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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무리 인생의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도! (시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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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인생의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도! (시 3:1-8) 
 

1.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들

신학대학원 3학년, 여름이 다가오는 어느 봄날, 지금의 제 아내를 학교 아래 부산 송도 해변으로 불러 데이트를 했습니다. 봄 바다가 정말 매혹적이었습니다만 그렇다고 뛰어들 수는 없고, 대신 배를 빌려 노를 저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까지 제가 한 번도 노를 저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그 날 빌린 배가 앉아서 양팔로 노를 젓는 배라고 해도 노를 젓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이런 사실을 숨긴 채 노를 저었습니다만, 그게 뜻대로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도 그럭저럭 조금 깊은 곳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배가 먼 바다 쪽을 향해 직선으로 놓이지 않고 해변과 나란히 놓이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제법 큰 파도가 밀려와서 뱃전을 때렸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큰 파도가 뱃전을 그대로 때리니까 배가 크게 기우뚱거리면서 거의 뒤집힐 것 뻔 했습니다! 그때 제 아내가 놀라 크게 소리를 질렀고, 저 역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물론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정말 당황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황한 마음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제 눈에는 또 다시 밀려오는 큰 파도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뭍을 향해 노를 저었고 그 파도는 배의 뒤를 때려 더 빨리 뭍으로 가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최근까지 저는 노 젓는 배를 타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경험한 후, 저는 상식적이지만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도 크고 작은 파도들이 쉴 새 없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문제라는 파도,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파도, 자녀라는 파도, 건강이라는 파도, 물질이라는 파도, 또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나 사고들은요! 여러분, 이런 파도들을 만났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또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20몇 년 전 저의 경우에는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겁을 집어먹고 배를 뭍으로 돌려서 내려 버리면 그만입니다만,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나’라는 배를 포기하거나 ‘가정’이라는 배를 포기하거나 ‘자식’이라는 배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파도를 만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고백을 통해 인생의 바다에서 엄청난 파도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삶의 파도를 바라본 다윗의 시각 

1) 쓰나미 같은 인생 파도를 만났지만 …!

오늘 본문과 뒤이어지는 시편 4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하여 逃避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그때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본문이 사무엘하 15장인데요. 거기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고 또 위험했는지, 그리고 다윗 개인적으로나 집안이나 국가적으로도 볼 때 얼마나 수치스러운 상황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자, 다윗은 다급한 나머지 머리는 묶지 못해 散髮이었고, 신발을 신지 못한 채 벗은 발이었으며,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황급하게 예루살렘을 빠져 나와 요단강 쪽으로 향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요단강까지 거리는 약 40km(직선거리로 20km) 정도로, 하루를 꼬빡 걸어가야 하는 가파른 산악길인데, 그렇게 요단강에 도착한 다윗은 밤이 깊어 강을 건너지는 못하고, 어느 동굴에 피신하여 밤을 보냈습니다(삼하17:19).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동굴에서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꾸미는 짓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막상 반란이 일어나고 보니, 상당수의 民心이 자신으로부터 떠나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가장 총애하며 친하게 지낸 친구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신하들이 자신을 배신하여 압살롬 편에 선 것이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이 자신을 배반한 것이야 말로 數千數萬의 사람들이 자신의 대적이 된 것보다 더 많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사태가 압살롬 쪽으로 기울자 다윗을 대적하는 편에 서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한 이유는 이제 다윗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공연하게 ‘다윗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외치면서 다녔습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때 그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본문 1,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 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성도 여러분, 다윗이 당한 상황이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친구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과 함께 “영원한 나라”를 꿈꾸던 백성들이 돌아섰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피난길을 맨 발로 울면서 떠나는 다윗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사람들이 다윗을 향해 저주하면서 퍼붓는 말이 사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본인도 “정말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리셨단 말인가?” 하고 의심이 들 만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 이 사건은 오래 전부터 謀議되고 準備되어 온 일이었습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4년 동안 치밀한 작업을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아버지 다윗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는 일이었습니다(삼하15:6). 왕과 왕이 세운 재판관들이 옳지 않고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기 때문에, 자기에게로 와서 재판을 받으면 옳고 만족할만한 판결을 내려줄 것이라면서 온갖 甘言利說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꺾기 위해서는 반드시 포섭하거나 제거해야 하는 다윗의 젊었을 때부터의 동지들인 신하들을 한 사람 한 사람 포섭했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巨事를 벌인 것이죠.

➊ 그런데, 이 일은 단순하게 이 사건 하나만으로 볼 일은 아닙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묵고 묵은 것들이 곪아터진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반란의 主犯인 압살롬의 누이동생 <다말 사건>에 그 뿌리가 닿아 있습니다(삼하13).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 다른 누이동생인 다말을 얼마나 사모했든지 상사병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암논은 병으로 假裝하여 드러누웠고, 그때 자신을 병문안 온 아버지 다윗에게 여동생 다말의 간호를 부탁했습니다. 

어머니가 다르긴 해도 오빠가 아프다는데, 그리고 자신이 와서 간호해 주면 좋겠다는데, 다말이 어떻게 가만있겠습니까? 그래서 다말이 암논을 간호를 하러 갔는데,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놓고 자기 방에 혼자 있던 암논은 다말을 힘으로 제압하여 겁탈해버렸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지요. 충동적인 욕망으로 다말을 범했던 암논은 겁탈한 후에 곧바로 다말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자신의 여동생이 당한 일을 알게 되었고, 그는 정말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 다윗이 이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조처도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더 불만을 품은 압살롬은 스스로 이 일을 해결하고자 하여 형 암논을 죽인 후에,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아람 나라인 ‘그술’로 도망하여 거기서 3년을 지냈습니다. 압살롬의 분명한 잘못에 대해 다윗은 그때도 一言半句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년 만에 다윗은 암논의 경우처럼 어떤 책망이나 조처도 없이 압살롬을 복권시켜 왕자의 위치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한 번 아버지로부터 떠난 압살롬의 마음은 점점 더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음모를 꾸민 것이죠. 아버지에 대한 불신과 원망, 그리고 다윗의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왕자들 간에 후계구도가 어지럽게 되자, 결국 압살롬이 먼저 나서서 아버지를 축출하고 왕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➋ 그런데요, 여러분! 이 압살롬의 반란 사건에는 이보다 더 오래 된 문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밧세바와 우리아 사건>입니다. 사무엘하 12장 10절에서부터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르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의롭고 충성된 신하인 우리아를 죽인 일로 인하여 다윗의 집에 살육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다윗의 부인이 공공연하게 강간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자신의 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다윗도 압살롬의 반란을 이런 의미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압살롬의 반역이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일어났고, 사태가 얼마나 긴박했든지, 그렇게 황급하게 궁을 빠져 나와 도피했습니다만, 그런 중에도 다윗은 압살롬을 원망하는 말 한 마디, 배신한 신하들을 비난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즉, 다윗은 ‘다 내 탓이다, 내 죄로 인한 것이다, 내 不德과 罪惡의 열매이다’라고 그 일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다윗은 자기 인생의 이 지독한 파도를 만난 것이 다 자신의 罪業이라고 여긴 것일까요? 

아무리 원망하고 저주해봐야 다 아들 문제고 부하들 문제이니 결국 그 화살은 자신을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다윗은 자신에게 밀어닥친 이 엄청난 파도를 단순히 ‘다 내 탓이다, 내 죄로 인한 것이다, 내 부덕과 죄악의 열매이다’라고 받아들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삶에 밀어닥친 해일과도 같은 파도를 바라본 다른 시각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무엇일까요?

2) “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 가운데 있다!”

본문 3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 이다.” 다윗은 대적들의 저주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방패가 되어 자기의 前後左右를 지켜주신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 자신에게 영광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아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의 머리를 다시 들어주실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함께 지은 시편 4편에 보면,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 곤경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을 도와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모든 곤경 속에서 사람의 구원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4절,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 도다, 셀라!”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여 울부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산에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그의 마음과 태도를 바꾸어놓았습니다. 5절, 6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千萬人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어제까지는 정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얻은 확신은 그 상황에서도 그로 하여금 편안히 잠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무사하게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을 보고서, ‘이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이 깊은 어둠도 사라지게 하시고 밝은 날을 주실 것이다’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 주시기에,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날이 올 것이기에, 다윗은 평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다윗은 4편 7절 8절에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농부들이 땀 흘려 가꾼 곡식을 거두는 추수의 기쁨은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며, 그 해 거둔 포도로 포도주를 담가서 새 포도주를 마시는 기쁨은 정말 특별하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특별한 기쁨을 다윗은 그 지독한 상황, 작은 동굴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인생의 파도를 만난 다윗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그 상황에서 다윗이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은 엄청난 인생의 파도 그 자체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패륜적인 아들 압살롬이나 배신한 부하들을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동굴에 피신해 숨죽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운 삶이나 죄를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릴 적 자기를 부르셔서 왕으로 기름 부어 그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또 아들 솔로몬을 통하여 그 나라를 이어가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 그리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바로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본문 7절, 8절에서 더 큰 확신으로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그가 이렇게 간구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사, 인간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다윗의 모습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주권과, 그 누구도 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보호막 속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프랑스 파리에 한 천재적인 조각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가난해서 난방장치 하나 없는 아주 초라한 다락방에서 살면서 작품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아주 많은 시간의 작업 끝에 드디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작품이 완성된 그 날 밤,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웠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더 추웠습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어갔던 작가는 그 추위 때문에 작품이 얼거나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해서 잠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해결책을 찾아보았으나 별달리 뾰쪽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과 모포로 그 조각 작품을 잘 덮고는 자기는 추위에 떨며 그냥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튿날, 그 가난한 예술가는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그 조각 작품은 무사히 보존되어 지금 파리의 한 유명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작가가 자기가 만든 작품을 자기 목숨보다 아낀 것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傑作品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의 피로 사신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얼마나 애착을 갖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느 작가, 여느 조각가 이상으로 당신의 작품인 여러분 한 분 한 분에 대하여 목숨보다 더한 애정을 갖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食人種들에게 선교하셨던 분들 중에 ‘아셀트’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선교 초기, 식인종들은 밤만 되면 아셀트의 집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먹음직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선교사의 집을 갈 때마다 대문 앞에서 창칼을 들고서 선교사의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낮에는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밤만 되면 어김없이 창칼을 들고 선교사의 집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그냥 가고, 또 그 다음 번에도 왔다가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서로 안면이 튼 가운데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낮에는 아무도 없는데, 밤만 되면 누군가가 칼과 창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냐?” 식인종들의 물음에 아셀트 선교사는 처음 듣는 얘기인지라 놀라면서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그러자 식인종들은 “거짓말 마라. 한두 번이 아니고 우리가 너를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는데도 그때마다 창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있어서 무서워서 너한테 올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아셀트 선교사는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을 용서하옵소서.” 

여러분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여러분의 삶에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고, 평생의 동지들이 자신을 배반하여 원수가 된 상황이며, 몇몇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상당수의 백성들이 자신으로부터 돌아서 버린 쓰나미같은 인생의 파도를 만났지만, 다윗은 그 파도에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지난 세월, 자기편이 되어 사나운 맹수들과 싸울 때 양떼와 자신을 지켜 주신 하나님, 거인 골리앗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 그리고 맹수보다 더 사납게 달려드는 대적들을 이기게 하셨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택하시고, 주님이 주신 나라를 견고히 하실 것이라 하셨으며, 솔로몬에게 그 위를 이어줄 것이고, 그래서 그 나라는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에 담긴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도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무리 집채 같고 태산 같은 인생의 파도라 할지라도 결코 자신을 삼킬 수 없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다윗의 확신이 오늘 여러분이 가져야 할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3. 인생의 파도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사랑! 

말씀을 맺겠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인생의 파도는 누구에게나 쉴 새 없이 밀려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 공감하시죠? 아마 여러분에게도 예상했거나 혹은 예상치 못했던 인생의 파도들이 지나갔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지금 인생의 파도를 만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도 파도를 만나게 되겠지요. 이런 인생의 파도에 대해 오늘 하나님께서 다윗의 입을 빌려 말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들을 주시기까지 여러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여러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그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온 우주와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중심에 여러분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여러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통치에 중심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파도가 여러분을 삼킬 수 없습니다. 세상사와 인생사가 여러분을 실패케 하고 어둠속으로 밀어 넣을 수 없습니다. 확신을 가지십시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노래하십시오! 그러면 다윗처럼 회복되어 모든 것을 되찾고 새롭게 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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