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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부모를 즐겁게 (잠 23: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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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즐겁게 (잠 23:15-25)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릅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되새겨보자는 의미겠지요. 어쩌면 가정의 의미를 특별히 가정의 달이라고까지 해서 되새겨야 할 정도로 세상이 변했는가 싶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5월 8일은 어버이날입니다. 어버이날의 유래를 잠시 살펴보면, 지금부터 약 100 여년 전 미국 버지니아주 웹스터 마을에 “안나 자이비스”란 소녀가 어머니와 단란하게 살았었는데, 불행하게도 어느 날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의 장례를 엄숙히 치르고 그 산소 주위에 어머니가 평소 좋아하시던 카네이션 꽃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어머니 생전에 잘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소녀는 어느 모임에 참석하면서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나갔습니다. 보는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소녀는 대답하기를 “어머님이 그리워 어머니 산소에 있는 카네이션과 똑같은 꽃을 달고 나왔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안나는 그 후 어머니를 잘 모시자는 운동을 벌여 1904년에 시애틀에서 어머니날 행사가 처음 개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날에는 어머님이 살아 계신 분은 붉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분은 자기 가슴에 흰 카네이션을 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미국에서는 1913년 이래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고, 점차 전 세계적으로 관습화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에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하였으며, 그 뒤 1972년에 명칭을 어버이날로 바꾸어 국가적인 행사로 삼고 있습니다.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을 통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부모 공경의 미덕이 아름답게 이어져 내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립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림은 물론 그가 회당장이라는 신분으로 볼 때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책잡을까 궁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 그가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렸다고 한다는 것은 그들의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요 따라서 회당장이라는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딸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예수님이라면 자기 딸을 이 죽음에서 건져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께로 나아와 그 발아래 엎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명예보다도 자기 신분보다도 자식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간절히 청합니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는데 같이 집으로 가는 도중 자그마치 열 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고 있던 한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여인과 말씀을 계속하고 계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 비웃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귀여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고 말씀하셨더니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온갖 모욕도 마다하지 않는 아름다운 열정이 이렇듯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모님을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공경해야 되겠습니까? 

이도환 씨가 쓴 글 가운데 “나물 파는 어머니”라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제 어머니는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파셨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매일 시장 귀퉁이로 나가 나물을 팔던 어머니, 그러나 그런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시장 근처를 지나는 일은 고통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지나고 있을 때 다리까지 불편한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초라한 어머니가 싫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도 없이 자라면서, 궁색한 살림과 가난 그리고 초라한 어머니가 너무도 싫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던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다리를 다쳤던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물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제가 이토록 초라하고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길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머니가 절룩거리는 몸으로 학교를 찾아올 때면 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외면했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아버지, 어머니처럼 초라한 삶은 살지 않겠다.’ 

결국 저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의 소원처럼,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자인 아내를 얻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병원도 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헤어진 저는 매달 넉넉한 생활비를 어머니에게 보내는 것으로 아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구질구질한 지난날이 떠오를까봐 어머니를 직접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고향에 있는 모교의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알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간 저를 맞아주시는 것도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뒤에도 선생님은 가끔씩 어머니를 찾아가 안부를 물으셨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조용히 계시던 선생님께서 입을 열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하지만 정이 넘치는 부부가 있었지, 어느 날 그 부부는 포대기에 쌓여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했어. 가난한 부부였지만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그 아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키웠지. 늘 공사장에 나가야 하는 부부는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곤 했단다. 그러다가 일이 터진 거야. 포대기에 쌓여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기 위로 철근더미가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지. 부부는 급한 마음에 아기를 구하겠다고 달려들었어. 결국 남편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내는 다리를 다쳤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전혀 다치지 않았단다…….”
이젠 아무리 울어도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십니다. 그걸 알면서도 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이 글을 들으시면서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이것이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되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잠언 기자는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부모를 즐겁게 해드립니까?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립니까?
아직까지 우레 동네도 그렇지만 닷 새 만에 장이 서고는 했습니다. 장날이 되면 아들은 그 동안에 해서 모은 나무 단을 지게에 잔뜩 지고서 아침 일찍 장에 나가서 그것을 팝니다. 저녁이 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밥상을 준비해 놓고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데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서 가만히 집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동구 밖까지 나가서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드디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서 마을로 되돌아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애틋한 심정이 되어서 좀 더 멀리, 좀 더 자세하게 보기 위해서 동구 밖에 서있는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그 모습을 한자에서는 어버이 친(親)자로 묘사를 했습니다. 어버이 친자를 어떻게 씁니까? 설 립(立)자 밑에 나무 목(木)자, 그리고 오른쪽에 볼 견(見)자를 씁니다. 나무 위에 올라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바라보는 그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이 바로 어버이 친(親)자입니다. 

한편 아들은 준비해 간 나무를 시장에서 모두 팔고서 그 돈을 가지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반찬도 사고 또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고 동구 밖까지 나와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들은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어머님!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다리도 불편하실 텐데, 집에 가만히 계시지 않고요!”
그러면서 아들은 등에 지고 있는 지게를 내려놓습니다. 
“어머님! 어서 이 위에 올라앉으세요. 제가 어머님을 업어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한자에서는 효도 효(孝)자로 표시를 했습니다. 효도 효자는 어떻게 씁니까? 늙을 노(老)자 밑에 아들 자(子)자가 있습니다. 아들이 연로하신 어머님을 등에 업고 가는 모습이 효도 효(孝)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와 같은 친(親)이 있고, 효(孝)가 있는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이 기록한 잠언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부모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글학자이셨던 고 양주동 박사가 지은 “노래 중의 노래”라고 불리는 곡이 있습니다. 그 곡의 제목은 “어머니 마음”입니다. 

작사 : 양주동 / 작곡 : 이흥렬
1.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 없어라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코끝이 찡하는 이유는 부모님의 사랑이 우리 가슴속에 와 닫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모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버이 은혜를 생각하면 한마디로 “다 베풀어주신 사랑”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 위해 다 포기하시며 베푸셨던 그 사랑이 느껴져야 비로소 효도를 할 수 있는 기초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알려면 자신이 부모가 되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 사랑을 다 깨달으려면 내가 부모님의 그 나이가 되어 보아야 압니다. 그러나 그때 "이제는 효도 해야겠다"고 느낄 때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치 않는 것이 부모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은 내가 알고 받을 때 보다, 모르고 받을 때가 더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큰사랑은 4살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핏덩이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고 그 많은 고생을 하면서 애지중지 키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4살 전의 일은 까맣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갓난아이 때에 우유를 먹었습니까? 젖을 먹었습니까? 만일에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4살까지 우유나 젖을 먹은 사람입니다. 

그 소중한 사랑은 다 모릅니다.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먹였다더라, 이 분이 나를 키우셨다더라. 이것은 믿음으로 알게 되어 있지 결코 피부로 알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소중한 사랑은 나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엄청난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내가 지금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효자가 됩니다. 알고 받은 사랑만 사랑이라고 생각지 마세요. 착각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마셔야 합니다.

아르메니아 대지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려 스물여섯 살의 스잔나 페트로시안과 네 살 된 딸 가야니가 건물 벽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모녀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의 공포 뿐, 아이는 갈증과 굶주림에 지쳐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스잔나는 유리조각으로 손가락을 찔러 딸에게 자신의 피를 먹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보챌 때마다 차례차례 손가락을 베어 아기의 입에 물렸습니다. 이들 모녀는 매몰된 지 14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됐는데 어머니 스잔나의 손가락 열개는 모두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가족을 위해 1년 평균 7200개의 그릇을 닦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물이나 산소 같아서 우리가 그것의 고마움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가 부모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쯤, 그분들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나버립니다. 그분들이 떠난 후에 땅을 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님 살아계신 동안 부모를 공경하는 지혜로운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부모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그분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야 합니다.
효도란 다름 아닌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부모의 마음이 즐거울까요? 용돈 몇 푼 드리고 효도관광 한번 시켜드렸다고 부모님의 마음이 즐거울까요? 
오늘 본문 15~16은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고 말씀하며 또한 24절은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곧 자녀가 지혜의 사람이 될 때 부모님의 마음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어리석은 자식을 낳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아이를 낳을 때는 한결같이 지혜로운 자식을 낳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들이 태교에 얼마나 신경을 씁니까?
지혜가 제일인데 어디에서 지혜를 얻습니까?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러분이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녀로 하여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녀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말씀하는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을 말씀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를 둔 아버지는 참으로 즐겁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즐거움은 자식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을 중심하여 옳게 사십시오.

계속해서 우리를 낳아 주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왜요?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모두 다 위대한 분들입니다. 성경은 그분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일본 어느 대학에 외아들 대학생이 있었는데 효자로 소문이 난 청년입니다. 한 번은 방학이 되어 집에 가는데 친구 하나가 따라갔습니다. 어떻게 효도하나 살피러 따라갔는데 실망을 했습니다. 인사를 하고나서는 옷을 훌훌 벗고 목욕을 하는데 연세 많으신 홀어머니에게 자꾸 심부름을 시키더랍니다. “어머니, 비누 좀 갖다 주세요.” 또 조금 있다 “어머니, 수건 좀 주세요.”, “어머니, 냉수 좀 주세요.” 그래서 목욕을 다 한 다음에 “나는 자네가 효자라고 해서 어떻게 행동하나 살펴보러 왔는데 실망했네. 

자네가 직접 할 수 있는데 홀어머니를 심부름만 시키는 게 어디 있나?” 그랬더니, 그 친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물론 내가 내 손으로 갖다 쓸 수 있어. 그렇지만 어머니는 내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을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셔.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걸세.” 하는 설명을 듣고 과연 효자이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식을 기쁘게 하고 자식을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의 3분의 1만 생각한다면 아마도 다 효자, 효녀가 될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앞서야 되겠지요. 

가렵기는 왼쪽 다리가 가려운데 긁기는 오른 쪽 다리를 자꾸 긁어주듯이, 부모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참된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형식으로 겉치레 효도보다 중심의 뜻을 헤아려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참 효도라고 봅니다. 
아울러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려면 공경심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께 무시하는 태도나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불효막심한 자식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부모를 구타하고 부모를 죽이는 자식까지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마땅히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자식들한테 존경을 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남에게 존경받는 것보다 더 흐뭇하고 기쁜 일입니다. 부모가 허물과 실수가 있어도, 공부를 많이 못했어도, 자식을 공부 많이 못시켰어도, 그래도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한데 아무리 대단한 부모라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초라해지고 그에 따라 많이 외로움을 탑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노인들보면 누구든 말벗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과 자주 대화를 나누도록 하십시오. 

이사야 1장 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죄인일지라도 할 수 있는 대로 속사정 다 털어놓고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의논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건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요즘 자녀들은 너무 바빠서 또는 너무 똑똑하다 보니 부모님과 대화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대화를 한다고 해도 서로 자기주장만 하죠. 그러니 거기서 무슨 감사가 있겠고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자식들은 부모의 은혜에 감사를 표시하고 칭찬해 드려야 부모의 마음이 기쁜 법입니다. 우리는 흔히 뭐 새삼스럽게 감사하고 칭찬하랴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은혜을 감사하고 부모의 수고를 칭찬해 드릴 때 부모님은 대단히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것도 쉬운 말로 하나님을 칭찬해 드리고 기쁘게 해드리고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물질이 가야 마음도 가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 산소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름답게 단장된 산소처럼이나 저들이 부모가 살아계실 때 정말로 효도를 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봅니다. 혹시 자기의 체면을 세우기 위하여 하는 것은 아닐까요?
돌아가신 다음에 제 체면을 위해서 소를 잡아 제사 드리는 것보다 살아 계실 때 생선 하나, 닭 한 마리 잡아 대접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어려우면 또 이해가 되지만 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부모 위해 쓰는 것은 어찌 그리 인색한지 모릅니다. 

어머니의 산고를 기억하십니까? 어머니는 죽을힘을 다하여 우리를 낳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한들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됩시다. 부모를 즐겁게,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효자 효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텍사스의 한 사내가 아내와 네 자녀를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30년 동안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돈 한푼 없이 죽었는데, 자기의 시체를 고향 텍사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텍사스에 살고 있던 자식들은 모두 그 소식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무슨 상관 있어? 그가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해준 게 뭔데? 그 사람 때문에 어머니와 우리 모두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왜 우리가 그 시체에 수고와 돈을 들여야 하지?”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큰아들은 아무 말 없이 동생들의 불평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캘리포니아로 가서 아버지의 시체를 운구해오기 위해 자기 트랙터와 농기계들을 저당잡혔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큰아들은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씌어 있을 뿐, 어떤 부모라는 말은 없단다.”
어리석은 것이 인생이라고 모든 것이 다 지나고 난 다음에야 아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지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런 효를 다해야 할 줄 압니다. 때가 지났는데 어떻게 하냐고요? 이웃의 노인들을 내 부모처럼 생각하며 섬기면 됩니다. 우리 가까이에 이런 따사한 손길이 필요한 분이 어디 계신지 살피십시오. 그리고 섬기십시오.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할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의 체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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