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실패도 아름답다 (출 2:11-25, 히 11:24-26)

  • 잡초 잡초
  • 1018
  • 0

첨부 1


실패도 아름답다 (출 2:11-25, 히 11:24-26)


I. 명감독이 명선수를 만든다

미국 알리바마 주는 목화 투산 단지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농장마다 목화를 심었는데 목화 농사가 안 되는 겁니다. 이상한 벌레가 나타나서 농사를 다 망쳤습니다. 주민들은 기도하고 고민하다가 땅콩을 심었는데 엄청난 수확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땅콩을 심기에 좋은 농장들이었습니다. 농장 한 복판에 벌레를 형상으로 만든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 밑에 「벌레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의 주제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실패도 아름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실패도 아름답다」입니다. 

요즘 TV를 켜면 김연아 광고 한편 정도는 봐야 TV를 끌 수 있습니다. 서울 도심을 잠깐 달려도 김연아 광고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김연아 선수는 온 국민을 행복하게 해 준 인물입니다. 지난 밴쿠버 동계올림픽 김연아 선수 곁에는 항상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브라이언 오셔 코치, 안무 코치인 데이비드 윌슨 그리고 어머니 박미희씨입니다. 

김연아 선수의 끼는 넘어져도 웃어주고 실수해도 안아주는 오셔 코치에 의해 다듬어지고 그 빛을 발했습니다. 안무 코치 윌슨은 온갖 재롱까지 피워가며 김연아를 행복한 스케이터로 만들어 갔습니다. 세계를 누비며 전지훈련을 하면서도 김연아 곁엔 어머니가 있었기에 항상 그곳이 고향이요 집이었습니다. 언제나 명감독이 명선수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우리를 명선수로 만들어 가시는 명감독이 한 분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 
우리가 실패할 때도 웃어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생 기술이 모자라면 지혜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쓰러지고 넘어져도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과연 명감독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모세의 실수와 실패조차 기회로 삼아 그를 지도자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를 이스라엘 지도자로 만든 코치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도 아름답습니다. 

넘어져도 웃어주는 브라이언 오셔처럼 모세의 실수조차 하나님은 기회라 말씀하십니다. 김연아를 행복하게 춤추는 선수로 만들었던 데이비드 윌슨처럼 하나님은 모세와 나의 지도자적 끼를 끄집어내십니다. 항상 함께 동행하는 엄마처럼 하나님은 모세의 광야생활에서도 늘 함께 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모세의 명감독이셨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명감독이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II. 위대한 실패

오늘 본문 출애굽기 2장 11절-25절은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 열정을 가지고 그 백성을 도와보려고 하다가 철저히 실패하는 모세, 그 백성과 모세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11절 “모세가 장성한 후에” 출애굽기 기자는 모세가 얼마만큼 장성했는지 침묵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사도행전 7장 23절 “나이가 사십이 되매”라고 하는 말씀을 통하여 이때 모세의 나이가 40이었다고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10절 말씀이 모세가 태어나던 때 얘기이므로 10절과 11절 한 절 사이에 40년이라는 역사가 흘러갔습니다.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모세가 히브리인을 찾아갔다고 기록하지 아니하고 자기 형제들을 찾아갔다고 기록함으로써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왕궁에 살았지만 그의 심장 속에는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나는 히브리 사람이다.’ 라는 자각 의식이 강하게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가 본 노동현장에서 한 애굽인 노예 감독관이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여기 “친다”는 말은 “쳐 죽인다”는 말로도 쓰이는 히브리어입니다. 한 마리 짐승처럼 일하는 자기 동족 -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맞아 죽는 현장을 보고 모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 - 여기 “보았다”는 히브리어의 표현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구경꾼처럼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마치 매 맞고 죽어 가는 그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처럼 고통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12절 모세는 주변에 이 노예 감독관 외에 다른 사람이 없음을 확인합니다. 노예들이 일하는 동안 호젓한 그늘에서 혼자 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틈에 모세는 이 감독관을 쳐죽이고 모래에 묻어 버렸습니다. 완전 범죄에 성공했고 이제는 애굽인들이 자기 동족을 함부로 다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이런 행동에 대해 성경은 잘했다, 잘못했다는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3절 모세는 이튿날 다시 그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이번에는 자기 동족 히브리인 두 사람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잘못한 놈이 젊고 힘이 세다고 약한 사람을 마구 때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이 말을 들은 그 사람의 반응은 상식 밖이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14절) 두 가지 내용으로 모세에게 “죽여! 죽여!” 덤벼듭니다. “누가 너보고 재판관 하라고 그랬어? 어제는 애굽사람 때려 죽이더니 오늘은 날 때려 죽이겠다고? 그래 죽여봐 죽여봐.” 이렇듯 한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는 이 모습을 통하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지 못하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모세의 심장 속에는 이런 생각이 흘러갔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실까?’ ‘과연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실까?’ 깊은 회의를 가질만한 사건이었습니다. 

모세는 완전범죄로 성공한 줄 알았던 이 사건이 이미 세상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14절)

이 사건은 당시 신문 1면을 대서특필로 장식하고, 왕궁이 발칵 뒤집혀지고, 노동현장 이곳 저곳에서 설왕설래했을 법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기자는 이 사건을 담백하게 기록합니다. 

15절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출애굽기 기자는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 작은 사건 하나로 말미암아 모세가 왕궁을 떠나야 했고 미디안 땅으로 갔다는 사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왕족이 백성 한명을 죽인 사건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왕이 모세 왕자를 죽이겠다고 덤볐다는 것은 왕권을 둘러싸고 궁중의 정치세력 간에 암투가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정적들이 차제(此際)에 모세를 제거하고자 일제히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출애굽 기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는 것입니까? 

‘상황이 모세가 왕궁에 머물 수 없었다. 모세로 하여금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작은 사건을 악화시킬까요? 도망갈 수밖에 없도록 모든 상황을 조정하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의 실패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광야로 몰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인들은 광야를 버려진 땅이라 하여 desert land - desert(사막)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집스럽게 광야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 광야에서 선지자들과 수많은 수도사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광야에서 통일왕국의 지도자 성군 다윗을 만들었고 여기서 모세가 나왔고 여기서 이스라엘 나라가 탄생되었다는 것이 성경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것은 분명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간 것이었습니다. 바로와 정적들을 피하여 도망가 숨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였고, 모세의 믿음의 결과였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금 다듬고 훈련시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도 위대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고통도 기회요 실패도 아름답기만 한 것을...


III. 거절하고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40년은 애굽 왕궁에서, 또 다른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나머지 40년은 백성들과 함께 출애굽 여정에서 보냈습니다. 

D.L 무디는 그의 한 설교에서 모세 설교를 하며 

처음 왕궁 40년, I am somebody - 나는 내가 배운 지식과 주먹과 권력과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꽤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기간이었습니다. 

두 번째 40년 기간은 I am nobody. 나는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절망하고 좌절했던 시간이었고, 나머지 40년 백성들과 함께 출애굽 했던 모든 여정들은 I am God's buddy! 나는 하나님의 절친한 친구, 하나님의 절친이었던 기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생애 중 제2기 I am nobody! 어쩌면 가장 비참했던 한 기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믿음의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도 아름다운 기회요 믿음이었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신약성경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역사가 흐른 다음에 출애굽기를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의 관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24절 - 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4절에 중요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거절하고” 그는 무엇을 거절했습니까?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모세는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인 이집트 제국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던 놀라운 명예와 권세를 거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5절에서 “쾌락”을 거절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4절에서 거절하고 소극적으로 기록한 성경 저자는 25절에 이르러서 대단히 적극적으로 “더 좋아했다”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요 더 가치  는 일이요 더 보람찬 일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고 그것을 “더 좋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26절에서 그는 부요를 당당히 거절합니다. 더욱 적극적인 비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았다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애굽의 보화를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노력하고 애써도 보물과 보화를 얻기 어려운데 모세는 가만히 있어도 모든 보화를 누릴 수 있는 그 위치에서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내게 기대하는 삶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지막때 종말의 선지자로 살아가기 원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그 꿈이 무엇일까?’를 항상 생각하며 그 길을 향하여 당당히 나아갈 수 있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IV. 미디안 광야 생활

모세의 이야기가 히브리서의 해석처럼 여기서 끝났다면 얼마나 근사했을까요? 그러나 믿음의 길에도 실패는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과 열정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보겠다고 나섰던 모세는 비참하게 깨집니다. 철저히 실패합니다. 자기 동족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애굽 왕으로부터 범죄자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이곳저곳 숨어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은 있습니다. 

모세가 막다른 골목에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절망과 좌절의 그 순간에도 모세를 명선수로 만드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실패의 순간, 고통의 순간,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실패의 자리에도 하나님의 계획은 숨어 있었습니다. 

가정적인 큰 어려움을 겪고 개인적인 아픔이 있어서 섬기던 교회를 사임한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마흔이 다된 젊은 목사가 주일날이 되었지만 갈 곳이 없었습니다. 토요일이 되었지만 다른 목사님들은 설교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그 시간에 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시켜놓고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오전 오후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손님 토요일에 이렇게 혼자 앉아 긴 시간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면 영업에 지장이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나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인의 말을 듣고 몰려오는 창피함을 뒤로 한 채 카페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다가 이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그래 내가 카페를 만드는 거야.’ 내 카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카페 마담이 되면 되는 거지 뭐. 오래 앉아 있어도 편안한 카페. 리필이 계속 가능한 카페. 이 목사가 만든 카페가 바로 “민들레 영토!”입니다. 그는 전국에 20개가 넘는 지점을 낸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찬송을 들을 수 있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실패하고 도망 다니던 모세. 미디안에 머물던 어느 날 우물곁에 앉아 잠깐 쉬는 사이에 운명적 만남이 일어납니다. 성경에서 우물은 가끔 연인들의 만남의 자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로맨스로 표현하면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나는 자리. 성경은 바로 그 자리로 우물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십보라의 러브스토리가 우물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삭의 종이 장차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만난 자리가 우물가였고, 야곱과 라헬의 로맨스가 시작된 자리가 우물가였습니다. 

사랑하는 여인 십보라와의 만남. 그의 아버지 르우웰 제사장의 사랑과 관심을 본문은 짤막하게 기록해 내려갑니다. 이 여인과의 사랑이 열매를 맺어 게르솜이란 아들을 낳게 되었고 40년 미디안 광야 생활을 성경은 오늘 본문을 건조하게 표현하고 넘어갑니다. 

40년 왕궁 생활과는 사뭇 다른 광야 40년. 양치기 40년 동안 모세가 무엇을 했을까? 어떤 절망과 좌절의 순간들이 있었을까? 민족의 지도자로서 40년 동안 자신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었을까? 이 광야 한복판에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지켰으며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하고 자기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 표현하고 살았을까? 출애굽기를 읽는 독자들의 상상에 마음껏 맡겨 버리고 역사의 무대는 다시 흘러 40년 후로 옮겨갑니다. 


V. 고통도 아름답다

23절 “여러 해 후에” 또 4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애굽 왕은 죽었고” 애굽 왕은 죽었으나 핍박과 고통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더욱 극심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2장 23절-25절)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돌보실 것이라는 암시를 던짐으로 오늘 본문은 막을 내리며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향수 생산업자들은 발칸산맥의 장미를 가장 춥고 어두운 깊은 한밤중에 장미향을 채취합니다. 왜요? 깊은 밤에 찬바람이 몰아치는 그 시간에 장미는 가장 향기로운 향기를 품어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기도의 향기가 쏟아지는 때가 언제였습니까?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이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비명이 한마디 외마디 기도가 되어서 “오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도우시고 돌보시고 구원하시는가를 보라는 듯 성경본문은 많은 암시를 남겨놓고 이 장의 막을 내립니다. 

영적인 성도는 압니다. 고통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고통도 아름답게 만들어 갑니다. 고통도 새로운 역사의 기회가 되는 것이고 실수도 실패도 아름답기만 한 것을...

 미국 한센병 환자 재활원의 원장으로 일했던 폴 브랜드 박사가 인도에 가서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고, 영국에 가서 이곳 저곳 방문하며 긴 시간의 기차여행을 했습니다.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호텔에 돌아와 목욕을 하고 발뒤꿈치를 만지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일이 별 것 아니겠으나 인도에서 수많은 한센병 환자를 치료했던 폴 브랜드 박사는 섬광처럼 떠오른 무언가에 깊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기계적으로 일어나서 바늘을 찾은 그는 바늘을 찾아서 발뒤꿈치를 살짝 찔러보았으나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더 깊이 찔렀습니다. 피가 솟아났지만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정말 한센병인가.’ 가족들과 떨어져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외딴 곳에서 외롭게 살아야 하는 자기 인생이 너무나 서럽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 어찌 내게 이런 고통을...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침대에 엎드려 흐느껴 울다 잠이 들고 또 깨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녘 손에는 아직도 바늘이 들려 있었고 그 바늘로 다시 발뒤꿈치 복숭아 뼈 밑 부분을 찔렀습니다. 그러자 얼마나 아프던지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증세는 다름아닌 오랜 여행시간의 기차 여행으로 지쳐 발 한쪽 모퉁이가 마비되었던 것 뿐이었습니다. 새벽에 마비되었던 발이 풀어져 다시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 인생에 어떤 고통이 온다할지라도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엔도슈사꾸의 단편 「독약」에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생체실험을 하던 “로데” 의사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간을 자르고 폐를 잘랐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했을 때 양심의 고통이 얼마나 자기를 아프게 짓누르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100번이 되고 1000번이 되면서 이제는 양심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결국 미쳐버리고 맙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다니며 내게 고통을 되돌려 달라고, 양심의 통증을 돌려달라고 부르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간의 고통, 하나님이 지금 만지시는 손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통 가운데 이곳에 오셨습니까?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외롭고 아픈 고통을 느끼며 눈물을 닦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당신이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기억하시고 돌봐 주실 수만 있다면 고통도 여러분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고통도 아름답기만 한 것을, 인생은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지요. 나에게도 약점이 있고 너에게도 약점이 있고 너도 넘어질 수 있고 깨어질 수 있고 나도 실패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실 수 있다면 내 신앙이 내 기도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실패도 아름답기만 한 것을...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