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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행 18: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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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행 18:1-17)   
 
  
오늘 본문은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가서 전도하며 교회를 세우고 목회하게 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덴에서 서쪽으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개방적인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상업의 요충지였으며 동서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왕래하며 돈이 넘치는 도시였기에 문제도 많았습니다.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린도 사람처럼 산다.”는 말은 곧 “부도덕하게 산다.”는 뜻이었습니다. 

고린도에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고 거기에는 많은 성전창녀들이 있었으며 고린도는 그 신전의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도시였습니다. 냉소적인 이성과 철학의 중심지 아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던 바울이 이제는 타락한 사랑의 도시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는 로마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고 있어서 그리스에서 가장 로마적인 도시였으며 거기에 또한 돈 버는 데 능한 유대인들이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하던 대로 고린도에서도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을 상대로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합니다. 고린도에서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의 핵심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본문 5절)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나 그러했듯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바울의 전도는 유대인들의 적대와 비방에 부딪쳤습니다(본문 6절).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끌려가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본문 12절). 그러나 유대인 중에도 믿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보라 하는 회당장과 그의 온 집안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가 고린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많은 고린도 사람이 그가 전하는 말을 듣고 믿었으며 세례를 받았습니다(본문 8절). 

고린도에서의 사도 바울의 전도활동 속에서도 우리는 그와 함께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5-6절에서 보듯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대적하며 비방하자 바울은 그들을 향해 옷을 털었습니다. 옷을 턴다는 것은 단절, 절연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옷을 털며 말하기를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했을 만큼 유대인들의 대적과 비방에 부딪쳐 실망하고 낙담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고 썼습니다. 이것은 그때 바울의 심리상태를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김없이 나타나셔서 용기를 주시며 격려하셨습니다. 본문 9-10절을 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확실하게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힘입어 일 년 육 개월이라는 예외적으로 긴 기간 고린도에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본문 11절). 

하나님께서는 환상 가운데 말씀으로만 힘을 주신 것 아닙니다. 사람을 통해 실제적인 도움을 보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 귀한 동역자들이 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부부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 중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브리스길라라고 쓰고 있는 부인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브리스가라고 불렀습니다(롬16:3, 고전16:19, 딤후4:19). 

브리스가는 공식적인 이름이고 브리스길라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부르는 애칭이었습니다. 이 부부의 이름은 언제나 나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결코 따로 따로 언급되는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아내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곤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 바로 다음 절인 행18:18에 봐도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합니다. 

조금 더 내려가서 26절에도 보면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합니다. 롬16:3에서도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하며, 딤후4:19에서도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합니다. 그런데 부인의 이름이 남편의 이름보다 먼저 언급된다는 것은 주후 1세기 때의 관행으로서는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이것은 그 부부가 다 바울의 동역자로서 귀한 사람들이었지만 특히 브리스길라가 신자들 사이에서 매우 두드러진 인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보내시며 거기에 자색 옷감 장사였던 루디아라는 여자를 그의 큰 협력자로 세워주신 하나님께서 고린도에서는 또 브리스길라와 그의 남편을 바울의 동역자로 예비해놓으셨던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고린도에 오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바울과는 같은 유대인, 그것도 모두 외지에서 태어난 유대인이고 같은 그리스도인이며 또 천막을 만드는 같은 직업까지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누구보다도 바울과 마음이 잘 통할 수 있는 동역자였으리라 여겨집니다. 

아굴라는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 했습니다. 본도는 오늘날 터어키의 북부 지방으로 흑해의 남쪽 연안을 따라 길게 펼쳐진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바울을 만난 것은 그들이 로마에서 살다가 고린도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고린도로 온 이유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라는 로마의 역사가는 그의 책 <글라우디오의 생애>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부추긴 폭동 때문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바울 이전에 이미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 가운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으며 아굴라 부부도 로마에 있을 때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 기독교신자들이 그 배후로 지목된 폭동과 그로 인한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이 없었더라면 아굴라 부부는 그대로 로마에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이 고린도로 이주하게 된 아굴라 부부를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동역자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인 일을 하는 로마 황제의 행위까지도 절묘하게 당신의 복음전도에 이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목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고린도에서도 바울과 함께 역사하셨습니다. 아니 계속하시는 당신 자신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바울을 비롯한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의지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맞서는 모든 세력과 그 방해공작까지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데 역이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권능을 확인하게 됩니다. 밤에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 하신 말씀이 조금도 빈말이 아님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붙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 하신 말씀은 바울이 그 어떤 반대에도 부딪치지 않으리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반대는 끊임없이 일어나겠지만 그 어떤 반대도 그를 꺾지 못할 것이며 그 무엇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해칠 수 없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여실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뒷부분 즉 12-17절이 전하는 일입니다. 

다시 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여 그를 총독의 법정으로 끌고가 고발했지만(본문 12-13절) 총독 갈리오는 아예 재판을 거부하며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본문 14-16절). 바울은 스스로를 변호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총독이 소 자체를 기각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전도는 주님께서 이미 이겨놓으신 싸움을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워서 침묵할 필요가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담대하게 입을 열어 말해야 할 싸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새문안 새 생명 운동>을 펼치며 전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무작정 교세를 늘리기 위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쉬지 않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시고 우리를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벌써 지치고 이 운동을 빨리 그만두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는 줄 압니다. <태신자 작정>이니 <잃은 양, 숨은 양 찾기>니 하는 말만 나와도 짜증내며 <새문안 새 생명 운동>을 <나 죽이는 운동>이라고 여기는 분들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 구원의 복된 소식을 증언하는 전도는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일을 원하지 않는 교회는 죽어갈 교회이며 그 일을 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있을 수 없습니다. 처음 하는 <새문안 새 생명 운동>이기에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생활에 그 일까지 하려고 귀찮고 피곤할 것입니다. 전도 받는 사람들의 냉소와 반발과 무관심 때문에 두렵기도 하고 낙심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마땅한 일로 믿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 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놓인 싸움은 주님께서 이미 이겨놓으신 세상과의 싸움입니다.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싸우라 하신 주님이십니다. 질 싸움을 싸우라 하시는 주님이 아니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귀한 동역자들과 적합한 협력자 들을 예비하셨던 것처럼 주의 일에 힘쓰는 우리에게도 그런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친히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목도하며 기쁨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새문안의 모든 교우들 되시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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