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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릴리의 활기 (느 12:43, 마 28: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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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의 활기 (느 12:43, 마 28:7-10)


경상북도 칠곡군 장천면 옥계동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말 그대로 ‘옥계’입니다. 구슬 같은 실개천이 있는 곳입니다. 11년에 전에 돌아가신 저의 선친은 이곳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2년여 짧은 목회를 하신 곳이지만 아버님 목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작은 시골교회를 목회하시면서 묵상하시고, 묵상하신 글을 많이 쓰셨습니다. 구슬 같은 개천의 물소리를 들으시면서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신 곳입니다. 아버님은 항상 그 곳에 마음이 돌아가면 활기를 얻으셨습니다. 순수한 목회의 열정과 감정이 살아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이 중요한 것은 바로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갈릴리는 화려한 곳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비해볼 때에 아무 존재도 없는 북방지방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시골 동네 출신이었기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이 말은 나다나엘이 한 말이지만 나다나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시각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스승의 삶, 말씀, 정신, 사랑, 3년의 삶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50대의 최대의 적은 용기 상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50대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감격의 상실은 패배를 느끼게 합니다. 인생에서 분명히 성공하고도 감격의 상실로 패배감을 가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분명히 성공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감정의 패배로 헤매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35장에는 야곱의 가정적 환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욕을 당합니다. 디나의 오라비들인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이용하여 살인을 합니다. 이 때 야곱은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합니다. 환난을 당하고, 무기력하고, 진퇴양난인 가정적 신앙적 위기를 맞이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베푸신 벧엘로 올라가 활기를 찾습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울적할 때마다 돌아가는 마음의 고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갈릴리에서 보리라고 하십니까? 예루살렘은 정치와 경제의 도시입니다. 갈릴리는 순수한 서민들의 도시입니다. “도시는 마귀가 만들었고, 하나님은 시골을 만드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갈릴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시골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성지순례를 몇 차례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여러 번 가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도시형입니다. 어디에 가나 장사꾼들이 우글거립니다. 시끄럽고 복잡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도 고난의 길도 소란스럽고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갈릴리는 한적하고 조용합니다. 고요히 묵상하기에 좋은 인상적인 지역입니다. 이곳을 예수님도 사랑하시고 좋아하셨던 것입니다. 
  
‘스피리츠’(spirits)라는 말의 어원은 ‘생기를 불어넣는’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 ‘스피라레’(spirare)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정신이 생겼고, 영혼이 생겼고, 정신을 차리고 살아갑니다. 
  
흔히 ‘정신 놓고 산다’ 혹은 ‘정신 놓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을 놓는다는 말은 생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정신 놓고 산다는 것은 활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니 잠시나마 정신을 놓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사시니 정신을 붙잡았습니다. 정신을 붙잡으니 갈릴리에 활기가 넘쳤습니다. 갈릴리에 보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갈릴리가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갈릴리가 활기를 되찾은 까닭이 무엇일까요?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어 활기가 넘칩니다. 

마태복음 28:7에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의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애급 피난에서 돌아오신 후 나사렛에 머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나사렛의 예수’ 혹은 ‘갈릴리 사람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보지 못할 줄로 알았던 나사렛 사람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다시 보게 되는 기쁨이 갈릴리에 활기가 넘치게 하였습니다. 
  
다 돌아가시게 된 부모님이 눈도 못 뜨고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아들이 왔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큰 아들 왔습니다”라는 말에 큰 눈을 뜨고 손을 뻗습니다. 못 볼 줄 알았던 사람을 만나면 눈도 커지고 다시 활기가 넘칩니다. 그리던 사람을 다시 보는 것은 활기를 되찾는 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보세요.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다니의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줄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고백의 대상인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되니 얼마나 활기차고 기쁨이 넘쳤겠습니까? 
  
창세기 33장에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삼촌의 집에 갔다가 20년의 하란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이 형님을 만나는 극적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부의 극치입니까? 어떤 면에서는 당시의 수사법 가운데 과장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 야곱은 정말 형님을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감격적이고 형님이 용서하고 자신을 만나준 것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9:3에는 여리고로 가시는 예수님을 삭개오가 만납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합니다. 5절에는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삭개오와 예수님이 서로 보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보시니 활기가 넘칩니다. 

예수님은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있어야겠다”라고 하십니다. 이 때 삭개오는 “내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 주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의 것을 억지로 빼앗았으면 네 갑절을 갚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구원은 삭개오와 예수님이 서로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보면서 영혼의 활기를 되찾은 것입니다. 
  
연예인이나 인기 스포츠맨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사진을 찍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일전에 김연아가 학교에 나타났습니다. 총장까지 김연아 마중을 나왔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핸드폰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도 가끔은 “TV에서 봤습니다”라는 인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TV에 나온 목사님’이라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여 제가 ‘팬 서비스’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치원 애들도 노래합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유명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예수님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활기가 넘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욥은 수많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다시 회복합니다. 재산도 자녀도 건강도 다시 회복한 다음에 그는 “지금까지 내가 주님을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주님을 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훨씬 더 확실합니다. 보게 되면 활기가 넘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읽은 영어 수필집에 있었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어떤 영국인이 인도에 가서 어린 시절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인도코끼리가 새끼를 낳게 되었고 아기 코끼리와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서 아쉽게 아기 코끼리와 헤어졌습니다. 오랜 후 그가 성인이 되어 다시 인도에 돌아왔습니다. 어느 코끼리인지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집에 사환으로 있던 인도사람은 오래 전 친하게 지내던 아기 코끼리가 자라 이젠 늙은 코끼리가 되었다고 그 코끼리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코끼리는 어릴 때 그 소년을 만나 얼마나 기뻐하는지 발을 구르고, 몸을 뒤뚱거리고, 귀를 펄럭이고 소년을 태우고 즐거워하더랍니다. 코끼리가 사람을 식별하는 것은 후각으로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이지만 그 냄새로 사람을 식별하여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최근에 출판된 마르바 던의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마르바 던은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리를 잘 쓰지 못합니다. 당뇨가 심하여 신장에 문제가 생겨 투석을 하고, 시각장애가 와서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주 훌륭한 영성신학자입니다. 그녀는 ‘기쁨’(Joy)의 첫 글자를 항상 대문자로 쓴다고 합니다. 기쁨이 환경으로 인한 단순한 벅참이나 행복이나 감격을 뜻하는 말이 아님을 상기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변화되면 그 깊고 영속적인 확신과 감사와 신뢰가 내 것이 되는데 바로 그것을 나타내고 싶을 때만 ‘기쁨’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 기쁨을 회복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 활기를 다시 얻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얼마나 좋은 찬송입니까?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 나라의 활기를 느낍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보는 즐거움으로 우리 삶에 활기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을 만났던 사역의 중심지로 가므로 활기가 넘칩니다. 

마태복음 28:10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만났습니다. 
  
‘연상’(associ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플 때 듣던 노래를 들으면 다시 아파집니다. 입덧이 심할 때 입던 옷을 입으면 구역질이 납니다. 원래 장소로 가면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심리현상을 연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3년의 공생애를 지내던 그 때의 감격을 되살리려고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보자고 하십니다. 
  
결혼 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결혼사진을 다시 꺼내보고, 연애편지를 다시 읽어보고, 신혼여행지 함께 가보는 등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렇게 옛날을 다시 회상하므로 당시의 감정을 다시 되찾고 어려움을 해소하고 가정을 회복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옛날의 그 자리로 돌아가 보는 것은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는 ‘허영의 시장’이 있습니다. 허영의 시장은 만나고 싶지 않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입니다. 죽은 것처럼 활기 없는 영혼이 모여 있습니다. 인간다움이라곤 없으며 탐욕과 교만과 분노 등이 모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전혀 인간다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탐욕의 도시입니다. 이런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제자들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갈릴리는 소박한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사랑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그 때의 감격과 사랑과 진실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과는 파괴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은 산산조각이 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전적 헌신을 다짐하고 따랐던 첫 사랑의 장소가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갈릴리는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고기를 잡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베드로를 만나던 날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여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곳이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여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갈릴리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릴리는 모든 제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빛 아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발견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바라보니 활기가 넘쳤습니다. 
  
마태복음 4:23에는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구석구석 안다니신 곳이 없습니다. 갈릴리는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과 기적이 묻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기쁨과 놀람의 자리입니다. 이곳을 회상하면 활기를 되찾습니다. 
  
잭 하일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치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함께 하지 않으므로 절망하고 탈진합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이전의 사역을 회상하니 활기가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린 바압은 ‘즐겁게 안식할 날’에서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은 기도와 놀기 둘 다를 포함한다고 하였습니다. 놀지 않고 기도만 하는 안식일이나 기도는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안식일은 둘 다 반쪽짜리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놀지 않고 기도만 하면 활기가 없고 의무적인 종교로 변질합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놀기만 하면 영적으로 둔해지는 일탈 행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영성생활, 영성훈련을 한다고 하면서 감격적 신앙의 생활이 없으면 활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참 생활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고, 전하면 활기가 없습니다. 부활 후의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다시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의 말씀을 회상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3년을 사시면서 주무시고, 피곤해 하시고, 화를 내시고, 주리신 예수님을 갈릴리에 와서 이런 예수님의 삶을 다시 보니 활기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를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시작해서 갈릴리의 일들을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주실 때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갈릴리의 일을 말씀하시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활기가 넘칩니다. 

  
결론 

사무엘 하드리(Hardly)는 19세기에 뉴욕의 주정꾼, 창녀를 전도하던 전도자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사무엘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유언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는 타락하여 도박꾼이 되고 주정뱅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자살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1882년 4월 18일 44세에 개심하였습니다. 그는  4일간 금식을 하면서 과거를 청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주정꾼들과 창녀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 후 매년 4월 18일이면 그는 자청하여 감옥에 들어가 참회하며 기도하는 날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감옥은 하드리에게 주님을 다시 만나는 갈릴리입니다. 자신의 사역을 돌보는 자리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갈릴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회상하는 갈릴리입니다. 이런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의 감격으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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