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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태가 전하는 부활은? (마 2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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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가 전하는 부활은? (마 28:1-20)


부활주일 이후로 우리들은 ‘누가가 전하는 부활’과 ‘요한이 전하는 부활’에 대하여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음서의 기자가 전하는 부활의 주제와 목적을 잘 알아야만 우리가 교회로써 가장 중요한 부활신앙을 잘 정립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부활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와 약한 자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는 증인으로 사는 자가 누가가 전하는 부활을 믿는 신자의 삶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부활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양을 먹이는 자가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입니다. 선한 목자로써 주님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도록까지 주님을 따르는 자가 요한이 전하는 부활을 믿는 자입니다. 

그럼 오늘은 마태복음에서 마태가 전하는 부활에 대하여 여러분과 제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의 결론적인 주제는 오늘 본문 가운데 있습니다.

 18-2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부활을 전하는 28장 안에서도 그 결론을 나타내며 마태복음 전체에 대하여서도 결론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이 결론의 핵심은 또 무엇입니까?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했으니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모든 권세를 물려받았다고 하시므로 주님께서 이제 모든 권세의 왕으로 오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우리가 쉽게 말하는 전능하신 왕, 권능의 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전체적인 내용에서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언약의 성취를 계속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처음에서 말하듯이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나라를 완성하는 후손으로 나셨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한 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으로 나셨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한 자였으나 예수님은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자로 나셨습니다.

이렇게 선지자의 약속을 이루시는 임마누엘로 나셔서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2:2절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도 빌라도 총독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27:11절입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셔서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님으로 제자들 가운데 오셔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시며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땅의 권세를 가진 왕이라고 하면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으신 왕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예로 들어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예전에 우리 나라에 권투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챔피언을 넘어 세계챔피언이 되었을 때 우리 나라는 크게 열광했습니다. 홍수환선수같이 4전5기의 신화를 이룬 선수도 있었지만 저는 김태식 선수를 지금 생각해 보면 제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김태식 선수를 소개하는 글을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161cm의 작은 키, 플라이급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적은 유난히 KO승이 많았다. 그는 불과

프로데뷔 14전 째만에 10연속 KO 승을 기록한 괴물이었다. 1980년 파나마의 루이스 이바라를 상대로 WBA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 김태식은 종이 울리고 4분여 만에 250발의 엄청난 훅을 날리며 2R 1분 11초만에 KO로 승리를 따냈다. 세계 챔피언 재위기간 10개월이라는 짧은 영광을 누린 김태식. 그는 관중을 몰고다니는 '풍운아'였다. 

이렇게 유대인의 왕으로 통치하던 아브라함과 다윗의 나라를 완성하셔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모든 권세의 왕으로 오르셨다고 마태복음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마태복음에서 다른 표현으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 표현했습니다. 

마가복음과 같이 마태복음에서도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주님은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죄사함의 권세는 예수님이 죽으실 때도 나타났습니다. 

마 27:51-53절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 그가 부활하시자 무덤이 더 이상 성도들을 자기 권세 아래 가두지를 못하였습니다. 죄와 사망이 지배하던 시대가 끝났습니다. 이제 부활의 권능으로 함께 통치하는 새로운 왕이 등극하심으로 무덤의 감옥이 다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예수님을 거기서 뵈올 수가 없었습니다. 천사가 증거하듯이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였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주님이 살아나셨음을 알리고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그를 뵈오리라고 천사들이 증거했습니다. 

이는 마치 독재정권 하에서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혔던 자들이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일시에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함을 얻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권세의 왕으로 오르셨음을 마태복음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기에 그에게 경배함을 강조합니다. 그가 나셨을 때부터 경배하러 동방박사들이 온 것과 같이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 갈릴리 산에서 11명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뵈었을 때도 경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그 부활을 믿는다 함은 마태복음에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이에게 경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권세의 왕이심을 알고 경배합니다. 마태가 전하는 부활은 부활의 주님을 뵙고 그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처음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에게 동방박사가 경배하였으나 헤롯 왕과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죽이려 하였듯이, 여인들과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보고 경배하였으나 유대인들은 거짓 소문을 속아서 듣고 경배하지 않았다고 마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경배한다는 말은 단순히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면 그만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 그 왕에게 경배하고 그의 명령을 들음이 그 경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말 뒤에 당연히 ‘그러므로’가 따라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의 뒤에는 또 당연히 명령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명령입니까? 그 명령은 간단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만들어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명령은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과 후가 서로 다릅니다. 12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10:5-6절에 ‘예수께서 이 12을 내어보내시며 명령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기 전에는 이방인의 길로나 심지어 사마리아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양에게로만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권세의 왕으로 오르셨을 때는 이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부활의 주님을 왕으로 경배하는 자들은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듣고 따르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천국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들을 주인에게 청하라고 말했습니다. 

9:35-38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이처럼 마태는 ‘제자를 삼으라’는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맞게 ‘천국의 일꾼을 부르심’(9:35-16:20)과 ‘천국의 일꾼을 가르치심’(16:21-25:46)의 큰 주제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제자들을 만들까요?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세례를 줍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냥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세례예식에 있어서 반드시 이런 단어들을 사용해서 세례를 주라는 의미입니까? 일차적으로 세례는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얻으신 새로운 왕의 나라에 가입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세례가 됩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세례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와 여호와의 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로 세례가 되는 것입니다. 즉 주인과 종의 관계로 들어가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들어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말해서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만들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신약의 교회가 부활신앙을 가지는 탁월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죽으셨고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므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뵙던 휘장 밖에서의 교제가 끝이 났고 이제 새로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교제가 열린 것입니다. 

구약처럼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육신의 자녀로 낳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관계가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었던 것과 같이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새로운 출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를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 속에는 가르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 가르칩니까? 그 가르침을 따라 지키게 하려고.

그럼 우선 예수님은 무엇을 분부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5편의 설교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5편 중에 대표적인 것은 5장에서 7장까지 기록한 산상설교입니다. 이 설교를 예수님께서 하시고 나자 그 반응에 대하여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7:28-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대하여 마치 28장의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했던 것처럼 권세 있는 자의 가르치심이었다고 하며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의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같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상설교 안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너희는 들었으나’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일정한 형식을 되풀이하시면서 주님은 산상설교의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변화산에 주님은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었으나 그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희는 내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내산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면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의 말이 아니라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 서두에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가르친 종의 의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아들의 의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가르치심을 5-7장에 산상설교로 가르치시고 이 가르치심은 어떠한 권능으로 가르치심인가를 8-9장에 주님이 권능으로 많은 병자를 고치심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르치심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심을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내시고 부활의 권능을 갖고 제자를 삼는데 그 제자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가르치심의 명령은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도 산상설교의 주님의 나라 곧 천국시민이 사는 법을 가르치신 후에 9:35-16:20절까지 천국의 일꾼인 제자들을 부르심이 나오고, 뒤이어서 부르심을 받은 천국의 일꾼들이 어떻게 이 가르치심을 지켜야 하는지 16:21-25:4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치심을 지켜야 하는 일꾼으로서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16:21-28절을 함께 보십시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주님이 가르치심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로서 행하신 일에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일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 가르침을 따라가는 자가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자가 주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어떤 자가 으뜸이 되는 주님의 일꾼입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주님을 따르는 자여야 합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왜 올라가십니까?

 20:17-19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하실 때에 12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하시는 능욕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길에 동행하는 자가 주의 가르치심을 지키는 자입니다. 

이렇게 좇는 것은 모세를 따라 구약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과는 다릅니다. 그렇기에 세상 나라와는 다른 원리를 따라 지켜야 합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나라에 으뜸이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0:27-28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럼 누구를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마태는 주님은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후에 곧이어 여리고 소경 두 사람을 말합니다. 두 소경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하사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좇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지키도록 하심은 바로 눈 먼 소경을 보게 하시고 주님을 따르게 하심이었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단순히 예수 믿어서 천당에 가는 자들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 삼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제자 삼는 일을 하는 천국의 일꾼들에게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함께 집을 짓고 그 안에 동거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더불어 함께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부부가 결혼하면 한 집에 거합니다. 어떻게 거합니까? 그저 육신이 한 곳에 있기 때문에 거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랑하기로 맹세한 언약을 따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요?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뵈옵고 그가 내리신 명령을 지키어 사는 것은 새 언약으로 함께 하는 것이요 한 집에 동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까지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십니다.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후에 이스라엘이 성소를 다 지으면 이제 여호와께서 그 성소로 강림하셔서 그 안에 거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하나님은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요 영원한 별거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곧 지옥에 들어가 영원한 진노가운데 두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기독교가 갖고 있는 복음의 핵심인 우리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만약 입으로 ‘예’만 하신다면 그는 부활을 의심하거나 믿지 않는 자입니다. 마태가 전하는 부활을 자기 신앙으로 고백한다면 주님을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으신 왕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이에게 오늘 부활의 날에 모든 천국백성들이 경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세상 나라의 왕을 만나는 정도가 아닙니다. 로마의 황제를 만나는 정도도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뵈옵는 것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이를 뵈옵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 우리의 예배 자세가 이렇게 형편없어서는 안됩니다. 휘장으로 가리우고 두려움과 죽음의 권세 아래서 만나뵈었던 구약 백성들도 이런 자세로 여호와 앞에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전체 구원역사 가운데 전혀 없었던 아주 망령된 예배들 드리는 게 아닌가 매우 염려가 됩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결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부활의 주님을 뵙는 것이 신약의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뵈옵는 것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어서 언약의 성취로써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새 언약과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모세의 율법으로 사는 삶을 폐지하고 그 율법을 완성한 새 율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자는 어떻게 자기 삶에 부활을 나타내며 삽니까? 제자를 삼습니다. 결혼의 새언약으로 함께 하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가르치며 양육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은 이처럼 육신의 질서에서 후손을 낳고 율법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의 나라는 혈통으로 나는 나라가 아니어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므로 주님 안에 거하고 새 백성을 낳습니다. 제자를 삼는 일이 자연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세례를 주고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따르도록 합니다. 주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으신 왕으로 오르신 길을 제자들로 하여금 따라가게 합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서 우리 가정의 자녀들은 혈통으로 낳았지만 그 자녀가 온전케 됨은 주님의 제자 삼는 일입니다. 낳고 가르치고 기르는 일이 자식을 위한 부모의 봉사이지만 이제 천국백성으로 제자 삼는 일이 부모에게 위탁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일꾼으로 기를 것이냐, 천국의 일꾼으로 기를 것이냐 선택하셔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보고 부활의 주님을 믿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어떻게 봉사해야 할 것인가를 잘 드러낼 것입니다.

그 자녀는 대접받기 위한 자녀로 키우시면 주님의 길을 좇지 아니하는 자녀로 기르는 것이요 천하를 다 얻고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가 자기 목숨을 잃는다면, 즉 주님 안에 영생함으로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활을 믿지 않는 부모는 자식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가르치기는 열심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십년을 교회를 다녀도 자기조차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으니 계속 주님의 말씀은 어렵고 깨닫기 쉽지 않으며 가르치기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큰 기쁨으로 뵙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음은 자기 혼자 천당가기 위함이 아닙니다. 천국을 봉사하는 제사장으로 사는 일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제자 삼는 일은 무슨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 자에게 따르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언약적인 삶입니다. 결혼하면 자연스레 아이를 생산하듯, 부활의 영광을 뵙는 주님의 자녀들은 이제 새 언약의 자녀를 출산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바른 온전한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으사 11명의 제자를 삼아 자기 일을 이루신 것처럼, 이제 교회는 모세의 제자처럼 땅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을 제자 삼지 않고,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천국백성으로 제자삼는 일을 위하여 살고 이 영광의 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자기 삶을 왕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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