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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임당한 어린 양羊 (계 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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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당한 어린 양羊 (계 5:11-14)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주님께 우리도, “주여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감히 고백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일전에 殉敎地 巡禮 次, 전라남도 신안군의 ‘임자도’와 ‘증도’에 다녀왔다고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 버스로 밤 9시 넘어 ‘임자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부두에 도착했습니다. 밤 10시에 떠나는 막배를 기다렸습니다. 부두 주변과 밤바다는 이미 깜깜했습니다. 시간이 되어 막배를 타고 가는데, 불빛 한 점 없는 밤바다를 우리가 탄 배는 헤드라이트도 비추지 않고 갑니다. 이상하다, 앞도 보이지 않는데 밤바다를 어떻게 가자는 것인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분도 채 못 되어, 멀지 않는 곳에서 희미하지만, 규칙적으로 깜빡거리는 등대불빛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등대 불빛을 보는 순간, 불안이 사라졌습니다. “아, 칠흑같이 깜깜한 바다지만, 선장은 저 등대 불빛을 보고 운항하구나.” 안심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를 가리켜 ‘포스트모던 시대’(후기현대시대)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정신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는 이미 이 時代의 精神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배와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茫茫大海를 항해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茫茫大海에 가보면, 동서남북이 분간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준점이 필요합니다. 항해하는 모든 배들은 어디에다 기준점을 둡니까? ‘북극성’입니다. 北極星은, 다른 별들과는 달리 움직이지 않고 하늘에 고정되어 있는 별입니다. 그래서 배들의 항해 기준점이 됩니다. 기준점이 있다고 해서 항해 못합니다. 그 기준점을 정확하게 가리켜 주는 ‘나침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시대를 항해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기준점과 같은 北極星이 있느냐 하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또 그 기준점을 잘 가리켜 주는 좋은 나침반을 가지고 있느냐,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 미래학자인 L. Sweet은, ‘아쿠아 교회(AQUA CHURCH)’라는 자신의 책에서 ‘포스트모던시대’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기준점 없이, 나침반도 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들고 있는 지도가 정확한가? 우리가 사용하는 나침반은 검증된 재품인가? 하는 문제제기입니다. 우리 신앙, 인생의 기준점(북극성)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가리켜 주는 나침반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준점(북극성)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인가를 점검해봐야지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항해도구인 나침반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가리켜주고 있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나침반이 맞는가?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내 인생, 신앙의 항해 기준점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 맞습니까? 내 인생, 신앙의 항해도구인 나침반은, 북극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가리키는, 정상제품 맞습니까? 탐지능력이 뒤떨어지는 짝퉁은 아닙니까? 우리나라 군사레이더가 3차원 레이더방식이 아니라서 비행긴지? 새떼인지?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교회를 가리켜, 이런 말을 합니다. 들어 보셨지요? 『예수 없는 예수교회』다 합니다(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깁니다). 그런 현상을 두고, 안티기독교도들은 (흔히, 舊敎RCC와 비교해서) 개신교RC를 『개독교』라고 폄하합니다. 개신교 목사를 『먹사』라고 합니다. 비록, 안티 기독교도들의 비난이긴 하지만, 오늘 교회들 향한 이 시대 ‘돌들의 외침’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M. Horton은 포스트모던시대의 기독교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라 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말이지요. 기독교 복음이 아닌, 유사복음을 추종하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우리 시대 많은 교회들(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복음이 마치 자기 인생의 성공을 위해 있는 ‘형통주의 철학쯤’으로 여깁니다. 형통하기 위해서 예수 믿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美國의 조엘 오스틴 牧師입니다. 그의 베스트셀러가 된 『긍정의 힘』, 『잘 되는 나』에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위, 『형통복음』입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형통복음은, 미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도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의 책 한 두권쯤은 읽으셨고, 가지고 계실 겁니다. 한국교회도, 조엘 오스틴의 형통주의 철학, 긍정바이러스에 많이 감염되어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긍정의 힘, 잘 되는 나가 곧 복음인 줄로 착각합니다. 조엘 오스틴은, 지금 여기에서의 亨通(이 땅에서 잘 되는 나)이 기독교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오스틴의 형통복음은,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의 능력』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그의 수제자인 미국의 Crystal Cathedral(수정교회) 설립자인 로버트 슐러 목사의 『자존심: 새로운 종교개혁』, 『자아사랑』(Self-Love), 『당신을 믿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라』(얼마나 솔깃한 이야기들입니까? 현대인들의 입맛에 꼭 맞습니다), 이 思想을 계승해서 만든 세속화 된 철학입니다. 오스틴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형통복음(prosperity gospel)을 말합니다. 『할 수 있다 정신』(can-do spirit)이 기독교의 복음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다 맘몬(물질)을 숭배하는 시대에 살다보니, 조엘 오스틴 목사가 말하는 ‘형통복음’이 이 시대를 살아가기에 너무 조합이 잘 되는 신앙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신이 나기도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런 형통복음은, 우리 신앙의 북극성, 움직이지 않는 기준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없습니다. 형통복음을 말하는 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나침반은, 성경이 아닙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세속화 된 형통주의 철학에 불과합니다. 

한국교회 안에도 이것을 조금 미화시킨 것뿐이지, 이와 유사한 형통주의 복음을 주장하는 소리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影響力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高地를 점령하라, 깨끗한 부자(淸富가 되라)가 되라고 합니다. 高地를 점령해야,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높이 올라가야, 더 많이 버릴 것도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더 부자가 되어야 더 많이 베풀 수가 있고, 主의 일도 더 힘 있게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강변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도전합니다. 五餠二漁를 혼자 먹는 사람 되지 말고 5,000명을 먹이는 사람이 되라 합니다. 젊은이들이 惑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저나 여러분 중, 이 자리에 계신 그 누구도 5병2어로 5,000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 가진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5병2어로 5,000명을 먹인 분이, 누구십니까? 성경을 잘 보셔야 합니다. 소년이 가지고 온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손에 들고 祝謝하신 예수님(人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이신) 바로 그 분이 5,000명을 먹이신 분입니다. 주객전도도 유분수지요. 어떻게 오병이어를 가지고 온 소년이, 5천 명 먹인 사람입니까? 오병이어는, 별것 아니지만 그것을 주님의 손에 드린 소년의 그 믿음, 주님께서 사용하신 거지요. 

우리 의식 속에는 선교사가 되어도 일류대학 나온 사람이, 더 대접받습니다. 그런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버리기 위해서,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논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또 “대학입시만 붙여 주시면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아들 병만 고쳐주시면 목사 시키겠습니다.” “이번 선거에 당선만 시켜주시면, 주님께 내 인생 바치겠습니다.” 이런 것은, 신앙 아닙니다. 

우리는 요셉을 꿈쟁이라고 하는 데, 요셉의 꿈은 요셉 자신의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입니다. 그 꿈은, 요셉이 하나님 섬기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조건적인 신앙, 신앙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조건이 예수님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조건 없이도,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다니엘의 세 친구)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도리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이, 내 욕심을 이루는 형통복음으로 빗나가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 제자 사도 요한은, 로마황제 Domitian 통치 말기, 기독교가 끔찍한 박해 위협을 당할 때 밧모섬에 유배되어, 환상 중에 놀라운 계시의 말씀을 받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Domitian은 천하를 호령하던 권력자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우리의 主 하나님’(Dominus et Deus noster)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하면서, 神에게 경배하듯이 자기를 경배하도록 공식적으로, 지속적으로 강요했습니다(황제상 건립, 황제숭배신전건립). 그러다보니,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에 대해서 국가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박해했습니다. 

그런 시대, 밧모섬에 유배 된 사도요한에게 주님은 幻像 중에 天上의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하십니다. 그가 목격한 하늘의 광경은, 놀라운 ‘하늘의 예배’ 모습입니다. 그 예배 광경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나, 로마제국치하에서 황제숭배를 하는 자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하늘 보좌 중심에, 누가 계셨습니까?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죽임 당하셨던 어린 羊 예수 그리스도께 네 그룹들이 둘러서서 예배하는 광경입니다. 제일 먼저, 하늘의 네 생물들이(여섯 날개, 안팎으로 눈이 가득한 모습을 한)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將次 오실이시라”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립니다. 그러자 동시에, 그 다음 그룹인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서, 자기 머리의 冕旒冠을 벗어서 보좌 앞에 드리며 찬송합니다. “우리 主 하나님이여, 榮光과 尊貴와 權能을 받으시기에 合當하오니, 主께서 萬物을 지으신지라. 萬物이 主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이번에는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새 노래로 또 예배합니다.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시고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게 하셨다”합니다. 

또 누가 예배합니까? 그 다음 그룹은, 네 생물과 24장로들을 둘러 선 수많은 천사들(그 수가 萬萬, 千千)이 큰 음성으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羊은, 能力과 富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합니다. 거기서 예배가 끝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또,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羊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자, 네 생물이 일제히 “아멘, 아멘”화답합니다. 24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합니다.” 놀라운 예배광경입니다. 

하늘의 예배를 주목하십시다. 네 생물들과 24장로들과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죽임 당하신 어린 羊께 예배하고 경배했습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역설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발붙이고 사는 로마제국치하를 보십시오. 황제가 예배의 대상입니다. 황제가 神입니다. 하나님으로 숭배 받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굴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추구하던 성공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집과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식, 전토까지 버렸습니다』(막 10, 29).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죽임당하는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카타콤 생활(Catacombs, 초기 그리스도인들 피난처, 지하묘지)도 自處했습니다. 자신들이 ‘그리스도따르미’라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그들의 신앙과 삶의 北極星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일찍 죽임 당하셔서 그의 피로 자기들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따름이, 곧 能力이고, 富이고, 지혜이고, 힘이고, 尊貴이고, 영광이고, 찬송임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말씀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표지판(나침반)이었습니다. 그 신앙으로 로마의 박해도 견뎌냈고, 유대종교의 박해도 견뎌냈습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길이 무엇입니까?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끝없이 높아지려고만 하는 上向的인 욕망을 버리는 길입니다. 형통복음을 포기하는 길입니다. 이 땅에서의 형통이 곧 구원이고 축복이라는 세속적인 신앙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내가 무슨 직장을 다니느냐? 얼마나 높은 자리로 승진하느냐? 내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뜨고 인정을 받느냐?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들입니다. 혹 한 다섯 달란트의 자리입니까? 혹 두 달란트의 자리입니까? 혹 한 달란트의 자리입니까? 받은 그 달란트가 얼마든지 상관없습니다. 내가 있는 그 자리가 어딘가?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公義를 행하고 仁慈를 사랑하고 謙遜히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란트도 결코 작은 것 아닙니다. 한 달란트는, 당시 勞動者 임금 15년 치에 해당하는 가치입니다. 요즘으로 환산하면, 연봉 3000만원으로만 계산해도 한 달란트는 4억 5000만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리 안 받았다 해도, 최소한 그 정도의 달란트는 기본으로 다 받은 자입니다. 그 달란트로,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십자가에 길로 가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능력, 생명, 구원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고지를 점령하는 길로, 성공하는 길로, 권력과 명예를 얻는 길로 나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익숙한 길이 아닌 낯선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상식적인 지식의 길이 아닌, 대안적인 지혜의 길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길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참 예배자의 삶의 길이 있습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포스트모던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 인생의 기준점, 북극성입니다. 예수님의 복음말씀 나침반을 들고, 북극점인 예수님을 향해 항해해 나가십시다. 아멘.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 12).

하나님,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높이며 경배하며 예배합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없는 교회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없는 그리스도인 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만을 높이며, 따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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