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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엡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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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엡 2:8-9)
  

2005년 3월 11일자 국민일보 겨자씨 란에 아름다운 희생의 이야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여기자 ‘줄리아나 스그레나’는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종군 기자였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자는 단신으로 이라크에 들어가서 취재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장단체에 의해서 납치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이탈리아 정부는 비밀요원을 보내 이라크 무장단체와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이 여기자는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출 이후, 비밀요원과 여기자가 바그다드 공항으로 오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미군들이 오인하여 여기자가 탄 차에 총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비밀요원 한 명이 죽고, 두 명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줄리아나 스그레나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비밀요원이 그 여인을 감싸 안았기 때문입니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질 때, 비밀요원 ‘리콜라 칼리파리’는 조국의 언론을 자기 가슴에 얼싸안았습니다. 

총알은 그의 등에 박혔습니다. 
결국 그는 죽었고, 여기자는 살아남았습니다.
이 여기자는 귀국한 후 기자 회견장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울먹였습니다. 
“나는 그의 거룩한 죽음을 내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이 죽음은 나를 위한 죽음이구나.’, ‘이 죽음으로 나를 살렸구나.’라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 느낌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 느낌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겠어요?
오늘은 두 가지 작은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믿음의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1.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본문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잘 합니다. 

“너 이번 시험에 학급에서 1등하면 선물로 자전거 사줄게.”
그래서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급에서 1등을 했습니다.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여러분, 엄밀한 의미에서 자전거가 선물일까요 아니면 노력한 대가일까요?
선물이 아니지요.
그것은 자식이 밤잠 안자고 노력한 대가일 뿐입니다.

선물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 공로도 없지만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구원이 바로 그런 선물이란 말씀입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 무슨 공로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감사하게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왜 구원이 선물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구원은 나의 의로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근본적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물이라고 합니다.
교우들이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너져요.
바울 사도가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누구의 의’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인해 구원받기 때문에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입니다. 
그 의미는 물건 값을 다 치렀다는 것입니다. 
세금 고지서를 받았다면 세금을 다 지불했다는 것이고, 빚을 진 것이 있다면 그 빚을 다 갚았다는 것입니다. 

죄인이었다면 받을 형벌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불이 완료되었으므로 더 이상 지불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모든 대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불하셨다는 것, 이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그렇게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몇몇의 사건들이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입니다. 
그 때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습니다. 

출12:23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여호와께서 무엇을 보시면 넘어가신다고 했습니까?
‘문 인방과 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러분께 다시 묻습니다.
문 인방과 설주에 피가 있는 집 안에 강도가 있었으면 그는 구원받았을까요, 받지 못했을까요? 
구원받았지요!
문 인방과 설주에 피가 있는 집 안에 살인자가 있었으면 그는 구원받았을까요, 받지 못했을까요?
구원받았지요!

왜냐하면 구원받는 것은 집안에 있는 사람의 의 때문이 아니라 피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문인방과 문설주에 피가 있는 집 바깥에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선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구원받았을까요, 받지 못했을까요?
못 받았지요!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그 사람이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피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양의 피였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어제나 이제나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면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는, 대충 말로 때워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죄는 생명을 바쳐야 해결되는 엄중한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을 바쳐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어린 양이 죽어야 했습니다.
어린 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모형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을 바쳐야만 얻을 수 있다는 예를 들어보지요. 
1941년도 6월 31일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히틀러는 폴란드에 포로수용소를 건설해 놓고 수많은 유태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때 유태인만 죽인 것이 아니고 폴란드 사람들도 많이 죽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죽기 살기로 탈출했습니다. 
탈출이 계속되자 포로수용소에는 규칙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탈출했을 때 그 캠프에 남아 있는 사람 열 명을 죽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서로 감시해서 탈출을 못하도록 한 규칙이지요.
어느 날, 요란스럽게 사이렌이 울리고 모든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였습니다. 
한 사람이 탈출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사람 중에서 열 명이 죽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을 일 열로 세웠습니다. 

수용소 소장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죽을 사람을 지적했습니다. 
“너, 너, 너, 너, 너, 너, …….”
그러다 소장이 ‘프란시스 게요니첵’이란 사람을 가리키며 “너!”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불쌍한 아내와 아이들, 이제 내가 죽으면 어떡하나’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에, 동그란 안경을 쓴, 키가 작달만한 사람이 한걸음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신부입니다. 저는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습니다. 제가 저 사람 대신 죽겠으니 대신 끌어가십시오. 저가 죽으면 한 사람이 죽는 것이지만 저 사람이 죽으면 일곱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소장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맥시밀란 콜베’라는 신부였고, 결국 그는 사십칠 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십 년이 지난 후인 1982년 10월 12일,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 신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에 십오만 명이 모여서 성대한 장례식을 가졌는데, 그 장례식에는 프란시스 게요니첵의 아내와 아이들, 손자와 손녀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 분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겠어요?
지금 우리는 똑같은 고백을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사탄의 참소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공격해옵니다. 
“아무개 장로야, 권사야, 집사야, 너 기독교인 맞니? 너 그 따위로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니? 너 거짓말했잖아? 너 기도도 안했잖아? 너 미워했잖아? 그렇지? 
이 때 내 자신의 의로 사탄에 대항해서는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나 같은 죄인이 어디 있다고.......감히 전도를 해.......”
이럴 때 사탄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즉시 우리의 관심을 나 자신과 내 죄로부터 십자가로 돌려야 합니다. 
사탄이 “너 이런 죄 지었지?”하면서 공격하면, “그래, 그게 사실이다. 나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라고 대답하십시오.

영어 문장에서 But(그러나)이 나오면 그 이후의 이야기가 진짜입니다. 
“But(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으므로 나는 더 이상 그 죄와 상관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마귀는 슬그머니 물러가게 됩니다.
내 의를 내세우면 사탄이 집요하게 공격해오지만 십자가를 내세우면 사탄이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의로 막아야 합니다. 

D.L. 무디에게 한 청년이 와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지은 죄를 다 회개했습니다. 그런데도 한 가지 죄가 잊어지지 않고 계속 기억나서 괴롭습니다. 이 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무디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예수 믿는 사람 맞는가?” 
“네 맞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자네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것을 믿는가?” 
“예, 믿지요.” 
그 때 무디가 버럭 화를 내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잊으신 죄를 왜 자네가 기억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이미 용서하셨다는데 왜 용서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태도는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십자가의 보혈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의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제야 청년은 그 호통을 듣고 “정말 그러네요.”하고 돌아갔습니다.

2.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왜 믿음의 고백이 중요합니까?

롬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으리라.”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으리라.’
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받는 데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합니까?
여러분, 대답해보세요.
결혼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흰 드레스? 예물? 수많은 하객?
어떤 의미로 그런 것은 없어도 됩니다.
결혼식의 핵심은 ‘고백’, 사랑의 고백입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겠습니다.”
바로 그 고백이 결혼식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핵심이 아니라면 그 결혼은 잘못된 결혼입니다.
고백하는 순간은 짧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의 효과는 생명을 다하는 순간까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그 고백은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그 고백의 효과는 영원합니다.
그날에 주님께서 “너, 그때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지.......” “너 그때에 나를 주인으로 모신다고 했지.......”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실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늦게 믿은 할머니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가 앓아누운 지 오래지 않아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그렇고 가족들이 보기에도 할머니가 믿는다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고,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그런 상태였습니다.

임종예배를 드리러 가보니 할머니의 얼굴이 흙빛이었습니다.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게 분명했습니다.
건강했다고 죽을 때 얼굴이 환한 것은 아닙니다.
병약했다고 죽을 때 얼굴이 어두운 것은 아닙니다.
할머니의 손을 붙들고 귀에다 입을 갔다대고 따라 고백하도록 했습니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가 끝나는 순간 기적을 보았습니다.
흙빛이었던 할머니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게 아닙니까?
기억하십시오.
“확신이 생겨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고백하고 나면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함께 고백합시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도 따라하시고, 오랫동안 믿는 우리 교우들도 따라하세요.
10년, 20년을 신앙생활 했지만 대충 믿었을 뿐 제대로 입으로 시인하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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