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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요 11: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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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요 11:38-44)


언젠가 이스라엘에서 굴로 된 무덤 속에 직접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기분이 좀 으스스했습니다. 무덤 입구에 들어가니 삼면에는 돌로 만든 긴 좌판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해 두는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유족들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돌문을 열고 들어가 시체를 볼 수 있었고, 또 그 시체에 향료를 바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 후손들이 남은 뼈를 수습하여 유골함에 넣은 뒤, 무덤의 한쪽 구석에 보관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가족들이 죽으면 그곳에 시신을 안치한다고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가족들은 슬픔가운데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의 무덤 역시 암석을 파고선 입구를 돌로 막아 놓는 그런 무덤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요 11:38). 

이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하여 주님은 네 번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그를 어디 두었느냐?’(요 11:34). 
둘째, ‘돌을 옮겨 놓으라’(요 11:39). 
셋째,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넷째,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요 11:44). 

눈여겨보면 한번은 죽은 자에게, 나머지 세 번은 산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주님의 말씀 앞에서 반응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산자들을 향하여 맨 먼저 ‘그를 어디 두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들이 예수님을 무덤으로 모시고 갔습니까? 아닙니다. 저들은 미적댑니다. 모시고 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비로소 예수님을 무덤으로 모시고 갑니다(요 11:38). 

두 번째,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들이 즉각 돌을 옮겨놓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 꾸지람을 듣고서야 비로소 못이기는 체 돌을 옮겨 놓습니다. 

다음 단계를 보십시오.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4). 

사실, 마지막 네 번째 말씀은 하실 필요가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반사적으로 어떤 행동이 나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왔을 때 베옷을 벗기고, 풀어주고,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게 본능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 현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사로에게 다가가 그를 풀어주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해 하신 말씀이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이 말씀입니다. 

오죽했으면 이 말씀까지 하셨겠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왜 이렇게 미적대며, 변명을 늘어놓고, 머뭇거리고 있었을까요? 왜 죽은 자는 즉각 반응을 보이는데, 산자들은 그 반대입니까? 혹시, 나사로에 대해 어떤 편견과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저들은 나사로가 싸늘한 시체로 누워있어야 하고, 영원히 꽁꽁 묶인 채 무덤에 있어야할 존재라는 선입견이 뇌리에 꽉 박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내 곁의 사람을 향하여 이런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타인을 내 사고의 틀 안에 꽁꽁 묶어 놓거나, 묶어 두려고 하는 경향은 없습니까? 분명 지금 나사로는 살아있습니다. 주님이 그를 살려놓으셨습니다. 이 나사로는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를 여전히 죽은 사람, 소망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묶인 상태로 방치해 놓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편견이며 선입견입니까? 이 나사로의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왜 주님께서 산자들을 향하여 세 번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르셨을까요? 무덤의 돌을 옮길 능력이 없으셨을까요? 더군다나 수족을 묶은 베를 풀어줄 힘이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바로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은 자’였습니다(엡 2:1). 그러한 그를 주님께서 살리셨습니다. 그 과정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과정을 다섯 단계, 즉 ‘미리 아심-미리 정하심-부르심-의롭다 하심-영화롭게 하심’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구원역사를 이루어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본격적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그분 앞에 무릎 꿇을 때가 언제입니까? 세 번째, ‘부르심’의 단계입니다. 이 세 번째 단계에 누구를 참여시킵니까? 그 사람이 믿도록 누가 역할을 감당합니까? 먼저 믿는 우리를 참여시키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사로를 살려놓으셨고, 이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주님이 이미 살려놓으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마르다나 마리아처럼 그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그를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다가가야 합니다. 손을 내밀어 꽁꽁 묶여 서있는 그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는 진정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려놓으신 나사로, 그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잔치자리에 앉아 있습니다(요 1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영적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그렇게 도도했던 아람나라 나아만이 하나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바벨론에서 스스로 신으로 자처하던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높이는 자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이같이 우리 주변에는 주님이 이미 살려놓으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아직 묶여 있습니다. 우리가 풀어놓아 다니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번 새생명 전도축제에 저들이 주님의 식탁에 앉아 함께 식탁교제를 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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