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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죽어도 살리라 (요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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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살리라 (요 11:17-44)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요즘에 미드라고 하지요. 미국에서 건너온 드라마. 케이블 TV를 통해서 소개됐습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이차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전후로 미국의 공수부대 활약상을 주제로 한 전쟁 드라마입니다. 

그 중의 한 에피소드를 보면 공수부대 요원이 전진에 투하를 해서 전쟁이 두렵고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참호에서 잠이 듭니다. 이미 자기 동료들은 전투를 하러 멀리 떠났는데 이 병사는 전쟁이 두려워서 참호에서 혼자 잠이 드는 그런 사건을 묘사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동료들과 합류합니다. 그때 한 상관이 그에게 이런 충고를 합니다. ‘우리는 다 두렵다. 그런데 네가 특별히 두려워하는 이유는 아직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라. 그러면 용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은 용기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천안함이 침몰한지 이제 열흘이 됐습니다. 승조원들의 생사를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가족들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열흘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입에 올리기를 꺼리는 말이 바로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말하기조차도 거부합니다. 마치 입으로 그것을 말하면 그것이 현실이 될까 염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입니다. 잠수부가 잠수 장비를 가지고도 물속에 10분 이상을 있을 수가 없는데 잠수장비도 없는 승조원이 그 깊은 물속에서 열흘을 생존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당면한 현실을 어떻게든지 회피하려고 합니다마는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서 지극히 담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라고 말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읽지 않았지만 14절에 예수님이 나사로는 죽었느니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죽어야 죽음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을 말씀하실 때도 완곡한 표현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 믿는 사람도 완곡한 표현을 쓰려고 하지 죽음이라는 말은 극히 꺼립니다. 소천 하셨습니다, 별세하셨습니다, 천국 가셨습니다, 이런 말을 쓸지언정 죽었다는 말은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죽으셨다 살아나셨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저희 동네에 장례하는 것을 보면서 죽음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그것을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저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또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왜 장례식에는 저런 옷을 입을까. 왜 사람들이 저렇게 울까. 그리고 저 냄새는 무슨 냄새인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그 냄새의 정체가. 그러나 저는 그때에 그런 모든 장례식에 관계된 것이 전부다 무섭고 또 이질적이고 또 저에게 두려움을 안겨다 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이후에 제가 어른이 돼서 목회자가 되고 목회자가 되니까 성도들의 장례를 많이 집례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입관 절차에는 입회를 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입관할 때마다 들어가서 거들고 또 입회했는데 그러니까 많은 유해를 접하면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을 가까이서 보게 되고 그리고 과거에 제가 무서워했던 이유가 모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무서워하고 또 돌아가신 분들을 접할 기회가 없다보니까 무서워했던 것인데 실제로 유해를 앞에 보게 되면 첫째는 굉장히 불쌍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이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살았을 때는 발랄하고 힘이 있고 웃고 그리고 운동하던 사람이 생명이 떠나게 되면 그야말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사람이 옮기는 대로 옮겨가고 옷을 입히는 대로 옷을 입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 그것을 접하게 되면서 죽음에 대해서 긍휼의 관점에서 또 어떤 사람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담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로서 결혼식에 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돌잔치에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인데 장례식을 인도하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럽고 저에게도 큰 짐으로 여겨집니다.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리신 사건을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일면 기사감입니다. 그런데 왜 네 명의 복음서 기자 중에 요한만 이것을 기록했을까 약간 궁금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일면 기사감이라면 모든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할 법한데 왜 요한만 나사로를 일으키신 사건을 기록했을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일으키신 것도 대단한 일인데 그건 누가만 기록했어요. 요한이 그것을 픽업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이 열 두 살 난 소녀를 일으키신 사건도 대단한 일이고 물 위를 걸으신 일, 이런 모든 일이 대단한 것이지만 요한이 그것을 채택하지 않고 선별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많은 기적 중에 몇 가지만을 추려서 편집했다는 사실은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열거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할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런, 이런, 이런 일을 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고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이 복음서 기자들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나사로를 살리신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이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 말씀에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씀이 기록돼있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게 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을 생각하면 막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에게 연결시키면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요한이 이 사건을 여기에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사도신경으로 고백할 때 너무 짧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많이 있어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그 말도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교회를 믿는다 라는 얘기에요. ‘거룩한 공회’ 그 말은 교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내가 굳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지 않겠느냐.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교회를 다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냐. 교회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그러나 사도신경에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교회에 대한 믿음이고 그리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다시 말하면 우리는 혼자 홀로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의 교제를 통하여 신앙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으로만 생각해서 교회가 나에게 유익한 것만을 생각하려고 하는데 내가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성도의 교제가 내게 유익하다 이것만 생각하면 안돼요. 내가 성도와 교제함으로 성도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요. 그런 면에서 성도의 교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게 유익한 것뿐만이 아니고 내가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고 내 믿음으로 남의 믿음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교회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묻지 말고 이미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내 지체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면 교회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마치 몸의 한 부분이 마비가 돼서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온 몸이 손해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눈이 역할을 안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귀가 고장 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발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온 몸이 고생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교회의 지체가 되었는데 이제 지체인 내가 내 기능을 다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지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 될 필요를 나의 관점에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내 믿음을 지켜서 내게 복이 되고 내게 은혜가 되는 면이 있지만 내가 내 믿음을 지킴으로 형제와 자매에 대한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내 믿음을 지킴으로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도와줄 수가 있고 그들에게 신앙적인 격려가 되고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시험 앞에서, 유혹 앞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시험을 참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까. 내가 좀 더 인내함으로 이것이 교회에 덕이 되고 남이 실족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극히 개인주의적인 현대인의 정서가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도들의 진심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진짜 신앙이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당히 개인적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믿음, 내가 믿으면 됐지, 내 신앙을 내가 지키면 됐지 남이 무슨 상관이냐. 남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그러나 교회라는 것은 서로 상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겨라 내가 너희 발을 씻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므로 교회는 서로 엮여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아파하면 나머지도 아픈 것이고 한 사람이 승리하면 전체가 그 승리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에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것 중의 하나가 ‘몸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우리는 영생을 믿지만 그 영생이 구체적으로는 몸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뜻하는 것은 우리도 부활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몸을 떠나면, 몸과 작별하면 다시 돌아올 뜻이 없는데 어떻게 다시 몸을 입게 된다는 얘기냐. 그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실 때 인간을 만드실 때 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결국 그 창조의 그 섭리를 회복하는 것은 죄를 짓기 이전에,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형태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망가졌던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회복하는 것이 몸이 다시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흑인들의 장례 음악을 보면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곡입니다. 우리는 그 노래가 교회음악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냥 재즈음악인 줄 알았는데 찬송가입니다. 그리고 흑인들이 언제 그 노래를 불렀느냐면 장례식에서 불렀습니다. 장례식에 묘지로 가면서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marching 이라는 말이 그래서 거기에 나오는 겁니다. 

marching 이라는 말은 행진한다는 말인데 성도가 죽어서 장례하기 위하여 묘지로 가는 것을 성도가 행진하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장례식에 축제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예수님이 당신의 믿음 안에 죽은 사람을 일으키실 것을 믿기 때문에 미리 축하하는 것입니다. 미리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고인이 죽어서 장례하러 장지로 가지만 성도들이 행진할 때 나도 그 중에 있기를 바랍니다 라는 의미로 축제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일으키신 것은 장차 예수 안에 죽은 모든 자들을 일으키실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때 모든 사람을 다 일으키신 것은 아니에요. 나사로 한 사람을 일으키셨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무덤가에서 나오너라 이렇게 하지 않고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냥 나오너라 했으면 그 공동묘지의 수많은 사람들이 저 말씀인가요? 저요? 저요! 저도 일어나야겠구만요. 

이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맛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장차 모든 사람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기 전에 예수께서 하나의 예표적인 사건으로 천국의 맛을 보여주기 위하여 장차 일어날 일의 예표를 보여주기 위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는 나사로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부르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 날에 너희를 일으키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변증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가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시대에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이 믿을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목회자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활절에만 하는 게 아니고 두고두고 해야 될 것입니다.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의 여러 가지 증거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느냐. 왜 기독교는 일요일에 모이기를 시작했느냐.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던 사람들은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모인다면 토요일에 모여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 이유는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따로 일요일에 모여서 예수님을 경배한 것이 주일예배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안식일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고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서서히, 교리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서서히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고 초기부터, 처음부터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에 모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서서히 세월이 흐르면서 정립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서서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교리를 그들의 설교 속에 포함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최초의 설교내용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그 사건이 생기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의 공생애 ․ 메시지 ․ 예수님의 사역 ․ 예수님이 오신 목적 이런 것을 면밀하게 검토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예수님의 삶은 불완전하고 예수님의 메시지는 반쪽이고 예수님의 사역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세상을 구원하려는 분이 어떻게 삼년 반 목회하고 돌아갈 수가 있습니까. 삼년 반, 얼마나 짧은 시간입니까. 대학교도 4년인데 그것에도 못 미치는 삼년 반. 그렇다고 예수님이 무슨 단체를 만든 것도 아니고 기관을 만든 것도 아니고 조직을 만든 것도 아니고 그 짧은 세월에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어요. 

부활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부활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론은 부활한 후부터라는 얘기입니다. 그때 가서 얘기하자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교회가 시작되고 그때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그때부터 만민에게 이 복음이 전해질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굳이 오래 목회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단체를 만들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조직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내가 죽고 다시 살리라’ 말씀하시고 죽으셨어요. 

예수님의 죽음까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음악을 통해서, 거기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울고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부활은 사람의 설득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놀라운 사건이기 때문에. 이건 교회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입니다. 성경의 기록 ․ 역사적인 정황 그리고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이것이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사람의 희망사항이 아니고 제자들이 기대했던 바도 아니고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고 이것이 기독교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것을 믿는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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