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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의 한계와 극복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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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한계와 극복 (갈 2:20)


기독교 한계 

20년 전 쯤 남대문 새벽시장에 여성 옷을 사기 위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어느 지하상가로 내려갔을 때 내가 전에 백화점에서 마음에 들어 했던 옷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보물을 찾은 듯한 표정과 탄성이 나도 모르게 나왔습니다. 그 소리와 표정을 읽은 건너편 매장주인이 나에게 그 옷을 가리키며 그 옷에 대해서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옷이 걸려있는 매장의 주인은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화장실에 갔다고 하면서 저에게 여러 말을 붙이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대화하는 중에 그 사람의 매장에도 같은 옷이 있음을 발견했고, 내가  발견한 옷가게 주인과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옷이 진열된 매장의 주인이 올 때까지 건너편 가게 주인은 흔쾌히 이야기를 나눠주었고, 처음 옷을 봤던 그 가게 주인이 돌아와서 옷을 샀습니다. 

그 일 이후 지금까지 흔히 가장 윤리가 없는 곳을 시장 바닥이라고 하지만 교회가 자칫 잘못하면 어느 면에서는 시장보다 더 윤리가 부족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위기를 느끼면서 교회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거나, 교리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렇게 된 요인이 핵심가치 또는 방향을 잘못 잡은 결과라고 판단합니다. 


지금까지 추구한 방향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핵심가치나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드리기 전에 요나서를 기본으로 현재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말씀드리기겠습니다. 

1. 도시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이라크이며 당시 아수르의 수도 니느웨성은 사흘을 걸을 만큼 대도시이었습니다. 요나 선지자께서는 하루 동안『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 그 결과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하며 장례식 때 입는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했습니다. 왕도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고 조서를 내려서 전 국민과 나라의 모든 짐승까지도 그냥 금식이 아니라 물까지도 마시지 않는 금식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한 도시를 뒤집는 것 보다 우선해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2. 이적을 체험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니 물고기가 요나를 마른 땅 위에 뱉어 놓았습니다. 살아있는 물고기가 요나 예언자님을 토해 낸 것입니다. 또 요나는 눈을 뜬 후 니느웨까지 상당한 시간을 걸려서 갔습니다. 세상에 이런 이적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구합니다. 능력을 구합니다. 그러나 이적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은 신앙이 퇴색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지 않으면 옛날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3. 대단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나는 지옥 같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지옥 같은 환경에서도 감사가 있었습니다.『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여러분, 간구의 기도 뿐 아니라 믿음의 기도도 중요합니다. 감사가 있는 기도 역시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은 신앙이 퇴색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징계를 받으면 신앙이 바르게 될 것이라는 것도 요나를 보면 틀린 것이 증명됩니다. 양심적으로 살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것도 틀린 생각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틀린 생각입니다. 


우리가 우선 바꿔야 할 것 

요나는 한 도시를 뒤집어 놓고도 기뻐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니느웨가 하나님께 회개하여 멸망을 피하게 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갔을 때나 지옥 같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 속에서 살아난 뒤에도, 한 도시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보고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니느웨가 하나님 앞에 회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신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신을 그대로 모시고 하나님을 또 모셨던 것입니다. 

우리시대 교회의 위기를 해결하는 길은 결국 우리 자신을 죽이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자존심을 버리고, 아담으로부터 이어오는 옛사람을 버리고 예수생명으로 바꾸는 것입니다.(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뀌었다는 의미를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트에서 물건을 고른 후 돈을 지불하면 그 물건의 소유는 돈을 지불한 사람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내 손 드립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드릴 것도 바칠 것도 없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소유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합니다. 


가져야 할 신앙 

우리가 성령님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영도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삼위일체 핵심은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의 핵심입니다. 


바뀐자의 삶 

첫째, 바뀐자는 어떤 상황이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 건축 이후 13년 동안 재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6년은 정말 다음 주일 우리교회 강단에서 설교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한 주 한 주 설교했습니다. 그러는 중 교인들이 한분한분 떠나면서 참석인원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절반으로 준 상태에서 바닥을 치고 올라온 것이 아니라 또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차라리 멀리 이사 가면서 떠나게 되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 가까운 교회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도 단 한 교회도 이명 증명서를 해 달라고 요구하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떠날 때 마다 뒷발질 하는 것들이 제 심장을 고장 나게 했습니다. 화장실을 하루에 15번 정도 가야 할 정도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다가 결국 쓰러지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 교회가 하나님 것입니다. 망신을 당해도 하나님이 망신당하실 것이고요. 나는 그냥 견디겠습니다.’라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나를 맡긴 자는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 목숨을 걸고 추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산다고 생각하면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내 뜻은 포기해야만 한다고 압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싸울 수 있는 용기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나타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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