지 않느냐. 신약과 구약은 다른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느냐.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이 하나님은 다르시냐.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오신 것이냐. 

우리는 어떤 것을 믿어야 되느냐. 이것은 이 시대에 아주 신학적인 질문이고 제가 거기에 대한 모든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에게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행위에 대하여 다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필요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단계적으로 계시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 똑같은 수학이라도 초등학생을 위한 수학과 대학생을 위한 수학이 같을 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 옛날에 초보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하여 다 계시하실 수도 없었던 것이고 다 계시하실 필요도 없었던 것이고 또 다 계시하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하나님은 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같은 성품과 같은 의도와 같은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계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군대에서도 가장 최근의 명령이 그 이전의 어떤 명령보다도 우선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에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면 가장 최근 것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장 최근이고 가장 최우선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의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장 최근의 계시요 가장 최종적인 계시요 예수님 이후에는 더 이상의 선지자나 더 이상의 계시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알 것은 구약성경은 여러모로 신약성경의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구약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됩니다. 구약에서의 가나안땅은 천국에 대한 모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저 중한 짐을 벗어버렸네’라고 찬송을 부를 때 이스라엘 땅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찬송가가 되는 것입니다. 

또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셨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기업이라 하면 영적인 것이고 또 하늘나라에 속한 것이고 성령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축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과 많은 말씀과 인물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관점에서 구약을 읽을 때에 그 모든 것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성품을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알아야 면장이라도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멸망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정보화시대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바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어야 신앙을 대적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답변을 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지식이 넘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정보가 넘칩니다. 

그런데도 오로지 기독교인들만이 자신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서 은혜라는 명목으로 또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명목으로 공부하려고 하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고 신학적인 깊이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그것을 물리쳤습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이제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91편에 ‘하나님이 천사로 너를 받쳐서 상하지 않게 하리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귀도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당신의 백성을 넘어뜨리려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귀보다도 더 성경을 잘 알아야 되고 성경의 신학적인 안목을 갖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성경을 그릇된 목적으로 왜곡된 목적으로 잘못 이용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차범근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으로 있을 때 한국 팀이 골을 넣으면 감사기도를 드렸지요. 그것을 보고 어떤 지성인이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공격했습니다. 인용한 말씀은 ‘예수님이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느냐.’ 그 성경구절을 인용한 사람이 평소에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한다면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성경구절은 인용한 목적은 자기가 평소에 골방에서 기도하기 때문이 아니고 누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기의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퍼뜨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인기를 얻을까 싫어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갔을 때 누가 대한민국을 욕하고 대한민국을 흉보고 업신여길 때 당연히 우리 마음속에 울분을 느끼고 분노를 느낍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 그러나 왜 누가 기독교 신앙을 욕하고 교회를 흉볼 때 우리는 동일한 울분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까. 왜 누가 신앙에 실족하고 교회를 멀리하고 또 죄를 짓고 또 멀어질 때 왜 우리가 마음속에 염려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마음속에 어떤 번민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내가 예수님 편에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소속감과 충성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믿던 사람이 실족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는 히브리백성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심히 고민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충성이 있고 복음에 대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변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 뿐만이 아니고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 욕하는 사람,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속에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충동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 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고 결국 나의 소속이 불확실한 것입니다. 

소속이 불확실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대한민국을 욕해도 우리가 울분을 느끼는데 왜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욕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까. 

의로운 분노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는 나는 화가 났을 때 설교를 더 잘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 말을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어떻게 화가 났을 때 설교를 더 잘할까.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에 대해서 화가 났기 때문에 나가서 싸운 것입니다. 골리앗이 싸움 돋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champion이라고 했는데 챔피언이라는 말이 원래는 싸움을 돋우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한 게 아니고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에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가 나와서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군대여 너희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너희 중에 한 사람을 보내어 나와 싸우게 하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도전에 응하지 않고 다 두려워하고 다 위축되고 다 숨기 바빴습니다. 유일하게 십대 소년인 다윗이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속에 울분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 할례 없는 자가 누구관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느냐’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과 마찬가지에요. 

골리앗이 물리적인 전쟁을 하기 이전에 심리적으로 이스라엘을 위축시키려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시험하려고 할 때 먼저 우리의 신앙을 위축시키려고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위축시키려고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우리 내면에 의심을 가져다주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축소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방법이에요. 그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시험에 굴복해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믿음이 넘어지고 마음속에 절망하고 이렇게 되면 결국은 마귀가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환란을 당했을 때 욥의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이것은 그 아내의 입을 통하여 마귀가 욥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말대로 욥이 이 환란 중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었다면 욥은 패배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물질적으로 사업적으로 건강적으로만 패배한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패배하는 것이 모든 패배의 근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패배하지 않았어요. 우리도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시험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마음속에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직접 나가서 물맷돌을 던져 이기기 이전에 먼저 자기의 마음의 차원에서 이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골리앗을 내게 넘겨주실 것이다. 

오늘 블레셋 군대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계신 것을 온 땅이 알게 할 것이다.’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믿음으로 하면 믿음대로 됩니다. 믿음이 있기 전에는 움직이면 안됩니다. 두려움에 의해서 움직인다든가 흥분해서 움직인다든가 미움에 의해서 움직인다든가 그러면 패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오직 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무엇을 행할 때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믿음이 있는 것뿐만이 아니고 입으로 그 믿음을 시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두 번째 단계에요.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의 말에 당당히 맞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예절 또 겸손의 명분으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자꾸만 우리를 낮추려고 합니다. 우리를 과소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잘 지내느냐’고 물어보면 ‘죽지 못해서 삽니다.’ 이러고 ‘장사는 잘됩니까.’ 그러면 ‘겨우 먹고 삽니다,’ 그러고. 그게 예절인줄 알아요. 그게 겸손인줄 알아요. 그러다보니까 우리의 입술로 믿음을 부정합니다. 우리의 입술로 두려움을 말하고 우리의 입술로 패배를 말하고 우리의 입술로 의심을 말합니다. 그래서는 믿음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어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물맷돌을 던지기 전에 입으로 그의 믿음을 풀어놓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마음으로 믿지요. 그러나 입으로 그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 오늘 하나님이 너를 나에게 넘겨주어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하여금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리라’ 얼마나 멋있습니까. 다윗은 싸움을 잘해서 영웅이 된 게 아니고 영적인 영웅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다 신앙이 위축되고 다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을 잃어버린 그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이김으로써 하나님이 과연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영웅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가 힘들다고 말합니까. 그 이유는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하는 훈련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면 하소연하는 줄로 압니다. 넋두리 하는 줄로 압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고백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족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우리의 믿음을 입으로 풀어놓음으로써 기도의 문이 열리고 기도할 수 있는 영력이 생기고 영감이 오고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네가 믿느냐.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믿음을 실천으로 옮겨야 됩니다. 그것이 물맷돌입니다. 물맷돌을 던져야죠.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사람은 물맷돌을 던져야 됩니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사람이 그냥 앉아있으면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만을 말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둘 다 함께 역사합니다. 수소와 산소가 합해서 물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사람의 믿음의 실천이 합해서 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고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사람이 자기 할 일을 할 때 약속하신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물맷돌을 던져요. 물맷돌을 던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 물맷돌을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날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유도무기입니다. 인류 최초의 스마트 무기입니다. 사람이 던졌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유도해서 유일하게 노출된 부분이 골리앗의 이마에요. 다윗이 십대 소년이었을 때 이와 같은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어른을 쓰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남자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유대인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성직자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뭐라고 말했느냐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도 버거운데 그러나 다윗은 당당하게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그렇게 됐어요.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블레셋도 블레셋 군대도 ‘와, 하나님이 저 소년과 함께 하는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구나!’ 온 땅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나와 내 집뿐만이 아니고 온 땅이, 내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던 자들마저도 과연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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