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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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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사 40:27-31)

  
천안함 사건으로 군대에 보낸 자녀를 많이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지역이나 해양한계선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북한의 동태를 살피고, 우리 경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군인의 모든 일이 다 힘들겠지만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 참 힘듭니다.  낮에도 힘들지만 밤에 힘듭니다.  가장 힘든 시간이 새벽 2시부터 동이 틀 때까지입니다.  혹여 춥기라도 하면 더욱 힘듭니다.  그래도 기다리면 동이 트고, 시간이 지나 교대시간이 옵니다.  밤을 보내며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교대가 될 것을 믿고 견딥니다.  이것이 경계근무를 하는 군인들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본문에 '앙망'이란 말은 바로 이런 뜻을 가집니다.  이 말은 파수꾼, 보초들과 관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소망한다, 바란다, 기다린다, 믿는다는 뜻입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며 소망하듯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며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 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130:5-6)

믿는 자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을 소망하며 믿고 나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생활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선포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은혜가 주실까요?

 
첫째는 새 힘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다시 보았습니다.  처음에 위로를 선포하고, 중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말씀합니다.  그 가운데 우선적으로 주목할 말씀이 31절입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앞부분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건강한 청년이라도 곤비하고,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약해집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피곤하거나 곤비치 아니하시고 명철이 한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이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도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게 하시고, 달려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주시는 큰 축복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점점 후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늙고, 병들고, 시들고, 약하게 됩니다.  태어날 때는 새것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 헌것이 되고, 옛것이 되고 맙니다.  늙고 싶어 늙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육체는 낡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상품가치로 따진다면 이렇게 말합니다.  10대는 쌤풀, 20대는 신상품, 30대는 정품, 40대는 명품, 50대는 쎄일품, 60대는 이월상품, 70대는 창고 대매출, 그리고 80대는 폐기 대상품이라고 합니다.   웃자고 만든 말이지만 서글프고,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후패해도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은 육체가 늙어갈수록 더욱 새롭게 됩니다.  삶의 연륜이 생기고, 신앙의 연수가 깊어 가면 사람은 더 강인하고 새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4:16)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왜 속사람은 새로워질까요?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새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로 건강하고, 새롭게 됩니다.  아무리 늙어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감당할 힘이 있고, 피할 길만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늙고 후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힘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 삶에 종종 찾아오는 고난이 결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감당할 힘만 있으면 어떤 것도 두렵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이 새 힘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참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때에 일하는 것도 힘든데, 사람까지 힘들게 하니 더욱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극복하고 이겨냈습니다.  마침내 성벽을 중단 없이 완성했습니다.  그가 이겨낸 해법은 오직 기도였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기도했느냐고 중요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대적하고, 방해하고, 훼방하며 힘을 빼는 모든 사람들과 환경 앞에서 그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힘만 있으면 문제가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힘이 없기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내게 힘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어려운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힘을 주십시오. 영혼아 힘을 내어라, 낙심하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다시 힘을 내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라’

성도여러분,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무엇보다도 새 힘을 주십니다.  분명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힘만 있으면 어떤 것도 이길 수 있습니다.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 힘으로 극복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새 힘을 주제로 선포하는 본문의 말씀 중에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여기 '야곱'과 '이스라엘'을 강조하여 부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을 말합니다.  야곱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애 전환점은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한 때입니다.  

창세기 32장에 나옵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찾아가는 야곱에게는 무거운 짐이 하나 있었습니다.  형의 분노를 잠재워야 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형을 속여 축복을 빼앗아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칼잡이를 대동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점점 고향땅이 다가오지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강만 건너면 고향입니다.  그날 밤 야곱은 모든 가족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합니다.  날이 새자 천사는 가려고 했지만 야곱은 놓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축복해 달라고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야곱이라고 대답하자 이제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로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싸워 이기겠습니까?  이것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선언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 뒤부터 야곱과 그의 후손은 열두지파와 이스라엘민족으로 번성했고,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이란 민족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 지금 야곱과 이스라엘을 번갈아 부르며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그들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임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야곱에게서 이스라엘로 바뀐 새 이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믿고, 여호와를 바라보고 사는 자에게 주신 새 이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책의 말씀이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는 위로의 선포입니다.  더 이상 낙심하거나 주눅 들지 말고 정체성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새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만나 무엇보다도 이름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여기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고, 또한 아브라함도 원래는 '아브람'이었다가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처음에는 '사래'였다고 '사라'가 되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앙망하며 살다가 받은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 사라는 열국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름 그대로 후대에 열국의 아비, 어미가 되었습니다.  

신약에도 이름이 바뀐 자들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뒤에 비로소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지만 주님을 만난 뒤에 '반석'의 의미를 가진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바울도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뒤에 그의 이름이 바울로 바뀝니다.  사울은 큰 자요,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만난 뒤에 그는 평생 작은 자가 되기를 다짐하고 스스로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동시대에 살던 '바나바'도 원래 이름이 아닙니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습니다.  이것도 좋은 이름이지만 사도들은 성령이 임한 그에게 새로운 이름 '바나바'로 그를 불렀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평생 위로자의 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위로의 사람, 위로의 천재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뒤 받은 이름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는 우리에게도 새 이름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이 무엇일까요?  그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인, 크리스천, 성도'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주님을 믿는 자라는 말입니다.  처음 이 말은 그리 좋은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이름을 가장 영예와 축복으로 알았고, 이 이름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목사, 장로, 집사는 직임이요 호칭이지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 이름 외에 믿는 자에게 주신 새 이름은 오직 그리스도인, 성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이름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 이름이 나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가족과 후대와 자자손손 영예로운 이름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이름에 평생 명예를 걸어야 합니다.  이 이름의 깊은 의미를 따라 날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셋째는 새사람이 됩니다.  

여기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에는 단순히 이름만 달라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제 야곱은 얍복강에서부터 새사람이 됩니다.  그의 삶에 궁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부터 진짜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제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이제 속을지언정 그는 속이지 않습니다.  이제 손해 볼지언정 옛날처럼 계산하지 않습니다.  이제 약삭빠른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느긋한 자가 됩니다.  그의 생애는 이스라엘로 바뀐 이름에서부터 절정을 향해 나갑니다.

지금 말씀을 받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은 파괴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비참하게 죽고, 이제 머나먼 포로의 길을 떠납니다.  이 모든 것은 철저하게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타락할 때로 타락하고, 위에서 아래까지 부패하고 썩고 곪아 터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고,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이스라엘'이었지만 여전히 '야곱'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제 소망과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새 힘을 주신다고 선포합니다.  새 이름을 기억하라고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새사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았으니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새 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새 힘을 받으면 뭐합니까?  그 힘으로 또다시 잘못하고, 범죄하고, 다른 길로 가면 힘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제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 힘을 받으면 이제 새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연세계가 날마다 변화합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경우 계절마다, 철마다 아름다운 옷을 갈아입습니다.  자연의 이런 변화가 우리 삶에 풍요와 안정을 줍니다.  매번 겨울만 있지 않고, 매번 불볕더위만 지속되지 않습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옵니다.  계절의 이런 규칙적인 순환을 통해 늘 새롭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고 삽니다.

사회도 변화합니다.  현대사회는 급변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적응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세대차이가  시대를 반영합니다.  옛날에는 20, 30년을 한 세대를 구분하는 것이 기준이었습니다.  이제는 1년, 2년, 한 달, 두 달, 아니 하루, 이틀입니다.  쌍둥이도 세대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고나면 바뀌고 달라지는 세대 속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지 막막한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행동이 아니라 생각의 속도만큼 변화하니까 초단위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세상이, 사회가, 문화가, 모든 것이 변화하는 시대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달라지는데 사람은 좀처럼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타락한 이후 돌같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변화를 싫어하고, 변하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시대가 악할수록 이젠 변화가 아니라 변질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변화는 되지 못할망정 변질은 없어야 하는데 인간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불신하고, 미워하고, 대적하며 다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변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힘뿐입니다.  성령의 힘, 은혜의 능력만이 가능합니다.  

은혜가 임하면 달라집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주는 새 힘은 바로 은혜를 말합니다.  은혜가 임하면 새 힘을 얻는데, 새 힘은 달라지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깊이 믿으면 믿을수록 달라지는 것이 신앙의 순리입니다.  변질되지 않고 변화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야곱은 이름만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베드로도 놀랍게 변화되었으며, 바울도 놀랍게 달라진 사람입니다.  모두가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새롭게 살고, 새 길을 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새 힘을 주시고, 새 이름도 주시고, 새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제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으십시오.  새 이름에 자부심을 갖고 사십시오.  그리고 이제 새사람으로 날마다 변화되어 성숙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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