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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이새의 아들, 다윗 (삼상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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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의 아들, 다윗 (삼상 22:1-5)


어린이가 없는 세상, 상상이 가십니까? 그 어린이가 제대로 된 재목(材木)으로 커가는 과정에는 많은 이들의 후원과 뒷받침, 즉 밑거름이 요구됩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도 없고, 땅에서 갑자기 솟은 사람도 없다. 누군가의 돌봄과 사랑과 헌신이 있기에 오늘의 그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그 특징이 모방입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벤치마킹(bench-marking)하면서 독립된 한 인격을 다듬어 갑니다. 어린이가 누구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을까요? 중앙 SUNDAY가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응답자의 60%가 가족, 혹은 친지라고 답하였습니다. 가족 중에서도 부모라고 답한 자들이 무려 40%를 차지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높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얼굴입니다. 부모노릇을 잘 하는 것, 부모들의 한결같은 숙제입니다.

본문에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다윗과 그의 부모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행적을 유심히 살피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을 이름 그대로 다윗이라 부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다윗을 가리켜 ‘이새의 아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삼상 20:27,30,31/22:7,8,9,13). 왜 좋은 이름을 두고 굳이 ‘이새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울은 그냥 사울이고, 솔로몬은 그냥 솔로몬인데, 왜 유독 다윗만은 ‘이새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다윗의 오늘이 있기까지 아버지가 그에게 미친 영향이 남다릅니다.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겠지만 이새는 특별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의 깊게 살펴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칭 속에 담긴 뉘앙스(nuance)의 변화입니다. ‘이새의 아들’이란 호칭은 경멸과 멸시, 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그와 아버지를 무시하는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호칭도 그러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 13:55).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이새의 아들’이란 호칭이 어떤 뉘앙스로 바뀝니까?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삼하 23:1).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 13:22). 이제 이 호칭에는 무한한 존경과 부러움, 한없는 영광과 명예가 담겨 있습니다. 도대체 이새는 자녀교육을 어떻게 하였을까요?

다윗이 아둘람 굴에까지 숨어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곳으로 달려와 함께하며 힘이 되어준 자들이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 사람들이었습니다(삼상 22:1). 거기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낀 다윗은 요단강을 건너 동쪽 모압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는 절대 권력자 왕에게 쫓겨 다니는 현상금이 걸린 사나이였습니다. 모압 왕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다윗이 이렇게 제의합니다.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삼상 22:3-4).

부모는 아들의 안위를 위해서 기꺼이 인질이 됩니다. 이같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던진 부모의 희생이 있었기에 다윗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이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니, 이새보다 더 희생하고, 뒷바라지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던지는 부모들도 부지기수(不知其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자식들이 한결같이 다윗과 같은 인물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딜레마(dilemma)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성경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다윗의 부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다음과 같은 글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시 22: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여기에 ‘버렸으나’란 단어는 ‘부모가 나를 버릴지라도’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번역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살핀 대로 그 부모가 그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의역(意譯)하면 이런 뜻입니다. ‘혹시 부모가 나를 버릴지라도 여호와는 나를 맞아주실 것이다. 부모가 나를 도와줄지라도 그것이 어찌 여호와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것만큼이야 하겠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새는 아들 다윗을 선물로 받았을 때부터 그 아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맡겼듯이 말입니다(삼상 2장). 이제 왜 시편에서 다윗이 부모를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하늘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고백으로 시편 전체를 가득 채웁니다.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사랑하는지, 의지하는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사랑하는 여러분!
이새야말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친’(잠 22:6)위대한 아버지였습니다. 이런 자세로 자녀를 키운 이새를 하나님은 귀중히 보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름 앞에 항상 ‘이새’라는 이름이 언급되도록 하셨습니다. 심지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도 다윗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새라는 이름을 사용하십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이새, 목축업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들을 잘 키웠더니 그 아들 때문에 그 이름이 길이길이 빛나지 않습니까!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그를 맡기고,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자녀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다윗 같은 인물로 키워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인 우리 이름까지도 빛나게 해 주실 줄 확신합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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