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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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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37~47)
  

지난 2월에 있었던 동계올림픽은 실로 짜릿한 기쁨과 환호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스피드 스케이팅과 피겨 스케이팅에서 최초로 따내게 된 금메달들은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사건은 반드시 여파를 낳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이번 동계올림픽 이후에 스피드 스케이팅과 피겨 스케이팅을 지망하는 어린 꿈나무들이 몇 배나 더 늘어나서 아이스링크들을 가득 채우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은 그야말로 역사의 중심부를 강타한 경천동지의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그 강력한 여파는 곧 전 세계를 향하여 퍼져나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의 성장'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파장을 기록한 것인데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이었습니다.

사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 중에 '교회 성장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 성장학'에 있어서 자칫 잘못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대표적인 오류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세속적 성장 원리'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의 회사 운영 등에서 적용되는 성장 원리를 교회 운영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방법인데, 실제로 교회 성장학에 대한 책들 중에 그처럼 무슨 경영학 교과서 비슷하게 되어 있는 것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또 하나의 흔한 오류는 소위 '성공한 대형교회'를 모델로 삼고 그것만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실제로 큰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가 교회 성장학에 대한 책을 쓰거나 가르치게 될 때 자연히 일어나기 쉬운 현상인데, 그처럼 한 특수한 교회에서 사용된 원리란 보편성이 결여되기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세속적인 성장학'이나 '특수한 교회의 성장 사례'는 교회 성장학에 부분적으로 참고는 될 수 있겠지만 결코 기본이나 핵심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목회자나 배워야 하며 어느 교회에서나 적용되어야 할 만고불변의 교회 성장학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어야 할 것인데, 바로 첫 신약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가 생생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되는' 교회의 성장은 과연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 것인지 본문을 통하여 그 세 가지 단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교회의 성장은 '예수 복음을 영접한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그 기반을 잡게 됩니다.

본문 37절로 41절에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태동은 오순절 날에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음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을 향하여 사도 베드로가 신약의 첫 설교를 선포함으로써 불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 말" 즉 베드로의 그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리는" 반응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이 평생 처음으로 체험해 보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순식간에 무엇에 찔리는 듯이 강력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의 심령에 그처럼 강력한 충격을 주었습니까?

베드로의 설교는 결코 무슨 철학자의 심오한 형이상학도 아니었고 무슨 구도자의 오묘한 깨달음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사실, 곧 예수님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베드로의 '원색적인 복음'의 선포를 듣고 그 많은 무리들의 심령에 그처럼 "찔리는" 작용이 순식간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바로 그것이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택자의 심령이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이시다.'라는 이 지극히 간단명료한 복음의 선포를 들을 때에 그처럼 강력한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실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써 생전 처음으로 자기 마음에 찔리는 충격을 느끼게 된 그 청중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사도들에게 물어 왔습니다.
사도들은 곧 예수님께서 명하셨던 대로 그들에게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회개'란 '과거에 대한 뉘우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을 위한 각오'가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 회개 직후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죄 사함을 얻을" 뿐 아니라 이제 "성령을 선물로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 세례의 완전한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공히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처럼 복음의 초청을 받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새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받을" 백성을 부르실 때에 누구에게나 적용하시는 똑같은 방법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는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무언가 위로와 평안을 얻고자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친구를 사귀는 재미 때문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언가 자기 소원 성취를 기원해 보려고 스스로 나오는 사람도 있으며 반면에 전도를 받아서 마지못해 한 번 나오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그 한 사람이 참된 신자로 바뀌는 본격적인 순간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사람의 심령을 자극하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그런 '복음의 충격'을 받은 신자들이 모이게 됨으로써 비로소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설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결정적인 '찔림'의 역사는 사람의 힘으로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전적으로 성령께서 홀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성령의 역사가 더 자주 더 많은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증하며 권하는" 일 즉 설교하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것뿐입니다.
복음의 씨앗을 강단을 통하여, 성경 공부 시간을 통하여, 개인 전도를 통하여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뿌리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 성장을 위해 할 수 있는 제1단계인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들을 교회에 모으시는 주인이시요 왕이십니다.
2천 년 전에 사람들이 사도들의 얼굴을 보고 예루살렘교회에 모인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행하신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복음만을 듣고 모인 것처럼, 오늘날 역시 목사가 설교를 잘하고 전도사가 전도를 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사건이 역사적 실재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감동과 능력이 있는 까닭에 택자들은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복음이 거짓이라면 이 기독교의 교회운동이 지난 2천 년 동안 어떻게 그 온갖 박해를 뚫고 전 세계를 정복해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바로 오늘도 이 교회에 모여 있는 저와 여러분처럼 오직 '예수 복음'을 믿고 영접한 진실한 '신자' 두세 사람이 모이게 될 때 바로 거기에서부터 성장할 수밖에 없는 교회의 기반이 든든히 자리 잡게 되는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의 성장은 '신앙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경건의 능력을 키움으로써 그 요원을 확보하게 됩니다.

42절 말씀에 "42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41절에 보면 그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이었다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을 가리켜 '새 신자'라든지 '등록교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그 대신에 '제자'라는 명칭을 쓴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란 그 단어 자체가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 삼천 명의 새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후 즉시 그들에게 신앙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그 신앙 교육을 열심히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여기 42절의 "저희가"란 말은 바로 그 삼천 명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 새 '제자'들이 몇 가지 일에 "전혀 힘쓰니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전적으로 헌신하다'라는 뜻입니다.
대강 형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력을 투구하여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막 교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들이 도대체 무슨 일에 그처럼 시간과 힘을 다해 헌신했습니까?
그것은 네 가지 신앙교육 과정, 곧 가르침을 받는 것, 서로 교제하는 것, 떡을 떼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힘쓰니라"는 말은 문법 구조상에 바로 이 네 가지에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선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 즉 말씀 중심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과 심판하심에 대한 복음은 이미 들었고 영접했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가르침'이 필요 없는 '졸업생'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얻은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하고 더욱 강하게 지키기 위해서, 또 그 믿음에 따른 생활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우기 위해서, 그 제자들은 계속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서로 교제하는" 것, 즉 성도 간의 사귐 역시 그들을 성장시켜 가는 한 교육 과정이 되었습니다.
학생이라고 해서 꼭 수업 시간에 선생님한테서만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들끼리 서로 사귀고 나누고 돕고 협동하는 과정을 통해서 보다 폭넓은 교육이 은근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도의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하든지 서로 부지런히 자주 만나고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섬기고 함께 나누는 가운데 더욱 거룩한 신앙 인격이 형성되며 경건한 생활 습관이 조성되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떡을 떼는" 것은 바로 성찬 예식에 참예함을 가리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찬식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자주 거행되었고 아마 매주일 모일 때마다 가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성찬식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기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은 제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신앙교육 헌장의 제1조와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제자 교육 과정이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성도 교제, 그리고 성찬식은 정기적으로 예배에만 참석해도 절로 받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기도는 정말 자기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신자는 오직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일대일로 직접 만날 수 있으며 영적 교통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기도야말로 제자 교육에 있어서 최종 단계이면서도 필수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듣는 목사의 설교만 가지고서 성경 말씀을 다 배운다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역성경공부도 함께 나누고 성경대학과 성경대학원에도 등록하여 더 배우는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교제 역시 예배 시간 전후에 지나치면서 잠시 인사 나누는 것만 가지고서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남녀 전도회나 청년회 등을 통하여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들끼리의 친밀한 사귐을 나누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날 성찬식은 초대교회 시절처럼 자주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교회에서 성찬식을 거행하는 예배만큼은 정말 '반드시' 참석함으로써 그 주님의 살과 피의 은혜를 '맛보아 아는' 체험이 늘 충만해야 하며, 이것조차 모르고서는 성장은커녕 초보 수준조차 늘 위태로운 교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경건생활을 최고 수준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교회 전체 성장의 무한한 '동력원'이 됨은 새삼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 각 개인이 바로 이런 신앙 교육을 통하여 그 심령에 넉넉한 영적 수분과 양분이 공급을 받게 되면 그 개인 신자와 그 교회는 절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시 교회의 '새 신자'들은 오직 이와 같은 신앙 교육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제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인'은 많지만 '신앙교육'이 없는 교회, '신자'는 분명히 있지만 '제자'를 양성하지 않는 교회는 성장하려 해야 할 길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제자'가 되지 못하는 교인이란 잘해야 그저 자기 개인 신앙이나 간신히 지키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찬식과 성도교제에 '전혀 힘쓰는' '제자' 과정을 부지런히 수료함으로써 자신도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며 그 결과 절로 교회를 성장시키는 요긴한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의 성장은 '신행일치의 신자'들이 교회중심으로 생활함으로써 그 폭발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43절 이하 47절 말씀에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기사와 표적"들은 예루살렘 사람들 사이에 "두려움"이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큰 일은 사도들만 행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이루어지고 있는 일 역시 놀라운 기적이요 표적으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아까는 "제자"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42절의 신앙 교육 과정을 거친 후에는 이제 "믿는 사람"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즉 그와 같은 헌신적인 제자 훈련을 통과함으로써 이제 비로소 그들은 본격적으로 '신자다운 신자'가 된 것입니다. 

그처럼 성숙한 제자가 된 '믿는 자'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중심의 생활'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라는 말씀은 그 수천 명의 교인들이 한 장소에서 공동생활을 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었으며 또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같이 살 만한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것은 모든 교인들이 철저하게 '교회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 교회중심의 생활 중에 하나가 바로 모든 "물건과 재산과 소유"를 다 바쳐서 '봉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초대교회가 '공산주의'를 실천했다고 주장하는데 한 마디로 허무맹랑한 소리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루살렘교회가 구제 사업에 집중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당시에는 교회 안에 가난한 교인들이 워낙 많이 있었던 까닭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중심의 생활은 또한 '공적 예배'에 부지런히 모이는 것으로도 나타났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한 것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고 있던 매일의 예배에 이 기독신자 된 자들은 더욱 열심히 참석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한 것은 기독교인들끼리만 모여서 따로 드리는 예배를 그때부터 이미 시작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아직까지는 그들만의 예배당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최선을 다해 예배에 모이기를 힘썼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교회중심의 삶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신자가 철저하게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와 봉사에 힘쓸 때 절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대신관계가 더욱 온전해질 뿐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덕을 세우고 사회로부터도 존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림없는 교회, 세상 앞에서도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라면 절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개혁주의 신앙에서 교회를 정의할 때 꼭 들어가는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말인데 다른 말로 하자면 '교회는 유기체적인 모임'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가만히 모여 앉아서 묵상을 하면서 도를 닦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길이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도와 지혜와 지식은 이미 다 통달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의 지령을 받아서 각 지체된 성도들이 팔이면 팔, 다리면 다리로서 '움직이고 일을 해 내는' 실로 '살아 있는 몸'이 될 뿐인 것입니다.

죽은 몸은 결코 자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몸은 절대로 정지 상태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교회의 지체'들은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선한 일에 봉사 충성하기 위하여 힘을 쓰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각 지체들이 일단 그렇게 '생명이 있어서 활동을 하면' 그 몸 된 교회 역시 절로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분명한 '신앙인'이 되고 그 믿음대로 행하는 '사명인'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이 교회를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세상 사회로부터도 칭송을 받는 '강건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부흥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과정을 거쳐 예루살렘교회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교회로 성장해 갔습니다.
교회 성장은 오직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성장이 정말 급하신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 성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바로 '주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의 십자가와 빈 무덤의 사건은 바로 교회 운동이라는 여파로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복음'만이 기반이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해야 하며 '예수님의 몸 되신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의 성장은 계속하여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더 많은 구령의 열매로 이어지게 됩니다.
즉 교회의 성장이란 바로 그 교회에 속한 각 교인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한 축복으로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오묘한 진리이며 놀라운 은혜입니까?
저와 여러분 각자는 오직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가시적으로, 현실적으로, 체험적으로 보고 만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 선포되는 '예수 복음'을 듣고 그 가르치는 '예수 제자 교육'을 받고 그 함께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친히 선포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저와 여러분 각자는 바로 이 '교회의 성장'을 통하여 '개인의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신자가 '지체'고 교회는 '몸'이니 이 또한 당연한 원칙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 각자는 우리 교회의 발전과 부흥이 곧 자기 개인의 축복과 직결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교회를 통하여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신다.'고 했으니 만약 교회가 없다면 '교회를 통한 개인 구원'부터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 경향교회의 일원으로 신앙생활하게 된 것을 정말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있는 교회'일 뿐 아니라 '세계를 받은 교회로 계속 부흥하고 있는 교회'의 한 지체가 된 것은 실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경향교회가 지난 37년 동안 이토록 성장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이만큼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많은 지상교회들이 있지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축복의 교회를 통하여 부름 받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가운데, 스스로도 더욱 '복음'에 굳게 서고 '제자'로 자라며 '교회중심의 신행일치'를 나타냄으로써 함께 이 '경향 장막터'를 더욱 부흥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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