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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 (합 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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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 (합 3:1~19)
  

'부흥'이란 우리나라 기독신자들이 참으로 많이 쓰고 있는 말입니다.
거의 모든 교회들이 연례행사로 하고 있는 '부흥사경회' 역시 '부흥'이라는 단어와 '성경을 가르치고 배움'이라는 뜻의 '사경'이라는 단어를 합친 말입니다.
비록 우리 귀에 너무 익숙해져서 어쩌면 별다른 감흥을 주기 힘든 말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부흥'이란 단어는 원래 성경에서 발견되는 참으로 멋있고도 귀한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이 우리 기독신자들의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유명한 구절을 통하여 이 '부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부흥케 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문은 '생명을 주다, 살게 하다'라는 동사의 강한 명령문에 해당됩니다.
  
즉 이 말은 전혀 생명이 없던 무생물체에 생명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생명을 지속케 하다.'라는 뜻과 '죽었던 생명을 다시 살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본문의 문맥에서는 '소생케 하다'라는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기 나라 유다를 생각하면서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드림으로써, 바로 이스라엘의 최전성기였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있었던 그 폭발적인 성장력을 다시 자기 민족에게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하나님께 아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흥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과연 어떤 의미에서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두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축복의 말씀과 함께 교회설립 37주년 감사 부흥사경회를 한 주일 앞에 두고 있는 오늘에 바로 하박국 선지자가 가졌던 것과 같은 부흥의 간구를 각자의 심령 속에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 개인적인 소원 성취가 아니라 '주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부흥의 참된 근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그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성도 각 개인에게 궁극적으로 성취될 부흥의 출발점이요 원동력이라는 말입니다. 
1절과 2절 말씀에 "1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2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의 서론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앞서 하박국 1장의 기록을 보고 판단해 본다면, 지금 하박국 선지자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 상황이란 무슨 "주의 일"을 두고 기도드릴 만한 여유 같은 것은 전혀 가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다의 현실은 문자 그대로 엉망진창의 꼴이었습니다.
실로 하박국 선지자는 그야말로 골치 아프기 짝이 없는 '세상 소문'과 '세상 일'에 짓눌려 있는 형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 당시의 남조 유다에는 잔인하면서도 욕심은 또 끝도 없는 사람이 왕이라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등쳐먹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없고,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빼앗기 위해 주먹으로 싸우고 법정에서 소송하는 일이 일상의 다반사였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이제 하나님 섬기는 신앙은커녕 인간관계의 기본적 윤리도, 사회생활의 기본 상식도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어 갔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다란 나라는 사람 사는 꼴은 간 곳 없고 그저 동물적인 생존 본능만 남아 있는 살벌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박국 선지자가 제일 처음 1장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던 동기도 바로 이와 같은 총체적인 국난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지금 여기 3장에 와서는 "주의 일"을 부흥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우리 조국 유다를 소생시켜 주시고 우리 민족 이스라엘을 다시 부흥시켜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마땅히 나와야만 할 법한 때에, 왜 하박국 선지자는 느닷없이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드리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주의 소문을 듣고 놀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주의 소문"이라고 번역된 말은 더 정확하게는 '주님께서 들려주신 소식'이란 뜻입니다.
하박국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들려주신 소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꼴이 엉망이라고 하나님께 탄원을 했었습니다.
  
그런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유다의 죄를 징벌하고 회개케 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침공케 하실 것과 그 바벨론 역시 종내에는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시고 궁극적으로 유다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전혀 뜻밖의 "소식"을 그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 말씀을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 자신은 단지 자기 눈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 놓고 이것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좀 해결해 주셨으면 하고 하소연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다의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관여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훨씬 멀리까지 상세한 계획을 세워놓고 계신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로부터 15절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그처럼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세상 열국과 백성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3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3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4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5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오도다 6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와 같은 역사는 멀리 "데만"과 "바란산" 즉 출애굽 사건 때로부터 시작하여 "구산"과 "미디안" 즉 사사(7절)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시때때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산"들을 무너뜨리며 "강"이나 "바다"(8절) 어디서든지 막힘이 없이 줄기차게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같은 하나님의 일은 "열국"이 벌벌 떨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도 완벽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주의 백성"에게는 구원을 "악인의 집"(13절)에는 멸망을 정확하게 시행하고야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박국 선지자가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실로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대로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향하여 이러이러한 일을 작정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하박국 선지자는 깜짝 놀라면서도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재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잘 이루어져야 자신의 조국과 민족의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자기가 처하고 당하고 있는 모든 인간적인 문제들이 정말 잘 해결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지금 작정하고 추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이 잘 되는 길, 이 길을 거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전혀 있을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박국 선지자는 "내 나라와 내 민족과 내 가정과 나 자신을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기도 대신에 "주는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복잡한 일이 생길 때, 우리의 사업이 어려울 때, 우리가 사는 사회가 시끄러울 때에 '내 주변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런 문제부터 먼저 해결되어야 교회생활이든지 신앙생활이든지 할 수 있겠다.'라고 결코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모든 사건과 형편 뒤에는, 아니 그 모든 것들 위에는 바로 하나님의 깊은 뜻과 넓은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나의 일'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통하여 때로는 때리기도 하시며 때로는 달래기도 하시며 때로는 책망도 하시며 때로는 위로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끝내는 복을 주시고야 마는 그 위대하신 '주의 일'을 오늘도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흥의 본질은 이처럼 '주의 일'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만 합니다.
내 사업이 잘되고 내 가정이 평안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기원하는 부흥의 목표가 되어서는 절대로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의 일'이 부흥이 되어야, 그 '주의 일'에 우리가 바치는 생명력과 활력이 넘쳐야 '주의 백성'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진짜 축복이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일'이 '나의 일'보다 훨씬 더 잘 되어야 하겠다는 기도가 진실하게 나와야만 우리 자신의 '모든 것'들 역시 자동적으로 부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고 계시는 '구속사의 큰 일'이 먼저 부흥하게 될 때에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개인 신자 역시 절로 잘될 수밖에 없음을 꼭 기억하면서 바로 이 참된 부흥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며 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육신적인 환난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하여 만족하게 되는 것'이 부흥의 가장 큰 결과입니다.

그처럼 '주의 일'이 먼저 부흥되기를 기도한 하박국에게 어떠한 결과가 찾아왔습니까?
그것은 그 모든 환난에도 불구하고 그 심령 속에 충만하게 넘친 즐거움과 기쁨의 만족이었습니다.
본문 16절로 17절에서 하박국은 말하기를 "16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유명한 하박국 선지자도 결코 초인은 아니었습니다.
자기 민족이 당하는 모든 재난이 하박국만 살짝 피해 나가도록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내리실 징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하박국 선지자 역시 그 두려움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공포란 것은 "창자가 뒤틀릴" 정도였고 "입술이 떨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바벨론이 자기 나라를 침공해 올 날을 지척에 두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하박국의 심정은 그야말로 '뼛속 깊은 곳이 썩어 들어가는' 기분과 같았으며 '몸이 집안에 앉아 있을 때에도 후들후들 떨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은 그처럼 대다수의 유다 백성들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것이기도 했지만, 설사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죽음에 못지않는 고통이 따를 것 역시 뻔한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황폐된 경작지에서 아무 "소출이 없게" 되는 극도의 가난이었습니다.
'나무의 열매, 밭의 식물, 우리의 가축' - 이것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것들을 모두 잃게 될 날들이 다가오고 있음이 하박국의 눈에 선하게 보이고 있었습니다. 
굶주림과 죽음이 이미 피할 길 없이 자기 민족의 목을 죄어 오고 있었으며 하박국 역시 그 고통을 똑같이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와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어떤 노래를 불렀습니까?
이어지는 18절과 19절에 보니 "18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라는 말 앞에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그러나'에 해당되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 성경에는 이 단어를 그런 접속사로 직역하는 대신 17절의 제일 끝에 "없을지라도"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하여튼 '그러나'라는 접속사나 '무엇할지라도'라는 어미는 같은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곧 하박국 선지자의 현실은 그처럼 '즐거워하며 기뻐할' 만한 상황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도무지 기쁜 찬송은커녕 한숨조차 제대로 나올 것 같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 시대의 정치적 및 경제적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칼에 죽든지 굶어 죽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될 현실이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도대체 하박국 선지자는 무슨 이유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는 바로 그 이유를 밝히기를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도 하며 혹은 악인으로부터 불의한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즉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라도 '여호와를 의지하는 소망'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자신은 끝까지 즐거워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기뻐하겠다고 실로 위대한 신앙고백을 선포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호와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눈에 보이는 세상 형편이 아무리 최악으로 치닫고 있든지 간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으신 분인 것을 하박국 선지자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여호와는 하박국에게 "나의 힘"이 되시는 분이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가장 밑바닥에 처한 인생 같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세상을 정복한 가장 "높은 곳"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는 신자는 환난과 재앙만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서도 마치 "사슴과 같이" 재빠르고 힘차게 그 모든 난관들을 헤쳐 나가면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을 모신 하박국 선지자였기에 그는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남조 유다가 세상의 '열왕'들에게 당하며 사는 것 같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사는 차원 높은 구원의 왕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바벨론의 힘에 짓눌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궁극적인 구원이 약속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박국 선지자의 심령에는 그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쁨이 절로 넘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박국의 탄식은 처음에는 "어느 때까지리이까"(1:2)라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어찌하여"(1:3, 13, 14) 이런 일이 나와 내 민족에게 일어나고 있습니까라는 고뇌어린 말들로 이어졌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어느 때까지 되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라는 실로 위대한 승리의 찬가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새 생명의 개가이며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심령의 부흥이겠습니까?

그래서 느혜미야 8장 10절에서도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자녀를 생각할 때, 그것이 힘이 되어서 가게에서나 직장에서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이겨나가곤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도, 목사에게 기쁨을 주는 성도들 몇 명만 생각해도 목사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참된 신앙인이 우리의 구원주 되신 하나님, 우리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생각할 때 어찌 그와 같은 기쁨과 새 힘이 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의 참된 부흥은, 신자의 진짜 소생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상황이 갑자기 호전되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그저 원망 불평만 하던 이전과는 달리 그 심령이 여호와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면서 새 힘을 발휘하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바로 진짜 부흥인 것입니다. 

해가 바뀌고 새 계절이 오고 새로운 달을 맞이한다고 해서 우리 인생에 이전에 있었던 여러 가지 나쁜 일들이 꼭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육신이 병들거나 사고를 당할 때도 있을 것이고 우리의 가계부가 빨간 숫자로 기록될 때도 혹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는 심령의 병까지 생기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몸이 좀 아프다고 해서 우리가 천당에 갈 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 사회가 불경기라고 해서 교회가 망하거나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비록 '밭에 식물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오직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할 줄 아는' 신앙생활의 부요함과 심령의 부흥을 이 교회를 중심으로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는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 "수년 내에"라는 말은 '여러 해들의 가운데'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사람으로 따지자면 '중년에' 즉 죽기 전에 무엇을 이루어 달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며, 더 넓게 볼 때에는 '우리 세대에' 혹은 '이 시대가 가기 전에'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통과해 가는 이 아까운 한 해 한 해를 바라볼 때에 정말 실감 있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정말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에 하루라도 빨리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이런 부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37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에도 참으로 우리 세대에, '이때가 지나가기 전에' 속히 이런 부흥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은 돌볼 줄 알면서 '주의 일'은 뒷전에 제쳐 놓는 버릇부터 고쳐야 합니다.
자신의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하나님에게 원망부터 함부로 하는 악습을 이제는 깨끗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라든지 "어느 때까지"라고 자기 일만 따지는 수준에 머물러 있던 때는 '지난날'들만 해도 정말 족한 것 아니겠습니까?

고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생명 있게 세우는 것이 곧 부흥"이라고 하셨습니다.
실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일'인 구속사 성취에 신앙인의 참된 부흥의 근원이 있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그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에게 '궁극적인 구원'만큼은 확실히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늘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최고의 부흥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힘을 합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이런 '주의 일'을 먼저 부흥시키고 또한 각자 개인적으로는 먼저 이 '구원의 확신' 안에서 만족하고 새 힘을 발휘함으로써, '이 수년 내에' 밖으로는 교회의 성장을 통하여 안으로는 개인의 신앙생활의 축복을 통하여 함께 큰 부흥을 꼭 이루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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