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장 큰 기적 (요 2:1~11)

  • 잡초 잡초
  • 200
  • 0

첨부 1


가장 큰 기적 (요 2:1~11)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결혼식 설교용으로 자주 인용되는 성경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처음 표적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이라는 말이 반드시 시간적으로 처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성의 차원에서 처음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열거할 때 중요한 순서대로 말하는 것처럼, 또 신문 1면에 그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를 싣는 것처럼 요한이 처음 표적이라고 말한 것은 가장 중요한 표적, 가장 주된 표적이라는 뜻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요한복음의 기록이 시간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라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 예수님이 예로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사건이 기록돼 있는데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일로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같은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다른 복음서의 시간이 더 옳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기록의 순서가 반드시 시간 순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대로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이 처음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었다면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그것을 놓쳤을 리가 없습니다. 첫째는 늘 사람의 시선을 끌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다른 기적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일이라든가 문둥병자를 깨끗케 한 일이라든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이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 것처럼.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성경은 선별된 기록이라는 사실이에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서 포함시키고 강조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을 제일 처음 소개함으로써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냐. 지난주에 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서 요한이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이었지요. 그러기에 그 본문 중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장에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네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한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냥 거듭남이라고 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란 말이냐. 

사람이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부터 소개한 것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은 기적입니다. 물은 물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입니다. 서로 다른 것입니다. 물이 아무리 애를 쓴다고 저절로 포도주로 바뀔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리 애를 쓴다고 자기 스스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의 중요성까지는 인정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마음대로 씁니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한 정당으로 거듭나겠습니다.’ 누구 맘대로. 또 기업인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기업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를 않나, 마치 자기의 의지로, 자기 노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인간의 영적인 거듭남은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이 스스로 거듭날 수 있다면 예수님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차별성, 예수님의 유일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 이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이 세례요한의 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차별성,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기독교 신앙의 차별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될 이유, 그리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다 엿볼 수 있는데 물로 세례를 주는 것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것을 폄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하나의 형식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식이고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상징이 있습니다. 상징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상징은 무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에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지요. 세례식도 하나의 형식입니다. 또 성찬식도 형식입니다. 예배의 많은 순서도 형식입니다. 예배당의 구조도 형식입니다. 안수하고 기도하는 것도 형식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고개 숙이는 것도 형식이고 손을 모으는 것도 형식이고 무릎을 꿇는 것도 형식입니다. 목사가 가운을 입는 것도 형식입니다. 

또 가톨릭에서 성수를 뿌리는 것, 성호를 긋는 것도 다 형식입니다. 이런 형식이 쓸모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명시하는 실체가 따라주지 않으면 그것은 무의미한 종교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 물로 세례를 줄 때 성령으로 세례 받는 일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의 머리에 물 뿌리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침례가 물 뿌리는 것보다 낫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적인 세례는 침례라고 고집하고 사람이 물속에 다 들어가야 된다고 주장하는데 어차피 세례식이 하나의 형식이라면 물에 들어가는 것이든 물을 뿌리는 것이든 차이는 없는 것입니다. 그 상징이 의미하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물속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자체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물속에 백번 들어가도 예수님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만 하지 못합니다. 또 목사가 누구에게 안수하고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안수하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임하신 다든가 병이 낫는다든가 은사가 나타난다든가 예언을 한다든가 복을 주신 다든가 이런 영적인 실체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사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람 머리에 바른 무스를 제 손에 묻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사가 가운을 입을 때 정말 하나님이 그의 허물을 가려주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옷을 입혀주시지 않는다면 가운을 입는 것은 교인들 앞에서 폼 잡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종교적인 형식이나 외형을 넘어서 실체를 맛보기를 목말라합니다. 우리는 우리 예배가 형식으로 끝나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경험이 되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방법에 열쇠가 있다고 생각해서 좀 더 신령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찬양을 많이 불러야 되는 줄 생각하고 음악을 많이 동원해야 되는 줄 생각하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방법에 열쇠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심령 상태와 마음가짐에 열쇠가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면 찬양과 경배도 또 하나의 형식이 될 것이고 그 방법에 열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배드리셨을 때 그 당시에 오케스트라가 있었겠습니까. 밴드가 있었겠습니까. CCM이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방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렸다고 했을 때 그들에게 오디오 시스템이 있었겠습니까. 빔 프로젝트를 사용했겠습니까. 찬송가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얼마든지 사람들이 은혜 받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법에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고 누가 어떤 방법을 사용했다고 들으면 나도 그것을 흉내 내고 나도 그것을 도입하려고 애쓰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 안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을 믿고 또 그것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지요. 

거기에 대한 자신이 없으니까 남들이 사용한 방법을 흉내 내려고 하고 그렇게만 하면 젊은이들이 모이고 그렇게만 하면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줄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고 내게 주신 은혜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은사를 나눠주시고 믿음의 분량을 나눠 주시고 자기의 믿음의 분량대로 예언하게 하시고 믿음대로 역사하신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결국은 나의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게 주신 은혜, 내 믿음, 여기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그것이 내 믿음이 내 믿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믿음을 심어줄 수 있고 내게 주신 은혜가 남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이 교회에 주시는 믿음이 되고 또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적인 실체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인간의 종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할 수 있는 것은 물로 세례를 주는 것뿐이었지만 성령으로 세례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차별성과 유일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종교의 한계가 바로 여기입니다. 모든 인간의 종교는 물로 세례를 주는 것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으로 세례주시는 일은 예수님만이 하시는 일이고 그리고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했어요.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기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이와 같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보다도 주님이 그와 같은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고 더 진실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진심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색하고 하나님은 변덕스럽고 하나님은 믿을 수 없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고 우리가 용서받기 원하는 마음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우리가 복을 받기 원하는 마음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고자 하는 의지가 더 큽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더 크고 더 진실하시고 영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내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큰 기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첫 기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primary-가장 우선적인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우선순위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에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병이 낫는 것이든 물위를 걷는 것이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든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이든 아무리 이런 표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로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허비되는 것입니다. 

가장 우선순위는 인간의 영적인 변화인데 왜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느냐.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렵습니다.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그 많은 기적을 행하신 다음에 한탄하셨어요. ‘만일 내가 행한 기적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소돔은 베옷을 입고 회개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사람이 회개하고 회개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정말로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그것은 어려운 일이고 귀중한 일이고 가장 아름답고 신비한 일이고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영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면 예수님이 헤롯왕 앞에 끌려갔을 때 헤롯이 기적을 보기를 원했기 때문에 물을 한잔 가지고 오라고 해서 예수님에게 그것을 포도주로 바꿔보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 들어주시지 않지요. 그 헤롯왕은 미련한 인간입니다. 불신자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물 백 잔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는 것보다도 사람 한 명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거듭나지 않는다면 물 백 잔이 포도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비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고 표적은 과시용으로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깨닫고 또 회심하고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 이르게 하도록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영적인 변화이고 질적인 변화이고 내면적인 변화이고 소속의 변화이고 법적인 변화이고 위치적인 변화이고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은 당사자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를 어렸을 때부터 다녔지만 정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열일곱 살의 일이었는데 제가 열일곱 살에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 첫째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제가 느낄 수 있는 분명한 변화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거룩함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 둘째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다는 것, 셋째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전에는 제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 제 사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까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제 안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건 일시적인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검증을 받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제가 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제가 마가복음 1장을 강해하면서 느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례요한이 자기가 베푸는 물세례와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세례를 구별했습니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도 진지한 것이고 이건 그들의 진심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한계가 있지요. 이처럼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 중에도 신앙에 관심도 있고 마음도 열려있고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를 회개까지 했고 죄사함을 얻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는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불완전한 회심입니다. 진정한 회심은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은 내면적인 영적인 변화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구하면 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구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주가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주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없으면 예수님께 구해야 됩니다. 성령이 떨어진 게 아니고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부족한 게 아니고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포도주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포도주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인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