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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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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0-58)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0-58

어느 목사님이 연세가 많이 드셔서 99세가 되셨습니다. 그러자 ‘내가 꼭 100살까지 살아야지!’ 하는 희망과 의욕이 솟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쉽게도 100세까지 못살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을 하여 소파에 오래 앉아계시자 간호사가 침대로 가서 누우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못 가, 안 가!” 하시는 것입니다. 옆에 있던 아들이 “아버지, 지난 몇 주 동안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에 가실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침대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물론 준비가 다 됐어. 그런데 오늘은 아니냐!” 하시더랍니다. 우리가 주께로 갈 준비가 되었으면서도 “오늘은 아니야! 하루 더 살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꼭 한 번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기다리든 버티든,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죽음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손님처럼 늘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죽음을 경험할 텐데, 문제는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에 희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이 보이는가, 캄캄한가의 차이입니다. 

어느 분이 저와 대화를 하면서 “목사님,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는 게 아무렇지도 않고 하나도 겁나지 않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해드렸습니다. “선생님, 참 믿음이 좋으시네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어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근거가 얼마든지 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죽으면 끝이다'라는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센 믿음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없어져 버린다는 그 믿음이 사실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요. 그것이 끝이라면 선생님은 정말 편하시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죽어서 영원히 사라진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선생님의 믿음일 뿐입니다. ‘증거는 없어도 나는 내가 죽으면 없어진다고 이 우주 안에서 나 홀로 확실히 믿는다.’는 선생님의 이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믿습니다. 그 증거는 우주 만물에 깔려있습니다. 한 생명이 생성되는 것만을 봐도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었을 때는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단세포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점점 세포가 분열되면서 눈과 귀와 코, 오장육부가 생기고 혈관과 뼈와 신경이 만들어집니다.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창조를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 근거 없이 “죽으면 끝이야”라고 믿는 믿음이야말로 맹목적인 믿음, 독선적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희망이 없습니다. 어둠뿐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희망이 있는 사람과 희망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살 희망을 주셨습니다. 

부활과 생명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현재 우리의 몸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50절).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유산을 현재 이 몸으로는 받을 수 없고, 이 몸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현재 우리의 몸으로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몸이 땅에 묻혀서 씨처럼 심겨지면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그 씨로부터 열매를 맺어 부활한 몸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부활한 몸이라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짐승의 몸이 있고 새의 몸이 있고 물고기의 몸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이 있고 땅에 속한 몸이 있습니다.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 앞부분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을 ‘썩을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썩을 몸’을 심어야 ‘썩지 않을 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또 ‘욕된 몸’이라고 했습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3-44). 두 종류의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이 있고, 이 몸을 심고 나면 거기서부터 새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몸, 즉 영적인 몸, 신령한 몸, 강한 몸, 영광스러운 몸, 썩지 않은 몸입니다. 

첫 번째 우리의 몸은 첫째 아담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두 번째 몸은 둘째 아담, 즉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몸은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받았던 몸을 심는 시간입니다. 욕된 몸, 썩는 몸, 약한 몸, 육신의 몸을 심어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을 받게 됩니다. 

언제 이런 변화가 나타나는가? 마지막 날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경험하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부활과 생명을 믿는 자들은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모두 부활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 순간, 천사장의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부활하신 예수님과 앞서 간 모든 성도들이 함께 구름을 타고 이 땅으로 오실 것이며, 이 땅에 살아 있는 성도들이 잠깐 사이에 지금의 몸에서 영원히 사는 영적인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51-54절). 

다가 올 그날은 죽음의 독이 빠져나간 날입니다. 죽음의 이빨이 인간을 물어도 그 독니가 빠져버렸기 때문에 죽음이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에 죽음은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이 우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육신이 죽는 것은 부패할 육신, 약한 육신, 병든 육신, 노쇠한 육신의 씨를 심는 것입니다. 심으면 우리가 그로부터 부활 생명으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날 어떤 몸으로 변하는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은 몸으로 변합니다. 

첫째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저녁에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모여 있던 곳에 예수님께서 바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무것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종류의 몸을 입고 계셨습니다. 영적인 몸이기 때문에 물리적 벽이 막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할 지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시간도 초월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그 몸은 잠깐 사이에 다시 갈릴리에 나타나셨습니다. 

둘째는 중력도 초월한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실 때 50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 목격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무엇을 쳐다보느냐? 지금 하늘로 올라가시는 바로 그 분이 똑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다.” 중력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제 썩는 몸, 노쇠한 몸, 죽는 몸이 끝나면 드디어 부활할 몸이 준비됩니다. 주님 오실 때, 천사장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몸과 똑같은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 몸은 영화롭게 된 몸이요,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요,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아픔과 질병이 다 사라진 몸입니다. 완전히 영화롭게 되어 변치 않는 몸,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몸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화로우신 그 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그 몸이 바로 우리가 앞으로 받을 몸인 것을 알면서 소망 가운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몸은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의 몸과 똑같이 생겼습니다. 만지고 볼 수 있습니다.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픈 몸, 노쇠한 몸, 죽는 몸이 아닙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기에 적합한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에 질병이나 연약함이 있거나 교통사고로 몸의 일부를 잃었다 할지라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과 저에게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새 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죽음은 끝이 났습니다. 죽음은 패배했습니다. 그 힘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죽음을 극복한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절).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죽음이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사망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사망의 독침을 빼 버리셨습니다. 사망의 승리는 끝이 났습니다. 그동안 인간을 위협하고 불안하게 만든 그 죽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독침이 못 됩니다. 이제 그 세력을 상실했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과 21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지금은 연약하고 노쇠하고 장애가 있어도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 우리는 다 완벽한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고 영광스러운 저 하늘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몸을 여러분과 저에게 약속해 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6절). 죄는 십자가로 인해서 힘을 잃었습니다. 율법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안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율법도 사망도 우리를 더 이상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감사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는 제목이 이제 우리에게 생겼습니다. 사망을 이겼고 죽음의 독이 빠지고 힘을 잃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사망 앞에서도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부활 이래 우리에게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 감사가 우리 입술에 찬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7절). 두려움이 아니고 절망이 아니고 이제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고 부활과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 퀴리부인의 남편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퀴리부인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끝났어!” 이 부인에게는 남편이 죽은 것이 끝이요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독일의 본 훼퍼라는 젊은 목사님은 나치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기 전날 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제 드디어 나에게 시작이 왔다!” 

죽음을 끝이라고 부르짖는 절망의 소리와, 드디어 영원한 시작이 왔다고 하는 신앙고백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흑암과 빛의 차이입니다. 절망과 희망의 차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희망이 여러분과 저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의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에너지와 건강과 능력을 가지고 우리가 인생을 마치고 주님 앞에 가는 그 순간까지,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주님을 섬기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58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그분이 사흘 만에 죽음에서 살아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과 생명을 믿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비록 이 땅에 어려움과 질병, 노쇠함, 죽음이 있을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에 그 어느 때보다 더 힘쓰는 우리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을 위한 모든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운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죽음의 현실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확신을 가지고 직면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건전한 사고방식이나 긍정적인 생각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지막 희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 자신이 어떤 개인적인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너희가 믿느냐?”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 믿음의 귀를 열어 주신 것, 믿음의 깨달음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와 같은 확실한 신앙고백이 여러분과 제 입술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는 내 것일세. 승리는 내 것일세. 구세주의 보혈로써 승리는 내 것일세” 이 찬송을 자신 있게 부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물론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라도 주님이 다시 오시면 안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은 자가 먼저 살아나고, 만약 주님이 오시는 날에 우리가 살아 있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그 몸과 같은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고 중력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솟구쳐서 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시대에 오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죽는 그 순간에 우리는 이 땅의 사랑하는 형제자매와 가족을 바라보지만, 다음 순간에 고개를 들어 우리를 맞아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있습니다. 

뒤에 남은 가족의 마음에 섭섭함이 있지만 그 헤어짐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닙니다. 얼마 동안의 헤어짐입니다. 그 순간에 우리가 고개를 들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약속을 주신 주님의 얼굴, 나를 맞이하시는 그 얼굴을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고개를 들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사는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와 소망과 평화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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