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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느 1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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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느 13:1-31)
 

지난 시간에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절로 말미암은 성찬의 삶이 무엇인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하는 것을 이방 사람들은 놀러가는 사람들인 것처럼 비방하거나 조롱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하는 삶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알지 못하고 우리가 한가해서 쓸데없이 예배나 하러 가는 사람들로 여기며, 더 많은 일을 부과하여 괴롭히거나 핍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렇게 주님의 떡상에 모임도 하나님과 교제하며 먹고 마시는 신령한 교제를 누리기 위함이요, 우리들이 갖는 즐거움이며 기쁨입니다.  

오늘은 부활의 삶이 무엇인지 조금 더 확대하여 느헤미야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려 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는 원래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후대에 사람들이 두 권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에스라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의 언약으로 새롭게 한 일을 말씀합니다.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이 성벽을 하나님 앞에 봉헌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앞에 사는 삶을 개혁하여 하나님 나라를 견고케 한 것을 말씀합니다. 에스라는 나라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을 세운 일을 말씀한다면 느헤미야서는 그 성전의 방벽을 견고히 건축한 일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에스라서는 나라의 법을 새롭게 한 것이 중심이라면, 느헤미야서는 나라의 방비를 든든하게 했다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을 서로 맞물리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한 권의 책으로 씌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제 2 출애굽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볼 때 에스라는 모세의 위치에 해당하는 사람이고,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으로서 성벽을 건축한 사람이니 시내산에서 성전을 지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사람의 위치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만에 돌아온 것이 제 1 출애굽이라고 한다면 바벨론에서 70년 만에 돌아온 것은 제 2 출애굽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 땅에서 돌아온 것은 전부 3차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B.C. 536년 경에 1차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고, 2차에 학사인 에스라가 돌아와 율법을 정비하였으며, 3차에 느헤미야가 돌아와 성벽을 건축하였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20년에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와 성벽을 건축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을 개혁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든든하게 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12년 동안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여 이러한 일을 한 것입니다. 개혁에 관한 일은 그가 잠시 귀임하였다가 돌아와서 보니 부패한 일들이 있어 새롭게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돌아와 성벽을 건축한 일을 1장에서 6장까지 말씀하고, 7장부터 13장까지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이 언약을 맺고 성벽을 봉헌하며 성전과 그 직무자들을 깨끗케 하는 일을 말씀합니다.

12장 27절 이하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 말씀은 성벽 건축 봉헌식을 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 찬송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 찬송하는 자들을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행렬을 지어 진행하며 서로 마주치게 됩니다. 이 봉헌식을 하는 날의 모습을 43절에 기록했습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 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이렇게 즐겁고 큰 기쁨으로 봉헌식을 한 다음에 13장에서는 모세의 책을 낭독한 후에 그 언약을 따라 성전과 안식일과 이방혼인에 관한 문제를 개혁하는 일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서는 나름대로 자기 표현의 아주 독특한 방식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개요의 제목과 소제목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억하옵소서’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등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에 대하여 말씀한 뒤에 맨 마지막에 이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9절, 6장14절, 13장14절, 22절, 29절, 31절에 나오는데 특히 13장에 많이 나옵니다. 이는 마치 무슨 1인칭 독백을 하는 형식인 것처럼 되어 있어서 혹자는 느헤미야의 자서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 경우에 ‘기억하옵소서!’라는 말을 사용하십니까? 어느 때에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하는지 알게 되면 오늘 느헤미야의 말씀을 더 잘 아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때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창세기에서 보았던 것처럼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하여 준 적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의 형제 중 하나니란 사람과 두어 사람이 유다로부터 느헤미야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들에게 유다와 예루살렘 형편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아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다 불타버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후 느헤미야는 근심이 가득하여 슬피 울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일 범죄하여 열국 중에 흩어질찌라도 흩어진 곳에서 계명을 지키고 기도하면 하늘 끝이라도 다시 모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여호와께서 기억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은혜를 입기 원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얼굴에 수색이 가득한 모습을 보이자 왕은 그 근심이 무엇인지 묻고는 그 원함을 듣고서 느헤미야로 하여금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여 보내었습니다. 이렇게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성을 돌아보았고 성벽을 52일만에 건축하였습니다.

성벽을 건축할 때 주변에 거하던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이들이 방해를 하였습니다. 때로는 거짓 선지자의 예언을 이용해 느헤미야를 암살하려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한 손으로는 성벽 건축하는 일을 하였고, 한 손으로는 칼을 들고 방비를 하며 지켰던 것입니다. 특히 암몬 사람 도비야는 성벽 건축하는 일을 보고서 조롱하기를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고 했습니다.

성벽을 완공하고 에스라로 하여금 율법을 낭독하게 하고 이 율법을 다 깨닫게 하였습니다. 에스라서에서는 돌아온 자들이 유월절을 지켰는데 느헤미야에서는 초막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은 1월 절기요, 초막절은 7월 절기입니다. 유월절이 초막절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유월절의 구원이 가나안 땅에서 초막절을 지킴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막절은 아주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낭독하자 백성들이 다 슬피 울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 그들이 70년의 포로 생활을 한 것이 서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슬픈 역사 때문에 백성이 다 울었습니다. 하지만 이 날이 초막절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울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하며 도리어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7월 24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들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합니다. 율법책을 낭독한 후 견고한 언약을 세워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도장을 찍었습니다. 언약을 지키기로 맹세한 것입니다. 그 후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어 봉헌식을 하게 되었고 이 일을 감사 찬송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이 12:27절 이하 12장 끝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13장은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그 언약에 따르지 않은 일들에 대하여 느헤미야가 개혁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14절은 성전과 직무자들에 대한 개혁을 말하고, 15-22절까지는 안식일 문제를 개혁하였으며, 23-29절까지는 이방인 혼인 문제를 개혁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30-31절에 “내가 이와 같이 저희로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13장은 성전과 안식일 그리고 이방혼인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1-14절의 내용을 살펴 보십시다.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리도록 하였는데 그 책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이 율법을 듣고서는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분리해 내었습니다.

그런 중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성전과 직무자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 엘리아십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신문지상에 한참 떠들고 있는 정경유착과 같은 일을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전 국무총리에게 달러를 전달했다, 아니했다로 공방을 벌이고 있잖습니까! 

원래 하나님의 성전은 이방인이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인데 그 성전 안 골방에 이방인을 위한 방을 마련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도비야가 가까운 사이여서 제사장 엘리아십이 레위 사람들을 위한 창고방으로 썼던 곳을 비워 그 방을 도비야에게 쓰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을 느헤미야가 잠시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에게 갔다가 온 사이에 행하였습니다. 다시 돌아와 느헤미야가 이 사실을 알고서는 그 골방의 도비야의 세간들을 다 집어 내어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원래 레위 사람들을 위한 방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또 성전과 관련해서 일이 있었는데 레위 지파는 성전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 성전 봉사를 하지 않고 자기 밭으로 일하러 가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드려 봉사토록 하였는데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므로 레위 자손들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성전을 떠나 자기 밭으로 일하러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민장을 꾸짖고 하여 다시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드려서 돌아와 성전봉사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후 14절에 말씀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여기에 기억해 달라는 말은 하나님이 느헤미야가 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15-22절은 안식일 지킴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럼 안식일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15절에 보면 유다 사람 중 하나가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팔았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꾸짖고 성문을 안식일에 닫고 열지 못하게 하며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간 일이 바로 이런 안식일을 지키지 않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 성벽을 건축하여도 이렇게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 성이 어떻게 지켜지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장사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자며 기다렸습니다. 그리하여 느헤미야가 모두 잡아들이겠다고 하자 저희들이 안식일에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즉 안식일 문제를 새롭게 한 후에 역시 2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여기서의 기억은 ‘아끼시옵서서’의 뜻입니다. 

그리고 23-29절까지는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한 일을 말합니다. 즉 이방 여인과 혼인한 문제입니다. 여기 보니까 이렇게 이방 여인과 연합하여 낳은 자식이 있었는데 아스돗 방언은 절반쯤 하고 유다 방언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치 우리 나라의 외국교포 2세와 같았습니다.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하잖아요?! 그걸 보고서 느헤미야가 책망하고 저주했습니다. 두어 사람을 때리고 머리 털을 뽑았습니다. 

그리고서 이스라엘의 패망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았는가 하며 다시는 이방의 딸이나 아들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합니다. 그 패망의 원인은 바로 솔로몬 왕이 이방 여인들을 첩으로 데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다 함으로 느헤미야가 그를 쫓아내었습니다. 

그런 후에 역시 이런 말을 기록합니다. 29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저희가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기었사오니 저희를 기억하옵소서.” 이렇게 성전과 안식일 그리고 이방혼인 문제를 개혁하고 30절 이하에 느헤미야는 이 일을 기억하셔서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벽을 건축함은 하드웨어적인 일입니다. 그에 비하여 언약을 지키고 사는 삶은 소프트웨어적인 일입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게 되었는데 한양대 여대생들이 아프리카 원주민과 생활하며 그들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유럽 사람들이 먼저 다녀갔습니다. 그들이 이 원주민들을 도운답시고 집을 세워 그 안에 컴퓨터와 여러 전기 제품을 달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나고난 뒤에 아무도 그 곳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원주민들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그런 기계들을 움직일 기술도 다 가르쳐주지 않고 떠나버려 결국 모두가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여대생들이 고백하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여대생들이 원주민들을 낮게 보고 도우려 왔다는 자만심이 문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원주민들과 마음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밭일을 함께 돕고 집을 고치고 여러 가지 물질적인 일을 도왔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 가지고는 견고한 관계를 이룰 수가 없었고, 원주민들은 이 한국 여대생들도 잠깐 왔다가 가는 사람들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단지 성벽을 잘 건축했다 하여 그 나라가 견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언약을 지키는 삶이 있어야만 그 나라가 견고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사는 언약적인 삶을 다 표현하자면 여기 13장에 나오는 일처럼 성전, 안식일, 이방혼인문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그냥 그 때 발생한 문제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예배하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형식을 갖고 문제들을 개혁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에서 직무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합니다. 언제? 안식일에.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들은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언약입니다. 즉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금방 현 시대의 교회모습이 연상이 될겁니다. 이제 6월이면 지방자치 선거가 있는데 이런 선거철이 되면 교회를 방문하는 자들이 생깁니다. 자기의 정치적 목적으로 오기도 하고 이런 자들을 반기는 교회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비야에게 한 골방을 마련해 준 것처럼 예배 시간 끝날 때 쯤 발언시간을 이 후보자들에게 주는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을 위하여 십일조를 내어놓지 않아 그들이 생계를 위하여 밭일로 돌아가 버린 것처럼 교회가 사역자들을 봉사하지 않아 사역자들을 생업의 현장으로 내어쫓기게도 합니다. 또한 안식일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에 생업을 위하여 살지 예배하기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 먹고 마심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유력한 권세자들과 연합을 추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기 부와 명예를 추구하고 자기 권세를 자랑하기 위하여 이방 사람들과 혼인을 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새롭게 하였어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을 때 예루살렘 성은 오신 왕께 열매를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마치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내지 못하여 말라버리도록 저주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으로 오셨는데 주인에게 합당한 열매를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드려야 하는데 도리어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 열방 사람들이 유다 사람의 옷을 붙잡고 매어 달려 함께 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우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만의 성전이었지 열방이 함께 들어와 예배하는 성전은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시며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고 그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아무리 견고한 돌로 그 성전이 세워졌다 하더라도 그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도 남지 않고 불태워 없어질 것입니다. 그 일이 로마 군대로 말미암아 주후 7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로마 군대가 성을 마주하여 토성을 쌓고 공략하여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리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면이 절벽이요 뒤에는 높은 산이었던 예루살렘 그 견고한 성도 결국 무너지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오시리라 예언하였던 주님이 오셨는데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배역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셔서 주님의 죽고 부활하심으로 그의 몸으로 새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하늘 도성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비록 주님은 육체에 계실 때 모든 이방인의 권세자들과 심지어 로마 군병들에게까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비웃는 무리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오직 아버지를 순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보좌 우편에 승천하심으로 앉으셔서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다시는 그의 손에서 그의 백성을 빼앗지 못하도록 함께 하시고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 하는 것과 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이 세 치의 혀로 어느 순간에 어느 장소에서 고백한 것으로 모든 구원이 견고하게 완전하게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이젠 우리의 몸이 주님의 성전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권세의 몸에 여러분을 연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너희 몸이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더냐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지만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표적이 교회를 견고하게 하지 않고, 지혜가 교회를 든든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만이 교회를 든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어느 날 어느 시에 주님을 영접했다는 어떤 사건만으로는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드웨어적인 절차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결혼식을 했다고 모든 결혼이 다 똑바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 곧 결혼을 온전케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한 순간의 고백만 붙들고 살 수는 없습니다. 성전에서 안식일에 교제함과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에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럼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교회는 부활의 복음을 따라서 사는 곳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모두 헛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언약을 따라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를 견고케 하고 온전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부활의 날에 주님의 떡상에 모여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 신령한 교제가 바로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일에 예배하면서도 자기의 일을 걱정하고 자기의 성공을 꿈꾸고만 있습니다. 한 주일 내내 일에 매달려 살았으면서도 주일에는 힘이 들고 피곤하여 예배는 참석해도 힘이 되거나 생명이 되지를 못합니다. 설교 시작하면 그때부터 벌써 몸이 곤하여 졸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구원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게 속고 있는 것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몸에 연합된 성전으로 우리를 부르셨는데도 안식일에 성문으로 들어와 오직 여러 가지 물품을 팔기 위하여 몰려드는 장사꾼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일에 전부 매여 있습니다. 밤낮으로 일하다가 가까스로 주일 아침에 몸을 일으켜 억지로 교회에 나아와 예배한다고 앉아 있으나 그런 하드웨어적인 것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언약을 따라 사는 삶이 동반되어야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다 하는 이름이 아니라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도 주일마다 졸고 있으면 잠자는 것이요 그것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살았다 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말씀 안에 깨어 있어서 육신에 속한 것을 쫓아내고 죄에 거하지 아니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를 기억하옵소서’, ‘나를 아끼시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할 터인데 어찌 우리가 그렇게 간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킬 듯이 찾고 있는데 어찌 우리를 지킬 수가 있으며 우리가 견고해 질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몸에 속하여 주일에 예배하는 자로써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지 않고서 어찌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아무리 하드웨어가 좋다 하더라도 그 안의 성도들이 언약을 따라 사는 삶이 없는데 어찌 교회가 돈만으로, 건물만으로 지켜질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어찌하다가 한 주일 지각하는 것이면 그래도 좀 참을 수 있겠는데 어찌하여 매주일 지각하는 것입니까? 그래놓고서도 내 구원은 보장되었다고 안심하겠습니까? 정말 그런 거짓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삶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습니다.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 안에 사는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삶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과 권세로 살아가는 놀라운 영광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그것이 주님의 몸된 성전이 된 우리의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배하는 백성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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