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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이 보여준 성공적인 삶의 비결 (히 1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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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보여준 성공적인 삶의 비결 (히 11:8-12)
  

인류 역사에 있어서 아브라함처럼 성공한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 아니라, 2억이 넘는 아랍인들이 그를 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혈통 관계를 떠나서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를 들 것도 없이, 아브라함을 자기의 조상으로 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처럼 많다는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아브라함은 가장 성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애초부터 그러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부친 데라는 우상 숭배자일 뿐 아니라 아예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란 아브라함이었으니 자연스레 우상 숭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란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믿음의 인물이 되어서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일까요?

첫 번 째로, 아브라함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창세기 11장에 보면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31).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로부터 정식으로 그의 생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로부터 그의 인생은 성공을 향하여 올바른 방향을 잡았습니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우상을 숭배했던 그의 조상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무익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었을 리도 없고, 선민의 조상이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하나님을 제외한다면 빈껍데기밖에 남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자기를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선민의 조상이 되고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근거는 아브라함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이르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알지 못하는데, 이 점은 아브라함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타 종교들은 사람이 신을 찾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은 죄와 허물로 인해 그 영이 죽었으므로 영이신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장 2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나타내 보여 주셨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말씀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알아낸 신이란, 결국 우상에 불과합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하면 공부를 많이 했더라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인간에게 계시해 주지 않으시면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아브라함은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누구를 부르시고 나서 후회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완전무결한 사람만 부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인격적으로 훌륭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약점도 실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완전한 사람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잘나고 지혜 있고 탁월한 사람만 부르신다면 별로 자랑할 것이 없는 보통 사람들은 구원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나고 지혜 있는 사람보다 오히려 못나고 미련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장 27절로 29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나고 지혜로워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지 않으셨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물마시듯이 죄를 짓고 살면서 이 세상의 허탄한 것들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땅에서 아무리 재물과 명예를 얻어서 세인들로부터 성공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성경에 인생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화는 풀의 꽃과 같으니, 꽃은 떨어지고 풀은 마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생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악 가운데 헤매던 우리를 불러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어려운 고비를 만났을 때 또는 마음에 시험을 당할 때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게 되실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아브라함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음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75세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75세는 결코 젊은 나이가 아닙니다. 그 나이에 평생을 살아온 고향과 생활 터전을 버리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땅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그의 가문을 이을 장자였습니다. 한국인들 가운데는 유교적인 관습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아서 조상의 제사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도 한국인들은 장손이 예수를 믿는 것을 대단한 일로 여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는 장자의 책임과 특권이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장자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자 곧바로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렇다고 행선지를 정하고 떠난 것도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면서 다만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니 그 명령에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그의 친척들은 이 같은 아브라함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을 지시를 받았다고 하더니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니냐고 쑥덕거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아브라함이 옳았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났던 그의 행동은 가장 위대한 믿음의 행동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처럼 하나님의 지시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기만 하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아브라함은 무슨 일을 하든지 다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라함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금방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었어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 끝까지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하였더니 죽은 자와 방불한 아브라함과 사라가 독자 이삭을 낳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들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말씀드리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집에서 기른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현실을 보면 아무 가망이 없었습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90세난 사라가 어떻게 아기를 잉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약대로 그에게 아들을 낳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하신 창세기 15장 6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입은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통틀어서 아브라함에 관한 기록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 바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한 창세기 15장 6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 말씀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입은 것 역시 우리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고 순전히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고, 있다면 죄와 불의한 것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런즉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답게 아브라함처럼 무슨 일에든지 믿음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 째로, 아브라함이 성공적인 삶을 살은 것은 그가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감동을 받는 또 한 가지는 그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 곧 신본주의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재물관을 살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풍족한 삶을 원합니다. 그래서 법과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재물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검찰 비리도 알고 보면 돈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국가가 부여한 권한을 개인의 치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되고 맙니다.

한번은 아브라함에게 큰 재산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소돔 왕이 인근의 네 왕과 동맹을 맺고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연합군과 전쟁을 하였으나 패했습니다. 그돌라오멜은 소돔 거민을 포로로 잡고 많은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 때 조카 롯도 잡혀 갔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즉시 집에서 기른 사병 318명을 이끌고 단까지 쫓아가서 밤중에 기습하여 적을 파하고 잡혀간 소돔 거민과 조카 롯과 빼앗긴 모든 재물을 도로 찾아 왔습니다. 

그 때 소돔 왕이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당신이 다 가지십시요”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소돔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약속합니다. 나는 당신의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도, 신발 끈 하나도 가지지 않아서 ‘내가 아브람을 부자가 되게 만들었다’는 말을 당신이 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젊은이들이 먹은 음식 말고는 그 외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와 함께 싸움터에 나아갔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몫만은 그들에게 주십시오.” 

아브라함은 그 재물을 차지할 권리가 있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소돔 왕이 주는 재물을 받으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 재물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창대케 되더라도 사람들은 그가 소돔 왕에게서 재물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오해를 살만한 일을 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아가려면 재물이 필요하지만 성도님들께서는 경제활동을 할 때에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돈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의연하게 살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성도님들의 필요에 부족함이 없도록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또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한 동안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살았으나, 세월이 지나자 각자의 가축이 많아져서 목초로 인해서 목자들이 다투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한 골육이 아니냐? 그러니 내 목자나 네 목자가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보니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한 것이 에덴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요단 들을 택하고 떠났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척박한 고원 지대인 헤브론으로 장막을 옮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롯과 아브라함의 차이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롯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선택했지만, 아브라함은 목축에 유리한 지역을 롯에게 양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유리한 환경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주한 헤브론은 화려한 거리도 없고 먹고 마시고 즐길 것도 없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또한 롯이 요단 들을 택한 것은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요단 들은 번성한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와 인접해 있었거든요. 그 후에, 롯은 점점 장막을 옮기다가 나중에는 소돔 성 안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러나 롯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은 그 후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과 유황을 내리셔서 소돔을 멸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지 세속화된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문화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다 세속적인 것 들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소돔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왜 우리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힘써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속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주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의 교제에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할 때 아브라함의 자녀답게 경건한 삶을 영위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독자 이삭이 청년이 되었을 무렵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독자 이삭 중에서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에 쓸 나무와 불과 칼을 가지고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삼 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당도한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올려놓고 손에 칼을 들어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예,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말씀하기를 “네 아들에게 손대지 마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마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나무에 뿔이 걸려 있는 숫양 한 마리가 보이는지라, 그 양을 잡아다가 이삭 대신에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음을 말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 중심으로 산 것은 그가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면서 산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은금이 풍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동안 장막에서 지냈습니다. 석재나 목재를 써서 집을 지을 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9)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그네 인생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물질 문제로 인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들의 본향이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임을 알고, 보물을 쌓되 이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 창고에 쌓아 두고, 허탄한 일로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계 여러 박물관에는 고대 여러 왕국의 제왕들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아브라함의 유물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살다가 간 집터도 찾을 수 없고, 그가 사용한 그릇이나 가재도구도 없습니다. 이는 평소에 그런 것에 관심이 없이 살았던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그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복의 근원이 되어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언제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행하심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 누리는 인생의 성공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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