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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충성 (막 12: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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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충성 (막 12:41~44)


‘부메랑 효과(boomerang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메랑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수렵기구로서 던지면 다시 던진 자에게 돌아옵니다. 부메랑 효과란 바로 자신이 한 어떤 행위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이솝이야기에 늙은 사자와 생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쥐가 사자에게 잡혀 죽게 되었을 때 생쥐는 살려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하여 사자는 생쥐를 살려줍니다. 어느 날 사자가 덫에 걸렸을 때 생쥐가 그물을 갉아서 풀어줬습니다. 
성경은 온통 부메랑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리라”고도 했습니다. 빈 평안이 그 사람에게 합당하지 않으면 나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섬김과 베풂은 절대 공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베푸는 자에게 베푸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섬기며 베풀어야 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작은 충성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젊은 새댁은 1,000원을 헌금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되풀이해서 내어보아도 계속해서 5,000원 짜리만이 나와서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드러내어놓고 찾기에는 너무나 많은 눈과 예배드리는 중이라는 점이 마음이 걸렸습니다. 헌금 주머니가 앞에 왔을 때 마지막으로 꺼낸 것은 5,000원짜리이고 그래서 그 새댁은 하는 수없이 생각지도 않은 헌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새댁은 예배를 드리고 나와서 어떤 권사님에게 이 일을 무용담 삼아 이야기했습니다. 이때 그 권사님께서 대답을 했습니다. 
“새댁 걱정하지 말아요. 하나님께서는 1,000원으로 받으셨음이 확실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보통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맨 바깥이 이방인의 뜰로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말론하고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상관없이 이 이방인의 뜰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안쪽에 여인의 뜰이 있습니다. 여기는 이방인은 들어갈 수가 없고 오직 유대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든 유대인이라면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안쪽이 이스라엘인의 뜰 또는 유대인의 뜰로서 유대인 남자만이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쪽으로는 제사장과 레위인들 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의 뜰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제물을 잡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성전이 놓여 있습니다. 성전 안에는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제사장은 이 성소에 들어가 매일 같이 떡상 위에 떡을 올리고 다시 물려냈고 일곱 가지로 되어 있는 등잔에 불을 켰으며 향단에 향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성소 안쪽으로 휘장이 쳐져 있는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그해의 대제사장만이 들어가서 백성의 죄를 대속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 중 여인의 뜰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여인의 뜰에는 헌금함이 모두 열세 개가 놓여 있습니다. 이 중 아홉 개는 성전세 또는 제물을 대신해서 드리는 예물을 넣는 함이고 나머지 네 개는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구제용 예물을 드리는 연보궤였습니다. 성전세는 보통 1인당 반 세겔을 내도록 되어있습니다. 빈부를 막론하고 똑같았습니다. 이는 두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액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가 드린 액수가 두 렙돈인 것으로 보아서 아마 이 때 드린 것은 성전세보다는 구제예물이거나 아니면 제물 대신 돈으로 드리는 예물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화폐로는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것이 데나리온입니다. 흔히 달란트의 비유라고 할 때 나오는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노동자의 20년 분 일당에 해당되는 양이니 엄청난 가치의 돈이었습니다. 반면에 데나리온의 16분의 일이 한 앗사리온입니다. 그리고 앗사리온의 4분의 일이 한 고드란트입니다. 이 고드란트가 로마 화폐로서는 제일 작은 단위인데 헬라 돈으로는 보다 작은 단위의 화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렙돈으로서 한 고드란트는 두 렙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가 드린 것은 한 고드란트에 해당되는 돈이었는데 하루 품삯의 64분의 1에 해당되는 작은 액수이니 하루 품삯을 오만 원으로 잡는다고 해도 780원밖에 안 되는 액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과부의 모든 소유요 생활비 전부라고 하니 얼마나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부는 자기가 지닌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비록 액수는 보잘 것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가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칭찬하신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이는 곧 그의 삶을 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기 마음을 다 바친 것입니다. 비록 액수는 보잘 것 없이 작지만 이는 가장 귀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다 비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과부는 두 렙돈을 드림으로 하루를 굶어야 합니다. 부자에게도 하루를 굶는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가뜩이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한 끼를 굶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릅니다. 하물며 하루 온종일 굶어야 하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들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굶주린 몸에 밤 시간은 더 춥고 떨리는 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긴긴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새워야 하는데 그렇다고 날이 밝으면 무슨 수가 당장 생기는 것도 아닌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어쩌면 하루 이상을 굶주린 상태로 지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 여인을 도울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날이 밝는 대로 일자리를 찾아서 헤매야 합니다. 허기진 배에 춥고 떨리는 밤을 지새우고 다시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만큼 이 여인에게서 자기가 지닌 모두를 다 헌금함에 드렸다고 하는 것은 비록 액수는 작을지 몰라도 그 마음만은 정말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주님이 감동하시기 않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큰 것을 좋아합니다. 믿음도 큰 믿음이어야 하고 복도 큰 복이어야 하고 집도 커야 하고 은혜도 그냥 은혜가 아니라 큰 은혜여야 합니다. 한결같이 큰 것만 찾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결코 큰 것만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정성이 깃들어 있고 마음이 깃들어 있고 뜻이 깃들어 있다면 가장 작지만 그것이 사실은 가장 큰 것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대접을 한다고 한들 실컷 마음을 상하게 해 놓고서 대접을 한다면 그게 제대로 넘어가기나 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하나님도 기뻐하시기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섬긴다고 하더라도 높은 사람 섬기고 잘 난 사람 섬기는 것이야 누구는 못하겠습니까? 그건 누구라도 다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고 기꺼이 섬긴다고 할 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다고 해서 뭐 생기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가슴앓이를 할 때가 더 많은 일들입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곳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데 바로 그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그것이 곧 주를 섬기는 것이요 바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니 이것은 큰 자 작은 자의 개념을 떠나서 우리가 하는 일 하나도 그렇습니다. 누가 보느냐 보지 않느냐의 입장을 떠나서 그거 했다고 해서 칭찬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내게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하는 그것이 바로 작은 충성입니다. 

이는 변함없는 충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상적인 일에 우리는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때나 칭찬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아닌 그냥 일상적으로 지나가는 그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칭찬할 수 있고 손을 마주 잡아줄 수 있어야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작은 충성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지내 놓고나서야 아 그때 그럴 걸 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을 통해서 정말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에게 기쁨을 주는 길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과부는 누가 보아주기를 바라고 예물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는 드리는 그것으로 기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지켜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가난한 과부인데 그러나 주님은 관심 있게 여인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 주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것은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칭찬하기 위해서입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은즉 내가 큰일을 네게 맡기리라. 이 귀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사모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비록 그 것이 보잘 것 없는 일처럼 보인다 해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렇다면 우리가 충성해야 될 일은 무엇인가입니다. 
아이 여섯을 키우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과부 한 분이 매주일 정기적으로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 교회의 한 부자가 그 사실을 알고 목사님께 부탁하여 그 과부가 내는 돈 액수를 전부 자신이 낼 테니, 다음 주일부터는 헌금을 내지 말고 그 돈을 살림에 보태 쓰도록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과부는 심히 노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나의 기쁨을 빼앗으려 하십니까? 매주일 주님께 바치는 이 즐거움이 없다면 나는 죽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받으시고 그 다음에 우리가 바치는 헌금도 받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주 앞에 드리는 예물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가장 분명하고 구체적인 행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음으로 감사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내가 빚진 것, 고마운 일에 대하여 사람은 빚진 마음이 있습니다. 예물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결코 예물은 단순히 잘되기 위한 수단이거나 더 부자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많은 것과 큰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더러 명하여 바라로 옮겨지리라고 말하고 그 말한 것이 이루어질 줄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내가 화려하고 멋져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항상 칭찬 받으며 성공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도 보아주지 않는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나 나름대로는 잘 한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비난만이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분다고 할지라도 항상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어주는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이 시간에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직장인으로서의 자리 학생으로서 있어야 할 자리 주부의 자리 아버지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 그 자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나는 아무런 자격도 없다 싶어도 여전히 우리는 내가 지켜야 할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자리만 지키는 것이 아닌 내 역할을 우리는 감당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을 가지고 충성을 다한 결과 갑절로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갑절로 거두지 못했으면 어떻습니까? 나는 자격이 없다고만 하지 말고 비록 내가 본전까지도 다 까먹는다고 해도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주님은 결과보다 앞서 그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니다. 내가 마땅한 시간을 다 들였는지 정성을 다 쏟았는지 그리고 있어야 될 자리에 있어야 될 시간에 있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아 그렇다고 할 수 있다면 주님은 그런 나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물어야 합니다. 이 시간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 이 시간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이 시간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을 위해 하는 일인가? 이 일을 통해서 누가 영광을 받게 되는가?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시간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내가 있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심지어는 쉬는 일까지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정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격려와 위로와 칭찬을 아까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더욱 빼놓아서는 아니 되겠지요. 

어느 목회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저 녹음기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중학생 막내딸이 졸랐습니다. 
학습 도구로 쓰기 위해서 어렵게 꺼낸 말이었음을 아버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여유롭지 못한 목회자였던 것입니다. 
또 1970년대, 그 시절에는 그렇게 여유롭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게 돈이 생겼습니다. 형제처럼 여기는 친구가 선물로 전해준 것입니다. 아버지는 기뻤고 딸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이었습니다. 딸이 그 돈을 모두 교회 헌금으로 내놨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너 녹음기 살 돈을 다 헌금했더구나….”
“예 아버지, 녹음기를 꼭 가지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이제 예배당을 짓는 일을 시작하는데 그 일이 더 급한 일로 여겨져서요.”
그 후부터 그 아버지의 주머니가 막내딸에게만은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우선순위를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주머니도 열려 있습니다.
이는 비단 돈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하나의 도구요 수단일 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될 자리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마음에 담겨있지 않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또한 때에 맞는 말의 중요성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칭찬과 격려 그리고 위로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수고하였다고 하더라도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가 얼마나 더 큰 힘이 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한데도 우리는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하기를 얼마나 힘들어 합니까? 고맙다는 말 한 번 하기가 뭐가 그렇게 힘이 듭니까? 또한 항상 계속 반복되는 일에는 그냥 당연한 일로 넘어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지만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그 일에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먼저 감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작은 충성입니다. 그것만큼 힘이 되는 일도 없습니다. 남들처럼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고 해도 말로라도 그 사람의 마음에 힘을 더해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작은 충성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생애는 실패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그랬던 아브라함 링컨이 즐겨 드렸던 기도가 있습니다. 그 기도의 제목은 “내가 실패했다고 느껴질 때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님! 저에게 무었을 말씀하려고 하십니까?
실패는 내가 패배자란 말은 아닙니다.
단지 내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중요한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내가 어리석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도할 충분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내가 치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감히 시도했었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내가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내 인생이 하급품이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완전치 않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내 시간을 탕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이제 내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내가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보다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주께서 나를 버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 멘.

이게 바로 작은 충성입니다. 결코 좌절하지 않는 것 다시 일어나서 주님을 의지하고 또 다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딘지 그리고 내가 함께 해야 할 분은 누군지를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는 귀한 칭찬과 더불어 많은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프랑스의 한 은행에서 직원을 공개 채용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물론 자격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은행에 취직하기를 원했으며 따라서 면접에 많은 사람이 응했고 면접은 은행장이 직접 맡아 하였습니다.
한 소녀가 은행장 앞에 앉았습니다. 먼저 은행장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 은행에 원하는 나이에는 맞지도 않을 뿐더러 자격조건에도 미달이군요. 죄송합니다.” 
그 소녀는 무척 실망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죄송합니다” 

소녀는 무척 실망하여 돌아 나오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핀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옷자락에 닦고는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소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은행장은 그 소녀를 다시 불러 세우고 말했습니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자격 조건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여 큰 실수를 저지를 뻔 했군요. 우리 회사에서 일해 주시겠습니까? 아까 그 조그마한 핀 하나도 아끼는 그런 소중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곧 큰일에도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지금 우리들에게 찾는 것은 큰일에 충성이 아닌 작은 일에 충성입니다. 남들이 다 보잘 것 업이 여기는 그 일도 소중하게 할 수 있는 사람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자리에도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노래가 있습니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떼면 ‘님’이 되고,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붙이면 ‘남’이 되는 인생사!』
그렇습니다! ‘님’과 ‘남’은 점 하나의 차이입니다. 
이 정도라면 점 하나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점 하나로 ‘님’도 되고 ‘남’도 되니 말입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그렇다면 이 점 하나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만들어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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