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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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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5)


2010년 한해가 벌써 4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새해 벅찬 기대감과 희망 속에 출발했지만, 안팎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새벽 벽두부터 남미의 작은 나라 아이티의 지진소식이 모두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온 교회의 정성을 모아 전해진 사랑으로 지금 아이티는 많이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그럴 즈음에 또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나 모두를 긴장시켰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3월에 우리나라에도 어려움이 왔습니다.  우리 해군의 정찰함대인 천안함이 백령도 앞바다에서 갑자기 침몰한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가까스로 구조된 생존자들이 있지만, 아직 생사를 알지 못하는 50여명의 실종자도 생겼습니다.  또 실종자를 구조하려다가 또 다른 희생이 생겼습니다.  생존자들은 충격 속에 눈물만 흘리고, 실종자가족들은 더욱 통곡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터넷에는 '국가의 마지막 명령이다 모두 살아서 돌아오라'는 온 국민의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만 실종자 확인이나 인양이나 사고원인이 장기화될 조짐입니다.  4월을 맞이하여 계절적으로는 봄이 되었지만 아직 내면적으로는 봄이 오지 않은 차가운 시기입니다.

수고와 슬픔의 인생에서 힘들고 어려운 가정들을 봅니다.  사는 게 힘들고, 직장과 일터가 풀리지 않아 힘들고, 부모와 자녀의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육체의 질병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 마음의 상처와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성도들, 아직까지 끝나지 않는 고통의 터널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늘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까지 쉽지 않는 삶의 굴곡으로 모두가 힘들어 하는 요즘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 가슴속에 깊이 새겨야 할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위로'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위로의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특히 환란과 고통의 때에 무엇보다도 위로를 말씀합니다.  본문이 바로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주변사람들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이르시되'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로 끝납니다.  또한 '외치라, 말하며 외치라'를 강조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 위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말'의 위로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를 위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뭐라고 위로하고, 외치며, 말해야 할까요? 
 

첫째는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성경의 축소판으로 알려진 이사야의 전반부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고, 후반부는 사랑을 전합니다.  본문은 후반부가 시작되는 첫 장입니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선포한 것이 바로 '위로하라'는 말씀입니다.  전반부에서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아 이제 멸망을 당합니다.  나라가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무수히 죽고, 하나님의 성전은 파괴됩니다.  그리고 남은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  어디를 보아도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말할 수 없는 곤고함이 엄습해 옵니다.  위로는 바로 그 순간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2절에 이렇게 강조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제 곧 모든 고통, 아픔, 슬픔, 심판, 실패, 괴로움, 눈물이 끝나 '지나간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고, 전하고, 외쳐야 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노역의 때가 곧 끝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가운데 다윗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다윗에 관한 말씀을 많이 연구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야기를 많이 전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와 심지어 성경에 없는 이야기까지 소개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다윗의 이야기가운데 저의 가슴에 아주 깊이 새겨진 소중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전에 한번 전한 기억이 납니다만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다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다윗이 왕으로 재임할 때의 일입니다.  평온한 삶이 이어지던 시기에 하루는 다윗이 왕궁에서 가장 유능한 세공장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의 반지를 만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왕은 반지에 왕이 평생에 기억될만한 글귀를 적으라고 말했습니다.  세공장은 자기를 인정해준 왕을 위해 정성과 힘과 기술을 동원하여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여기에 좋은 글귀를 적어야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공장은 당시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왕자를 찾아갔습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솔로몬왕자는 며칠 고민하다가 이렇게 적으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곧 지나가리라"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만약 왕이 영예의 순간에 이 글귀를 본다면 결코 교만하지 않을 것이다. 곧 지나가기 때문에, 또한 만약 왕의 생애에 어떤 역경과 고난의 순간에도 이 글귀를 본다면 결코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 역시 또한 지나가기 때문에..'

다윗은 반지를 보며 기뻐했고, 글귀를 보며 더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다윗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곧 지나가리라'  그래서 다윗의 시편을 보면 지나간다는 말의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이것은 그가 이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높아지고 또 높아져 영예와 축복을 누리면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지나가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고통과 아픔의 순간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힘드십니까?  아프십니까?  눈물이 나도록 외롭고 허전하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다 지나갑니다.  영원한 천국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도 끝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할 때까지 끝이 아닙니다.  밑바닥을 치면, 이젠 올라갈 일만 남은 것입니다.  '이제 곧 지나가리라'  이것이 여러분의 삶에 큰 위로와 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긍휼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노역의 때가 끝난다, 지나가는 것과 함께 죄악이 사함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지만 이젠 사함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죄악이 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혜가 임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의 긍휼과 자비로 치유되고, 살아나고, 모든 것이 더 좋은 상태로 회복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방법은 크게 2가지로 늘 나타납니다.  하나는 공의고,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공의와 사랑이 그의 자녀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공의가 중심이고, 반대로 신약은 사랑입니다.  이 둘의 성경을 합쳐야 비로소 성경이 온전해 집니다.  자녀를 대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공의만 있지 않고, 사랑만 풍성하지 않습니다.  공의와 사랑은 언제나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역사와 이스라엘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사건과 역사 속에 잔잔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방치하거나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깨우치기 위해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깨닫지 못했고, 돌아서지 않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은 언제나 공의였습니다.  범죄한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매를 드셨습니다.  물론 때리시는 하나님은 더 아프셨지만 공의의 하나님이기에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에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보며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매를 맞아 아프고 쓰라린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싸매어 주셨고,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공동체만이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받은 그의 자녀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은 그냥 무관심하거나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깨닫게 하고, 경고하고, 사인을 계속 보냅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결국 사람막대기와 인생채칙의 매를 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긍휼과 자비로 다가오셔서 상처를 어루만지시고, 싸매어주십니다.  은혜의 손길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으로 언제나 다가오십니다.  나를 이렇게 늘 다루어가십니다.  그래서 공의의 하나님 앞에 나를 철저히 돌아보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 앞에 긍휼과 자비의 손길을 기다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아프고 쓰라릴 때 더욱 긍휼이 임합니다.  그래서 호세아처럼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1-2)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사54:7-8) 

여러분, 하나님이 잠시 우리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다시 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넘치는 진노로 그의 얼굴을 잠시 가렸으나 이젠 영원한 자비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이제 힘들고 어려운 모든 곳에 주의 자비와 긍휼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큰 위로를 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뜻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5절까지를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를 강조합니다.  앞에서 말하는 '말'보다 강도가 훨씬 더 센 '소리'입니다.  여기 외치는 소리의 내용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1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지금부터 70년 후의 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70년이 아니라 700년 후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선포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그분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의 사역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눅3:3-5)

누가는 여기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였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만들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사역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이렇게 결론을 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여기 여호와의 영광은 메시야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분의 뜻을 말합니다.  

이제 그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멸망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바벨론으로 끌려가지만 포로생활에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00년이 지난 후 메시야가 탄생한다는 하나님의 깊은 뜻입니다.  지금은 고통이고, 슬픔이고, 눈물이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역사의 모든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도 뜻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알 수 없는 오묘하고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에 심지어 우리 삶에 나타나는 고통과 아픔도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우연은 없습니다.  믿는 자의 가는 길에는 더욱 우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필연 속에 있고, 개인과 공동체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깊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고, 단 5분후의 일도 알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70년, 700년, 아니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나 환경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어떻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8-9) 

또한 생각이 많은 바울도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5)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로 우리의 길을 같은 위치에 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미련한 것이 사람의 가장 지혜 있는 것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가장 약한 것이 사람이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미련해 보이고, 안타깝고, 때론 원망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궁극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믿음의 길에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확실한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받고, 수용하고, 기다릴 뿐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그것을 발견합니다.  요셉의 생애는 꿈을 이룬 기쁨보다 그가 당한 시련과 고난이 더욱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형들의 시기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17세의 어린나이에 애급으로 팔려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좀 살만 했더니 이젠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누명을 쓴 것이고, 억울한 일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대부분 여기에서 주저앉습니다.  사람도 싫겠지만 하나님이 더 야속하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모든 현실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천재였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 주면서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가 풀려나가면 자기를 꼭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관원은 요셉의 도움으로 풀려났지만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요셉은 다시 2년 동안 감옥에서 힘들게 지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이젠 모든 것이 지쳐갑니다.  다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야속하고 원망스러울지 모릅니다.  이젠 모든 고통 제발 끝내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사람도 하나님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에게 찾아온 큰 위기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토록 신실한 사람 요셉을 고통 속으로 몰아가시고, 침침한 감옥에 가두어 두는가를 요셉도, 모든 사람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30세에 애급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고대애급의 문헌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이 고위관직에 나가려면 만30세가 되어야 한다는 헌법적 규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비록 감옥이었지만, 그것이 당시는 고통이었지만, 2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2년이 지난 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당시는 왜 그랬는지 몰라 힘들어도 지나고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면 감탄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련과 고통들, 내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 선하게 사는데 당하는 모든 괴로움들을 지금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처럼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2년이든지, 아니 그 이상이라도 기다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이제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우리를 높은 곳에 다시 세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먼저 위로를 받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이제 곧 지나갑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더욱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강같이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날마다 위로받고, 또 위로하면서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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