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시 회복 되어야 할 사명 (눅 24:30-35)

  • 잡초 잡초
  • 382
  • 0

첨부 1


다시 회복 되어야 할 사명 (눅 24:30-35)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실망하여 엠마오를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12km쯤 엠마오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두 제자가 실망과 슬픔에 젖어 황혼녘 엠마오를 향해 길을 가고 있습니다.(요즘 교회 제자 훈련- 지리와 기후- 성수동) 이 "엠마오"라는 말은 원문에서 "모른다. 알지 못하는 길"이란 뜻입니다. 엠마오 길은 불확실한 길입니다. 방황의 길입니다. 

여기 내려간다는 말은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바클레이 박사가 지적한 대로 석양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지리적으로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석양을 향하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도 석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들은 해돋이를 향해서 걸어가지 않고 석양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해돋이를 향해서 걸어가야 하는데 두 제자들은 석양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 길은 낙심의 길이었습니다. 실의와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길이었습니다. 17절에서는 이들이 "슬픈 빛"을 띠었다고 기록합니다. 엠마오 길은 슬픔의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뭐,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하여, 목 놓아 울 수밖에 없는, 눈물의 길, 슬픔의 길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불신과 절망 가운데서 슬픈 빛을 띠고 석양을 향해서 힘없이 방황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고 사는 불행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왜 이들이 이처럼 희망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겨 방황의 길에 들어섰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붙잡았던 것이 무너질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때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칠만큼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결정한 그 일에 조금도 후회함이 없이 보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갈릴리 3년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뭐, 돈이 없어도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도, 그게 그들에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자신을 알아주었고, 믿어준 예수님에게 날마다 가까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희망이었던 예수님이 허무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그 무너진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겐 그들이 따랐던 목표가 없어졌으니 무슨 여기에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방황의 길로 들어 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단어가 있다면 두 가지가 있는 데 하나는 반항이라는 단어와 또 하나는 방황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반항, 참 힘들어 보이지요. 우리 다 한번 씩 해 보셨지 않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머리는 산발만해지고, 손톱은 길어지고, 아침마다 학교가면서 뒷주머니에 도끼 빗 하나 차고 다니면서 연실 빗질을 합니다. 뭐 별 모양 다 안 부려 보셨습니까? 청소년기 그 방황 아직도 하고 계신 분계십니까? 그 청소년기의 반항기, 그거 다 지나가지 않습니까? 

어느 성도 한 분이 뭐 울상이 되 가지고 ‘목사님 저희 집은 지금 전쟁이고 지옥입니다. 우리 집 아이가 반항의 절정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왜요? 물어보니까 ‘머리는 배추머리고요, 물감을 칠했는 데 지난 날 미국에서 보던 영화의 한 장면이 지금 자기 현실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귀에는 귀걸이를 하고, 또 바지는 푸대자루처럼 해 가지고 평소에는 청소도 안하는 녀석이 온 동네 마당을 쓸고 다녀요.’ 울상입니다. 제가 괜찮습니다. 우리도 지난 날 다 방황 한 번씩 해보지 않았습니까? 이는 소위 성장의 아픔입니다. growthing pain 성장의 고통 

반항은 무서워 보여도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황입니다. 방황은 눈에 안 보여요. 남자고 여자고 마음 속에 이루어지니까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우리의 한 번 뿐인 인생을 병들게 하고, 우리를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 방황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채 방황하는 분계십니까? 

내가 일하긴 하는데 손을 대긴 대는데 내가 이 정도로 할 사람인가? 하면서 하는 일에 대해서 방황 중에 계신 분계십니까? 또 무엇인가 사업을 추진하다가, 그만 장애물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다시피 한 분들이 계십니까? 그 분은 자신에게 맡겨 준 일 조차도 끝내지 못 한 채 인생을 마칠 사람입니다. 또 10년, 20년을 한 지붕 밑에서 부부가 함께 살면서도 아직도 내가 누구하고 살지가 결정 안된 분이 계십니까? 그 방황 빨리 끝내야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 마져도 꺼뜨리기를 심히 원치 않으시는 그 주님의 가슴에 내 인생을 던지셔야합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이 방황하는 이 인생을 누가 거들떠보기나 하겠습니까? 요즘도 보면 실패한 자들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는 게 현실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남을 짓밟고서라도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아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요? 남들이 다 외면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들에게 누기 다가가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택한 자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여러분을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탕자처럼 멀리 떠나 그분을 잊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기다리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에 짝하여 방탕할 때도 그분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쾌락에 묻혀 살 때도 그분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누가 다가 가셨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여기 누가 동행했다고 합니까? 예수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 앞에 무릎 꿇은 예수가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그들에게 다가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알아보지 못했다” 했습니다. 영적 안목이 무뎌졌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32절에 보면 가슴에 타오르던 불마져 사라져 버렸습니다. 32절입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들은 처음부터 냉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주님께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까? 왜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지고 말았습니까? 왜 시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과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왜 이처럼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져 꺼진 불처럼 돼버렸을까요? 그들이 그토록 자신의 삶을 다 드려도 후회하지 않던 그 사명을 버리고 석양과 함께 방황 속에 빠져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침!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주님 닮기를 열망하던 우리의 시선은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지 못한 채 땅에만 머물러 있지 않으십니까? 복음을 위해 죽으면 죽겠다는 헌신과 희생으로 불타던 모습은 온데 간데없고 다 타버린 잿더미처럼 싸늘하게 식어진 채 무력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사는 열정을 상실하고, 열정을 잃어버린 그 비참한 자신의 현실 자체를 직면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인생을 다 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먼저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삼손을 아시나요? 그 능력의 삼손이 여인의 무릎 앞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당한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두 눈이 뽑힌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몸을 놋줄로 묶고 연자 멧돌을 돌리게 하는 무기력한 인생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119:18절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이는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눈이 닫히면 성도는 소망이 없습니다. 지금 보세요. 자기 옆에 예수님이 동행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리고 가슴은 더 이상 뜨겁지 않습니다. 열정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우리 자신이 비참한 것은 내 가슴에 열정이 식어버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열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요즘 시중에 나온 책 가운데 몰입이라는 미하이 칙센트가 쓴 책이 있습니다. 몰입한다는 책입니다. 그 부제는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 여기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멋진 행복은 나의 관심을 완전히 사로잡는 의미있는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데 있다.’ 참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눈을 돌리면 우리의 관심거리가 얼마나 주변에 널려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관심사 중에서 진짜 의미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의미있는 일을 발견해서 능숙하게 해 내놓고 싶은 열망. 그 뜨거움이 바로 자기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한생을 정말 멋지게 그 일에 던집니다. 후회없는 열정을 가지고 삽니다. 사도 바울 역시 롬12:11절에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열심을 품고“ 는 어글로우 위드 더 스피릿 성령으로 불타라는 말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영적인 안목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 아-멘 오늘 주님은 좌절 속에 방항하는 제자들에게 다가 오셔서 그들의 눈을 열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 다시 한번 뜨거운 불을 지피기 위해 두 가지를 하십니다. 

1. 성경을 자세히 풀어 주십니다. 보세요. 지금 예수님 자신이 함께 동행하는 줄도 모르는 이 들을 향해 25절 에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들의 문제는 말씀 앞에 바로 서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에 쓴 것을 자세히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몇 해 전에 국민일보에 실린 기사를 하나 소개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무역의 날에 500만 달러 수출 탑, 100만 달러 수출 탑을 휩쓴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대명무역상사를 경영하는 김용순 사장이라는 분인데, 참 믿음이 좋은 집사님입니다. 섬유 원단을 수출하는 회사인데, 섬유 제조업은 사양길에 있는 사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사업을 잘했는지 수출 탑을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사업을 성공시킨 비결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은 너무나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씁니다. 성경 필사를 하면서 샘솟는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사업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는 40대 나이에 지난 7년 동안 매일 새벽 1시에 일어나서 5시까지 4시간 동안 성경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써 8권이나 썼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쓰는 동안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았던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교만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성경을 쓰다 보면 천지가 내 것 같아집니다. 필사를 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고, 항상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시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도 겁나지 않고, 사업하면서 자금난이 나빠져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엔 일이 쉽게 잘 풀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힘을 잃어버리고 앉아 있으면 말씀을 통해서 그를 붙들어 일으켜주시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없고 사람이 두려우면 누구든지 담대하게 대할 수 있도록, 여유를 갖고 사람을 대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성경을 필사하는 분이 10만 명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쓰든, 읽든, 외우든 좋습니다. 그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마음에 담고 주야로 묵상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면,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 나에게 힘을 주시고 치유하시고 나로 하여금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아무도 흔들지 못하도록 강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이런 사람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런 사람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여기 보세요. 32절에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말씀 앞에 서니까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읽을 때나 성경 말씀을 들을 때나 심령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그 말씀이 무엇인지 몰라서 멍해 있으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맘속에 희망과 용기가 되야 합니다. 

2.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길을 더 갈 수 없게 되자, 두 제자는 성경 말씀을 잘 가르쳐 준 예수님에게 ‘우리와 같이 머물고 우리에게 더 말씀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기도를 하실 때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눈을 환하게 밝혀주십니다. 여러분, 기도함으로 눈이 밝아집니다. 인생을 어둡게 사는 사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순간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항의 길로 가던 이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다가 오신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바로 ‘부활의 사명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자 33-35절을 보십시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여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잃어버린 신앙의 원위치로 돌아왔다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허물 된 행동을 회개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로 되돌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되돌아갈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때로 절망과 어둠과 낙심이 있어도 떠나서는 안 되는 곳은 영적 예루살렘입니다. 물질과 번영으로 출세해도, 인생의 행복한 길을 달리는 그 때도 예루살렘은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운 엠마오의 인생길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찬란한 생명의 빛 되신 그리스도가 계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내가 세워놓은 뜻, 야망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비전에 붙잡힌 사람,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달려가는 인생은 너무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역경이나 환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은 소명의 문제요 사명감의 문제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알고, 그것을 위해 쓰임 받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0:18-20절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통한 열방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버지의 비전이요, 우리의 비전입니다. 위대한 명령에 대한 위대한 헌신은 위대한 사람, 위대한 교회를 만듭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따뜻하게 피었나니/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그렇습니다. 우리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꽃들도 비바람 맞으며 자랐습니다. 때로는 꽃잎이 상처를 받기도 하고 가지가 꺾이기도 합니다. 뭐, 이는 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상처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삶의 절망의 계곡에서 빠져 나오려다 온몸이 찢겨진 사람, 실패와 좌절의 빈방에서 목놓아 울다 지친 사람, 고독의 골방에서 외로움에 떨던 사람... 저마다 아픈 세파를 지나 자기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 가는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이런 나를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를 다시 일으켜 당신의 동반자로 쓰시기를 원하는 그분과 함께 다시 일어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