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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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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쉽겠느냐? (막 2:1-12)


1. 예수께서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째서 당신들은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오?’ 하고 따졌습니다. 당시 세리는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들과 같이 취급할 정도로 부정한 사람들로 여겼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 가장 깨끗하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세리나 죄인들과는 어느 자리이든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5:31-32)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자신이 의사의 몫까지 자처하여 스스로를 건강한 자로 진단내리고 처방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사의 처방이나 병원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병들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만 의사나 병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들(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은 남에게 해로운 말이나 행동을 한 적도 없고, 흔히 하는 말처럼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 그저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회개할 것이 없기 때문에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라도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결국 죽음을 당하면서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바로 ‘죄’입니다. 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을 치료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믿고 죄 사함을 받는 것밖에 없습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실려온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으로 그 환자의 영혼의 병과 아울러 육신의 병까지 치유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인간의 질병이 치유되려면 항상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만 했었습니다. 

“(시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총 중 가장 큰 것은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사죄(赦罪)의 은총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 용서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하면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면 인간은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죄 용서의 은총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죄의 은총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가장 큰 은총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에게 “모든 육체의 병”까지도 치유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사죄의 은총을 통해 치유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인간은 모든 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죄 용서함 받은 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온전하지 못한 신체를 이끌고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병들을 너무 중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질병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병(萬病)의 의사되신 하나님을 깨닫는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고치시지 못하는 병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의사는 때때로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인간 의사는 자신이 치료하고 있는 그 환자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환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만드셨습니다. 

현대 첨단 의술은 못쓰게 된 장기를 잘라내 버리고 건강한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하는 방법으로 그 생명을 잠시 연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였던 자를 재창조하는 법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형성하였던 자를 재형성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를 ‘내 육체의 가시’(a thorn in my flesh), 혹은 ‘사탄의 사자’(a messenger of Satan)라고 불렀습니다. ‘‘내 육체의 가시’라는 표현은 그만큼 질병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이 크다는 것이고, 그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말한 것은 ‘그 가시’가 그의 삶에 여러 모로 방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그 고통스러운 질고(疾苦)를 벗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세 번씩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은 이렇습니다.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바울이 원했던 것과는 상반된 것입니다. 혹자의 표현대로 ‘매우 친절하신 하나님의 거절’이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뼈아픈 ‘가시’를 그대로 지닌 체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내 은혜”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쓰임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어떤 모양,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인간의 고난이 제거되는 것만이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아픔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늘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또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방편이 된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 소망스러운 은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으로 그 이유를 바울에게 설명하셨습니다. 즉 바울에게 인간적인 약점이 없다면 자신에게 나타나는 능력으로 교만에 빠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약점을 지님으로써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어 겸손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 체험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그에게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병, “육체의 가시”가 치유되지 아니하고 자신의 몸에 ‘머물게 됨’을 크게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약한 부분들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은 확고하고 변함없이 머무를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즐거이 약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고 자기의 약함을 도리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약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음에도 질병이 여전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거나 그 질병에 매여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치유되지 아니한 질병 가운데 숨겨진 더 큰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깨닫게 될 때 모든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질병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 어느 집에 가셨을 때,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한번 만나보기 위해 집 앞에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집 주변이 거의 통행 불능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듣던 소문대로 기적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했지만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전념하셨습니다. 

이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들것에 메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스스로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말도 못하는 전신마비 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환자를 위해 아낌없이 봉사하는 네 명의 친구들이 들것에 메고 왔던 것입니다. 이들 헌신적인 동료들의 도움으로 예수께서 계신 집에 당도했지만 밀집된 군중을 헤집고 예수 앞에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바깥 계단을 통해서 지붕 위로 환자를 메고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가 있는 곳으로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지붕은 보통 나무로 들보를 놓은 후, 짚으로 엮고 그 사이를 흙으로 채워 비를 막도록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을 떼어내고 안으로 그 환자를 달아 내린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환자를 위해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 하는 모습, 어떻게 해서든 예수 앞에 환자를 데려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행동을 믿음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 “저희”는 네 명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중풍병자를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께서 바로 그 환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는 말씀은 예수께서 환자의 병을 고쳐 주는 대신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환자가 필요로 했던 바가 죄의 용서가 아니라 바로 중풍병 치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그 환자의 죄를 지적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를 묻지도 아니하시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는 그 환자만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사59:1-2) 

그래서 예수께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고 말씀하시며 중풍병을 치료하신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러 온 자에게 영혼의 죄까지 사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까지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육신의 병고침은 한시적(限時的)인 것이지만 영혼의 죄 사함은 영원한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이 직접적인 죄의 결과는 아니지만 인류 최초 범죄 이후 병과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우치며 육신의 질병보다 그 본질적인 원인인 죄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죄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거기 앉아 있던 몇몇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상 서기관들이 그곳에 나타난 것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 그리스도를 책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군중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고 앉아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한 바대로 예수께서 죄 사함에 관한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며 사죄를 선언하신 것은 ‘참람하다.’,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인간 예수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본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사죄를 선언하신 것은 그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로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예수께서 질문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사죄의 선언과 완전한 치유의 기적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 질문에 어느 것도 더 쉽다고 답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모두가 똑같이 불가능한 일이며,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쉬운 일입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죄 사함의 성취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죄 사함에 관한 말이 더 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어렵게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쪽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죄 사함을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이 그가 실제로 죄를 사하는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기 위해서” 사죄를 선언하시고 이어 “(막2:11-12)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 중풍병자가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침구를 걷어 가지고 걸어 나갔습니다.’ 완전한 치유를 통해 바로 죄 사함을 입증한 것입니다. 죄 사함을 통해 완전한 치유가 입증되었습니다. 이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의 결과로 이제 죄 사함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는 하나님이심이 입증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놀라 ‘이런 일은 처음 보았다!’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사건의 강조점은 바로 죄 사함에 있는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지닌 문제의 근원은 바로 죄였습니다. 예수께서 주로 관심을 기울이신 것은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지닌 문제가 바로 모든 인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이 필요했던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죄 사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죄 사함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에게 임하고 있음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참조, 행3:1-19) 


4.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 죄 사함의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두려워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피신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추종자로 혐의를 받고 있었으므로 비밀스러운 곳에 은신하고 있었고,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여 더욱 더 무서움에 빠졌습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자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이심을 알아보고 기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요20:21-22)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는 죄 사함의 권세, 오직 하나님만의 권세가 제자들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인간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죄가 사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뿐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고 그렇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그대로 머물러 사망 권세 아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사명이 곧 죄 사함의 권세와 같은 것입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예수 믿는 누구든지 복음을 증거할 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게 되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가 그대로 남아 끝내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죄 사함의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제자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도들이 복음 증거의 사명을 소홀히 하여 누군가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들의 직무 태만에 그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사도들이 받은 사명은 고귀한 권세이자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권세이기도 합니다. 이를 에스겔 선지자가 이렇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겔3:17-21)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간단히 말하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그 사람이 예수 믿을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죽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죄 값으로 죽은 것이지만 그 피 값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는 믿음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가리지 아니하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 누구를 가리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역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딤후4:1-2)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이러한 복음의 성격을 볼 때, 죄 사함의 권세는 ‘피의 권세’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값으로 인간이 죄 사함을 받기 때문에 ‘피의 권세’이며,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피 값을 찾으시기 때문에 ‘피의 권세’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죄 사함의 권세는 ‘피의 권세’입니다. 애굽 전역에 장자 죽음의 재앙이 내릴 때, 어린양의 피가 보이는 집은 죽음의 사자(使者)가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양의 피’가 보이지 아니한 집은 죽음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영원토록 지키라고 해서 붙여진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다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출12:21-24) 구약 시대에는 동물의 희생으로 뿌려진 피로서 죄 사함을 받았지만, 이제는 온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며 포도주 잔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마 26:28)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나 지금이나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히9:18-23)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반드시 피를 흘려야만 하신 것처럼 예수 믿는 성도들 역시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해서는 피 흘림이 있어야만 합니다. 죄 사함의 권세는 피 흘림으로 얻어지기에 ‘피의 권세’이며, 피 흘림으로 인간은 생명을 얻기에 ‘생명의 권세’ 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어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셨기에 ‘피의 권세’는 곧 ‘사랑의 권세’입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웃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죄 사함의 권세’, 복음 전도의 사명을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감당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시적인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중풍병을 고치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죄 사함의 권세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르리라.’(행 3:19) 고 외치는 것이 쉽겠습니까? 성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피의 권세’, ‘죄 사함의 권세’로 복음을 전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인생들을 구원하는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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