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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아름다운 가정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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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가정 (창 2:18-25)
  

한국인들은 5월을 가정의 달로 지킵니다. 5월 5일은 ‘어린이 날’이고, 5월 8일은 ‘어버이 날’입니다. 그리고 매년 5월 셋째 주 월요일을 ‘성년의 날’이고, 얼마 전부터는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지킵니다. 부부의 날은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담아서 21일로 정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5월에 가정과 관련한 기념일들이 모여 있어서 이 달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릅니다. 일 년 중 한 달을 가정의 달로 정해서 가정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가정이 위기를 맞이한 시대에 매우 지혜로운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이는 가정은 우리 각 사람에게 사랑의 보금자리일 뿐 아니라, 이 사회와 국가를 이루고 있는 세포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개인의 삶도 파탄을 맞이할 수밖에 없고, 국가와 사회도 존속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가정이 견실하면 개인의 삶도 행복하고 국가와 사회도 건강하게 됩니다. 그러나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하고 온 국민이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의 위기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9년도 한국인의 이혼 건수가 12만 4천 건으로 이는 2008년에 비해 7천5백건(6.4%) 증가한 수치입니다. 

경찰청 자료에 의하면, 2008년도 가출 청소년 발생건수는 1만 5,337건으로, 2007년의 1만 2,240건보다 3,097건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재 가출 청소년의 수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같은 통계치는 오늘날 위기를 만난 가정이 그만큼 많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물론, 가족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피치 못할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일에 바빠서 가정을 돌볼 심적, 시간적인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의 영향이 강해서 가족보다는 개인을 우선시하다 보니 부모 세대에 비해서 가족 결집력이 약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람들이 가정의 신성함을 인정하지 않게 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신성한 영역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신이나 부모나 스승과 같은 존재는 신성한 존재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에 대한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예배를 드렸고, 부모나 스승의 권위를 엄격하게 인정했습니다. 특히, 대가족 사회에서 노인들의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가까워올수록 신성함의 영역에 속했던 것들이 점차 힘을 잃고 세속화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즘 사람들은 신에 대한 경외심을 찾아보기 어렵고, 부모나 스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얕잡아 보는 풍조가 팽배해 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속화의 분위기는 결혼관에도 영향을 미쳐서 사람들은 결혼의 신성함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가정의 신성함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의 필요에 따라서 쉽게 가정을 버리는 현실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든든히 서지 못하면 그 누구도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그 무엇을 가지고도 가정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정다운 가정,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시간 창세기 2장에 기록된 본문을 통해서 그 방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 째로, 가정의 신성함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가정이 신성한 이유는, 가정은 사람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시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기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봉독한 창세기 2장 말씀이 이 사실을 증언해 줍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새들과 물고기들과 짐승들을 창조하시고 나서 맨 나중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그 최초의 사람이 바로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상 낙원인 에덴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아담은 각종 새와 들짐승과 같은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에덴동산은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곳이며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있어서 원하는 대로 맛난 실과를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강이 에덴동산에서 발원해서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강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에덴동산을 다스렸습니다. 오늘날 지구는 공해와 인간들의 무차별 개발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마실 물도 숨 쉬는 공기도 먹는 식물도 오염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매년 변함없이 계절의 순환을 통해서 지면에 초목이 자라게 하셔서 인간들이 파괴한 생태계를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 창조하신 태초의 지구 환경은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웠을까요? 더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창설하신 에덴의 풍요와 아름다움은 필설로 다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단 하루 만이라도 에덴에서 지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니 아담은 에덴에서 살면서도 어딘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2장 18절에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무인고도에 홀로 떨어져 살 수 없고 사람들과 더불어 인간관계는 가지면서 살아갑니다. 교도소 생활을 하는 죄수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교도소에도 사람들이 있지만 진심으로 마음과 마음을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교도소에 갇힌 죄수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근원적인 외로움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격을 가진 존재는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에덴동산에 동식물들이 많았지만, 그것들은 아담이 사랑을 나눌 인격적인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짓기로 하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셔서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인류 최초의 여자, 아담의 신부가 창조되었습니다. 그 때 아담은 하와를 보고서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결혼식의 주례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4)…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 19:)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짝지어 주신 이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어느 가정이든지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가정이 신성한 이유, 혼인이 신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혼인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혼인 제도를 두 사람이 인정한 것과 같으므로 함부로 혼인 관계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사람들이 결혼 서약을 휴지처럼 쉽게 파기하는 것은 저들이 가정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가정은 신성한 성격을 상실하고 개인의 이해타산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하찮은 세속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가정은 결국 인간의 독단과 횡포에 의해 찢기고 상처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가정의 신성함을 지켜나감으로 가정다운 가정을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두 번 째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돕는 배필의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지으시되 아담을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 받고 그 후에 하와가 지음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와가 아담을 돕는 배필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하와만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지, 아담은 하와에게 돕는 배필이 아니라는 것을 못 박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나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신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대로, 독신의 삶은 고독하기 때문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면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든지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에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아담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면 완고한 가장이 되어 아내의 의견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할 수 없으니 함께 살아도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두 사람의 지혜를 합한 것보다는 못합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듯이, 남편이 혼자 무엇을 하는 것보다는 아내와 함께 힘을 합해서 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에게 없는 섬세한 감성과 감각과 재능이 여자에게 있고, 여자에게 부족한 결단력과 체력과 통찰력과 같은 것을 남자에게 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으며 둘이 하나가 되어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녀를 생산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야 가능한 것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 혼자서 자식을 낳을 수 없고, 아내 혼자서 자식을 낳을 수도 없습니다. 남편의 씨를 아내가 열 달 동안 뱃속에서 길러야 아기가 태어납니다. 자식의 생산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는 배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부부는 서로를 인정함으로써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지만, 그 중에서도 배우자의 인정을 가장 받고 싶어 합니다. 밖에 나가서는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도 집에 들어와서 아내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밖에 나가서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해도 집에서 아내가 인정해 주면 얼마든지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 된 사람은 적극적으로 남편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이는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인정해 주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가 의견을 낼 때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그렇게 대하는 것은 마치 아내더러 나를 돕는 배필 노릇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여자를 배필로 주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돕는 배필이란 남편과 아내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하필이면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일까요? 매튜 헨리 목사님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머리뼈로 만들지 않으셨다. 또 남자에게 짓밟히지 않도록 다리뼈로 만들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동등한 위치에 서라고 하여 옆구리 부분에서 취하여 만드셨으며, 보호함을 잘 받도록 하여 주기 위해 팔 밑에서 취했으며,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남자의 가슴과 가까운 곳에서부터 취하여 내셨다. 아담은 갈빗대 하나를 잃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 것이 아니고 그 용모가 변한 것도 아니다. 그 대신 아담은 잃은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배필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적에 하찮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남자의 몸속에서 가장 소중한 갈비뼈를 취하셔서 지으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처음 만났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으니, 이는 아담이 하와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런즉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원하시거든 부부가 서로를 돕는 배필로 인정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 째로,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가정이란, 타락 이전에 아담의 가정과 같은 가정을 말합니다. 범죄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온전히 하나 됨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부부는 하나 됨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머리와 몸에 비유합니다. 에베소서 5장 23절에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라고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의미합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완전한 하나 됨을 보여줍니다. 몸이 머리의 지시에 순종해야 하지만 그것은 머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몸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몸은 머리를 위해 있고, 머리는 몸을 위해 있습니다. 둘은 언제나 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머리와 몸의 분리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담과 하와가 완전한 하나를 이루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 간에는 갈등이 없고 완전한 화합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둘은 서로를 사랑하였고,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는 사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가 만드셨으므로 본디 둘은 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먼저냐 여자가 먼저냐, 누가 더 우월하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8)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11)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하와는 아담에게서 났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다 여자로 말미암아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우열이 없고 동등한 것입니다. 남자 없이 여자가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없습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람도 없고, 어머니 없이 태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남자의 역할이 있고, 여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범죄하였을 때, 둘 사이에 하나 됨이 깨어졌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니, 아담이 대답하기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그러자 아담이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하와를 보았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아담이, 범죄하고 나자 하와를 일컫는 말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자기와는 상관없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가 하와와 함께 살게 된 것은 다만 하나님이 주셔서 그와 함께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아담이 하와를 자기와 떼려야 뗄 수 없으리만치 친밀한 존재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담의 생각 속에는 하와를 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나자 하와를 가리켜 완전히 타인을 지칭하는 “여자, 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라고 한 것은, 더 이상 하와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여자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또한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은 책임을 하나님과 하와에게 떠넘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면 부부 간에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불신 이웃들을 보면 대체로 배우자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려고 하면 기를 쓰고 반대합니다.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들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배우자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믿는 아내에게 “하나님과 남편인 나, 둘 가운데 한편을 택하라”고 다그칩니다. 또한 그는 자기 아내가 기독교인이 되면 가정을 등한히 하지는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그 같은 염려는 기우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믿는 아내, 믿는 남편이야말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적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정의 창시자인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가정의 하나 됨을 위해 힘씁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원하시거든 먼저 온 집이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가정의 본 모습을 상실하고 병들어 신음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간에,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들 간에, 사랑 대신 미움이, 신뢰 대신 의심이, 위안 대신 위협이, 따뜻한 언행 대신 폭력이, 이해 대신 오해가 하나 됨을 가로 막고 가정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문제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한 가정이 될 줄로 생각하고 자나 깨나 돈을 버는데 마음을 다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며, 신자들이 돈을 사모하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고 오히려 더 큰 근심과 고통만 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딤전 6:10).

행복한 가정은 돈으로 만들 수 없으며 오직 가정의 구성원들이 주 안에서 새롭게 변화를 받아 가정의 본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것처럼, 부부가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루고 이해와 사랑으로 결속된 가정을 만들려면, 오늘 말씀해 드린 것과 같이 결혼과 가정의 신성함을 인정하고 남편과 아내가 돕는 배필로서 본분을 다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수많은 가정이 위기를 만나 신음하는 이 시대에 성도님들은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아름답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가꾸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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