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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집 (시 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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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세우시는 집 (시 127:1-5)
  

저의 큰집, 즉 원로목사님께서 어릴 적에 자라나셨던 집은 일제 때 대부분의 시골 농가가 그러했듯이 원래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킨 분은 바로 저의 큰아버지셨다고 합니다.
큰아버지께서는 아직 십대 청소년에 불과할 때에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우리나라가 해방된 후에 돌아오셨는데, 원로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때 '돈을 한 보따리 싸 짊어지고'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여기저기서 노역을 하면서 푼푼히 모은 돈이었을 것입니다.
당시는 저의 할아버지께서 이미 돌아가셨을 때였는데, 그렇게 성공하고(?) 돌아오신 큰아버지를 보시면서 제 할머니께서는 “우리 온 가문이 너에게 달려 있다.”고 대견스러워 하셨다고 합니다.
비록 늦게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일찍 소천하기는 하셨지만 그 큰아버지 덕분에 저의 큰집은 한때 '진해에서 꽤 큰 부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家長)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은 곧 그 가정 혹은 가문 전체의 화복(禍福)과 직결됩니다. 
오늘의 본문 역시 바로 그와 같이 '집안을 일으키는 가장'에 대한 내용인데, 그 가장은 무슨 '능력 있는 아버지'나 '억척스러운 주부'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집'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며 어떻게 번창하게 됩니까?
이제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면서 그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게 된 저와 여러분은 주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신 가정이 누리게 되는 복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집에는 '생업을 위한 노력에 축복의 결실'이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기록하기를 “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집”과 “성”은 둘 다 건축물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문맥에서 '집'은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을, 그리고 '성'은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대유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집을 세우다'라는 말 역시 '집을 짓다'라는 뜻이 아니라 '집안을 일으키다, 가문을 세우다'라는 의미이며, “세우는 자” 역시 건축가가 아니라 바로 가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장이 자기 집안을 일으키려고 노력을 해도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 모든 “수고”가 다 “헛될” 뿐이라고 했습니다.
즉 한 집안을 정말 성공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최고의 가장은 '좋은 직장이나 안정된 기업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실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비단 가정뿐 아니라 국가 전체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파수꾼의 경성함”이란 '군인들이 늘 깨어서 지킴'을 가리킵니다.
잘 지어진 성에 초병들이 경계 근무를 철저히 하는 것은 국토방위를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100퍼센트 국가안보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다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은, 과거에 중국이 저 유명한 만리장성을 지어 놓고도 결국 흉노의 침략을 막지는 못했던 예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면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은 더욱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즉 '가정을 세우는 것'은 '국가 안보를 지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안전하고 사회가 평화로워야 그 국민들이 마음 놓고 열심히 일하면서 가정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까닭에 이 둘 다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 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즉 나라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면 가정은 가장이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어지는 2절은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란 그야말로 분초를 아끼고 눈물 섞인 빵을 먹으면서 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그처럼 열심히 사는 모습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애를 써도 그 모든 수고가 다 “헛되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경우가 현실적으로는 허다합니다. 

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지 않고 순전히 자기 노력만 가지고서 성공하겠다는 자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수고하는 일에 축복해 주지 않으시면 제아무리 자기 혼자서 '열심히, 성실히' 발버둥 치면서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에게 '그 노력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까?

그 대답이 바로 2절 하반절의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잠꾸러기 교인'들에게는 변명의 근거로, '불면증이 있는 교인'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말씀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 '잠을 주신다.'는 말씀 역시 '숙면을 취하게 해 주신다.'는 문자적인 뜻뿐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2절 상반절에서 하루 온종일 애써서 수고한 사람이 밤에 평안한 단잠을 잘 수 있게 되는 경우란 바로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한 열매가 있을 때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모든 것이 헛수고로 끝날 때에는 아무리 몸은 피곤해도 잠조차 오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 곧 '여호와를 인생의 주인이요 가정의 머리로 모시고 사는 신자'에게 그 본인의 노력에 대한 축복의 열매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런 신자는 매일의 일과를 통하여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한 후에 그 결과로 주어지는 인생의 안녕과 가정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잠자리에도 지극히 평안한 마음으로 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직 '여호와께서 집을 세워 주시는' 가정의 가장과 그 가족들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인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집은 결코 제대로 설 수가 없습니다.
소위 '자수성가(自手成家)'를 해 낸 사람의 위험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 가진 재산이나 물려받은 유산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해서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물론 훌륭한 일이고 칭찬받을 만한 업적입니다.
하지만 '자기 혼자서 이루었다'는 생각은 곧 '하나님의 도우심'을 망각하는 교만으로 직결되기가 아주 쉬운 것이며 그것은 곧 '패망의 지름길'이 될 뿐인 것입니다.

가장이 아무리 사업 수단이 좋아서 돈은 잘 벌어도 십일조조차 할 줄 모르는 것 역시 패가망신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집을 세워 주시는 진짜 가장'이심을 모르고 그 '하나님의 것'까지 도적질한다면 제아무리 통장에 꼬박꼬박 모아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번에 훅 날려 버리시면 그 모든 '수고한 것'들은 하루아침에 '헛된 것'으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은 일단 가정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가족을 잘 부양해야 합니다.
그 기본적인 책임부터 제대로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장부터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사랑하심을 입는 신앙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열심히 수고하면 결국은 집안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지 말고, 이 대한민국의 '성'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을 의지하는 가운데 각자의 '집' 역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바를 따라 세움으로써 그 모든 생업에서도 여호와께서 넘치게 해 주시는 축복의 결실을 마음껏 거두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가문에는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신앙의 후손'이 이어지게 됩니다.

3절 이하 5절의 말씀에 “3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에 모든 생명체에게 주셨던 공통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생명의 재창조이며 사람 역시 자식을 낳아서 이 땅을 충만케 채워 나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하지만 매사에 그렇듯이, 같은 자식들을 낳아도 신자의 자녀 생산과 불신자의 자녀 생산은 그 의미와 차원이 아주 다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우선 3절 말씀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기업' 즉 그 부모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재산'이 되는 동시에, 남편과 아내가 한 가정을 이루면서 받게 되는 '상급' 즉 '제일 좋은 상'이라고 한 것입니다.
언뜻 생각해 보면 자녀라는 것이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소유요 그 어떤 재물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와 같다는 사실은 신자 부모에게나 불신자 부모에게나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자녀 그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기보다는, 그들이 자라서 돈을 많이 벌고 부모에게 큰 효도를 해 드리고 손자손녀를 많이 낳아 드리면 그제 가서야 부모에게 복스러운 자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식을 잘 키워서 그 다음에게 자기에게 뭔가 보답을 해 주는 자식이 되어야 소위 '자식복'을 제대로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불신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마치 우상 모시듯이 하면서 온갖 좋다는 것들을 아낌없이 다 동원해서 키우는 것은 바로 나중에 그런 '자식의 덕'을 보겠다는 희망 내지는 일념 하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신자들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신자 부모들에게 있어서는 자식 그 자체가 “태의 열매” 즉 태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자기 인생의 최대의 “상급”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녀'란 '생명의 주'께서 부모 된 자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키워서 나중에 이들이 뭔가 자기에게 보답을 해 주어야 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귀한 생명을 받아서 키우게 된 그것만 두고도 이미 큰 축복인 줄을 압니다.
그런 까닭에 그런 자녀를 양육하는 것 역시 전혀 어떤 '부모의 부담'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처럼 땀 흘리고 고생하면서 자식을 키우는 것까지도 오히려 '부모로서 받는 상급'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이처럼 '생명의 주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까닭에 또한 가정의 최고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한 것은 그 자식이 부모에게 어떤 '용도'로 사용됨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자면 그것은 토지를 자신의 기업으로 가진 사람은 그것을 곡물 생산의 용도로 사용해야 하며 주식을 가진 사람은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신자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어떤 '용도'를 위한 '기업'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이어지는 4절과 5절이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4절의 “젊은 자의 자식”이란 '젊을 때 둔 자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식을 가리켜 “장사의 수중의 화살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화살'에 비유하는 것은 참 흔치 않은 표현입니다.
더구나 '장사의 수중에 있는' 화살, 즉 '싸움을 잘하는 용사의 손에 들어 있는' 그것도 “전통에 가득한” 화살과 같다고 했으니 벌써부터 매우 호전적인 느낌이 강력하게 전해지지 않습니까?
'자식' 하면 어느 부모나 다 일단 '공부를 잘 시키고 건강하고 아름답게 키워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목적인데, 본문의 분위기는 그런 것과는 너무나 정반대인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은 우리 신자의 자녀가 어떤 '전투 상황에서 화살처럼 요긴하게 쓰이는 용도'로 사용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이어지는 5절 하반절에서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의 “성문”이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떤 공적 문제를 회의하고 법적 판결을 내리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적군이 침략해 올 때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는 위치이기도 했는데, 본문에서는 후자를 가리킵니다.
“원수와 말할 때에”라는 것은 '원수와 담판을 지을 때에' 혹은 '원수와 맞상대할 때에'라는 뜻입니다.
지금 자기 성을 공격하려는 적군과 성문에서 그처럼 대치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을 물리칠 무기 즉 '화살'이 수중에 없다면 말싸움에서부터 벌써 기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화살을 자기 전통에 가득 채우고 있는 용사'는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한 대로, 조금도 꿀릴 것 없이 아주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전투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즉 신자 부모는 자기가 '기업'으로 받은 자녀들을 바로 '영적 원수들과 대항할 때에 당당히 승리할 수 있는 화살'과 같은 용도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신앙의 부모'들에게 있어서는 '신앙의 자녀'들을 많이 두는 것만이 가장 믿음직하고 든든한 '자식복'이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든든한 자식'을 두었다고 할 때에는 무슨 '노후 보장' 같은 의미로 생각합니다.
'내게 이처럼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잘 버는 믿음직한 아들, 부잣집에 시집가서 넉넉하게 잘 살고 있는 딸이 있으니까 나중에 내가 늙어서 힘이 빠지고 돈을 못 벌게 되어도 이 자식들이 날 먹여 살려 주겠지.' - 바로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식을 '믿음직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모로서는 참 얼마나 옹졸한 계산이겠습니까?
자기 자식을 무슨 '적금 부어 놓은 것'이나 '보험에 들어 놓은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기독신자 부모들은 자식을 그처럼 '돈줄에 이어진 기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자신의 자녀들을 이 세상에서 불신세력과 대항할 때에 써 먹을 수 있는 든든한 '전력(戰力)'을 증강시킬 수 있는 자원이라고 여깁니다.
이 세상을 '신자와 교회'가 '사단과 그 졸개 마귀들과 그 사주를 받은 적그리스도'와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으로 보고, 그런 까닭에 이런 신앙의 자녀들을 많이 키워 내 그리스도의 용감하고 강력한 용사들로 만들어 놓고서 그들을 아주 믿음직하게 여길 줄 아는 것이 바로 신자 부모들이 그 '기업'을 활용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같은 자식을 키운다지만, 자식을 키워서 그 덕 좀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불신 부모들과 자식을 가지게 된 것 자체를 축복으로 생각하고 자식을 양육하는 고생까지도 상급으로 여기는 신앙의 부모들은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자식을 순전히 자기 욕심에 대한 '대리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불신 부모들과, 자기의 자식이 부모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투를 위해 요긴하게 쓰이는 '화살'이 되는 것을 두고 정말 기뻐할 줄 아는 신앙의 부모들은 그저 '이름이 같은 부모'라고 해서 결코 '같은 부모'가 아닌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집'에는 바로 이런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 풍성하게 됩니다.
그처럼 '신앙의 유산이 가득하고 대대로 계승되는 가정'은 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존속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신앙의 부모들을 통해서 그와 같은 신앙의 후손들이 이어져야만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라는 요긴한 전력이 계속 증강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자녀들이 어릴 때에 유아세례를 받고 나중에 입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부모에게 주어진 정말 귀중한 의무인 동시에 최고의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아들딸들이 이 경향교회의 영아 유치 주일학교부터 시작하여 유년 초등부를 거쳐서 S.F.C.를 통해 양육을 받고 있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유산 상속'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부모가 '경향인'이고 그 자녀도 똑같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신앙인'과 '사명인'이 되는 것, '아버지 장로'를 이어서 '아들 장로', '어머니 권사'를 이어서 '딸 권사'가 세워지는 것 - 정말이지 '기업 전수'도 이런 기업 전수가 다시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원로목사님께서 하신 명언들 가운데 “전도를 못하면 자식이라도 많이 낳아라.”는 너무나 멋진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다산(多産)' 자체만으로도 실로 큰 축복입니다.
또한 그렇게 낳은 자녀들을, 마치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자기 기업을 열심히 돌려서 재산을 모으듯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훌륭한 신자로 키워서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으로 만드는 것은 부모로서 보통 '위대한 업적'이 아닙니다. 
  
그처럼 자신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으로 알고 '교회의 전통(箭筒)을 가득 채우는 화살'로 만들어 낸 부모들은 '원수들 앞에서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자식 덕이나 보려고 자식을 키운 사람들은 자기가 죽고 나면 그 덕이라는 것도 더 이상 볼 길이 없게 되지만, 교회를 위하여 자식을 키워 놓으면 그처럼 '자식을 잘 키워 놓은 덕'은 바로 교회를 통하여 그 부모의 대대손손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경향의 모든 부모들이 이처럼 여호와께서 주신 '태의 열매'를 자기가 받은 최고의 '상급'으로 알고 가장 귀중한 '기업'으로 활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에 '전통에 가득한 화살'처럼 키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가정은 가장이 누구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가장이 도박에 중독되거나 자녀를 등한히 하면 가족 전체가 망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이 주말에 가족여행 가는 것을 주일성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면 그 가정은 이미 끝장나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가장으로 모신 가정만이 '그 집이 축복 가운데 세워질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 욕심에 따라서, 세상의 무슨 교육학 박사가 좋다고 하는 방법을 따라서 자녀를 양육하면 그들의 앞날은 뻔한 일입니다.
자기 자녀를 교회 중심이 아니라 대학입시 중심으로 가르치고 교회의 일꾼이 아니라 회사 사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키운다면 결국 나중에 가서는 '원수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비극이 찾아올 뿐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하나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 '그리스도의 군사'로 키우는 가장이 되어야만 그 가문 전체가 그야말로 '수 천대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중심으로 승리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석씨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킨 분은 큰아버지셨지만 영적으로 일으킨 분은 바로 저의 아버지, 여러분의 원로목사님이셨습니다.
큰아버지께서 일으키셨던 '진해 석 사장 집안'은 잠시 반짝하고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집'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원로목사님께서 일으키신 '가문의 축복'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2대, 3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로목사님은 이 '석씨 가문'을 '여호와 경외의 신앙'으로 일으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인들 집에 심방을 가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요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다.'라는 문구의 액자가 걸린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요 15:5)고 하셨으니 '집을 세우는 것' 역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자수성가'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주인이 되시는 집'을 세우며 '부모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될 신앙의 자녀를 양육함으로써 진정한 '가정의 축복'을 영육 간에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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