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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름을 바꾸시는 하나님 (창 1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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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바꾸시는 하나님 (창 17:1~14)


창세기17:1-14
(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잃어버린 13년

우리는 흔히 ‘잃어버린 10년’, ‘잃어버린 몇 년’이란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과연 잃어버린 시간이고 무의미한 시간이었는지 우리는 세월의 무게를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잃어버린 시간이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많은 일들을 하십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내적으로 성숙하는 시간이요, 잃어버린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경의 침묵기가 있습니다. 말라기서가 BC 400년 경에 기록되었고 그 이후 신약 성경이 AD50년대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450년을 우리는 침묵기, 중간기라고 합니다. 마치 잊혀진 세월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기간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진행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이 완성되었고, 이스라엘은 율법 공동체로서의 틀을 다졌습니다. 

인간 역사에 대한 회의와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싹텄습니다. 우리가 소위 암흑기라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이나 메시야에 대한 사상이 정립되었습니다. 부활과 내세에 대한 교리도, 천사에 이론도 확립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구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을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없거나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잃어버린 13년이라는 세월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낳던 때가 아브라함의 나이 86세 때였습니다. 16장 16절이 그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17장은 아브라함 99세 때의 일입니다. 1절은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란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는 딱 한 구절 차이이지만 무려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75세에 부르심을 받아 86세에 이르기까지는 11년이었지만 성경으로 무려 5장에 기록될 정도로 아브라함 생애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86세에서 99세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침묵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 때이고 아브라함 인생에서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13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오해가 있었거나 전혀 말씀하지 않으실 정도로 단단히 틀어졌던 것 같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15:4)고 약속하였지만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 때문에 하나님이 화가 나신 것일까요? 그 자세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이 13년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지 않았고 그 때의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제가 추측컨대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13년을 체념의 13년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 13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미련이나 기대를 접은 13년입니다. 무언가를 기대하면 산다는 것은 희망이 있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 기대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기대를 접으면 인생은 무미건조해지지만 대신 평안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대신 이스마엘로 만족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됐다 하면서요. 99세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언약을 다시 기억나게 하시고 약속의 자녀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17절 이하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다고 합니다. 실소를 한 것입니다. 100세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는가? 그러면서 ‘하나님 괜히 헛수고 마시고 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잘 되게 해주십시오.’ 합니다.

하나님에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다 이처럼 침묵의 시간, 체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세는 그 인생을 40, 40, 40으로 나눕니다. 처음 40년은 애굽의 왕자로서의 40년입니다. 영어로 ‘something’ 인생이라고 합니다. 무언가 할 것 같은 기대감이 있었지만 열매가 없이 끝났습니다. 그 다음 40년은 자기 동족을 억압하던 애굽 관리를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달아나 그곳에서 목자로 살던 40년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체념의 시간이요 인생의 침묵기입니다. ‘nothing’ 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40년이 지날 무렵에 호렙 산 떨기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모세는 새로운 40년을 시작합니다. 출애굽 지도자로서, 또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서의 인생 40년이었습니다. ‘everything’의 시기입니다. 인생의 풍성한 열매를 맺던 시기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안디옥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기까지 대략 13년 동안 다소에서 은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잃어버린 13년처럼 보이고, 모세에게는 암흑의 40년처럼 보이지만 우리 인생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시간입니다. 이 때는 다지는 때요, 성숙해지는 때입니다. 밖으로만 향하던 사람이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는 때입니다. 인생에 정답이 똑똑 떨어지는 것만 기대하던 사람이 인생에 여러 개의 답이 있을 수 있겠구나하고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는 시기입니다. 

이것을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사라지고, 자기 가진 힘에 대해서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좋을 정도로 유연하게 됩니다. 그릇은 비워져야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것들을 비울 때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이 13년이라는 시간은 아브라함이 비워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비우는 것은 우리 의지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필요합니다. 세월이 우리를 비우게 만듭니다.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가장 좋은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엘 샤다이

체념하고 살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와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여러 이름들이 있는데 오늘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은 ‘전능한 하나님’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엘 샤다이’입니다. 전능하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없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 하나님은 자신은 이제 죽어버린 고목과 같다고 하며 자기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것 같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시기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잃어버린 꿈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6절입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8절입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꺼진 불을 다시 지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한 갈대를 다시 세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 전능한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끝났다고 체념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희망의 불을 지피신 분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이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전능함은 따뜻합니다. 엘 샤다이의 어원이 그렇습니다. ‘샤다이’란 단어는 원래 ‘산’ 또는 여자의 ‘가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함은 무자비한 전능함이 아니라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따뜻하면서도 힘을 가진 전능함입니다. 최근 이슬람교의 코란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코란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유일성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너무 딱딱합니다. 강력한 율법으로 인간을 통제하는 신입니다. 

이슬람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저울을 들고 인간들의 선행과 악행의 양을 엄격하게 재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70년대 유명했던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란 분은 회교도인데 그는 항상 주머니에 라이터를 들고 다녔는데 죄악이 생각날 때마다 손에 불을 붙여 지옥의 불은 이처럼 뜨겁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슬람 신도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선한 율법의 길을 따르려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하나님이 없습니다. 고난 받으시고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또 인간의 실수마저도 용납하시는 그런 따뜻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없습니다.

전능하시면서도 따뜻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겨울철이 우기이고 여름철이 건기입니다. 여름철이 지나고 10월 경에 처음 오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합니다. 이른 비가 적당한 때에 오고 흡족히 와야 농사가 잘 됩니다. 겨울철 우기를 지나고 5월경 쯤 마지막 비가 오는데 이 비를 늦은 비라고 합니다. 늦은 비도 적당하게 또 충분히 와야 봄 농사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11:14) 우리 인생에도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젊을 때 한 때의 은혜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말년에 하나님은 또 한 번의 은혜의 비를 허락하십니다. 내 인생에 축복이 사라졌다고, 불이 껴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른 비와 함께 늦은 비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1절의 말씀처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자세입니다. 여기 완전하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탐밈’입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고, 실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딴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약속의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인간의 눈에는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고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의 약속의 성취뿐만 아니라 그 방법과 시간까지도 전적으로 믿고 맡기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어주십니다. 원래는 아브람이었습니다. 이 뜻은 ‘존귀한 아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꿉니다. 그 의미는 ‘열국의 아비’입니다. 사래도 그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 줍니다. ‘왕후’ 곧 ‘열국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운명을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습니다. 야곱은 잡다 쥐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의 발목이나 잡던 인생을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승부를 이제는 하나님과 겨루는 데서 찾도록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도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은 시므온에서 온 말로 12지파 중 한 지파를 지칭하는 이름이었으나 이제 그는 베드로 곧 페트라라는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서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동양에서는 ‘호’라는 것을 짓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한 번 정도는 이름을 바꾸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 주어진 이름은 자기의 의지나 운명과는 상관없이 항렬을 따라서 또는 부모님들의 판단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커 가면서 자신의 소원이 생기고 자기 성격이나 운명에 대해서 눈이 열리면서 거기에 걸 맞는 이름을 한 번 지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우리 운명을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 인생에서 우리 팔자는 두 번 바뀝니다. 

한 번은 배우자를 만나면서 바뀌고, 다른 한 번은 하나님을 만나면서 바뀝니다. 그래서 결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단지 직접 하나님을 보거나 음성을 듣거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매우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에 형언할 수 없는 절정의 체험이나 깨달음이나 결단의 형태로 나타나시기도 합니다. 

현대 무용의 시작은 마서 그레이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춤을 시작한 것은 1916년 너무 늦은 나이인 22살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 무용가로서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5년 전인 1911년 4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로스엔젤레스 오페라 하우스에서 한 무용을 본 후였습니다. 당시 유명했던 한 무용수가 여신을 흉내내는 춤을 추는 모습을 보다가 정말 머리에 바람이 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합니다. 그 순간을 그레이엄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 나는 여신처럼 춤추는 것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레이엄은 아버지의 반대로 미루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본격적인 춤꾼의 길을 갔습니다.

4대 성인 중 하나인 간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인생을 바꾸었던 결정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땄던 간디는 별다른 특징이 없고 평범하고 결점이 많고 허둥대는 시시한 변호사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날 간디가 남아프리카에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도중 나탈이라는 지역의 마리츠버그 역에 기차가 정차를 했습니다. 그 역에서 한 백인 남자가 타게 되었는데 이 백인은 유색인종과 같은 차를 타기를 거부했습니다. 승무원은 간디에게 3등칸으로 가라고 지시했고 간디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강제로 기차 밖으로 쫓겨났고, 추운 대합실에서 밤새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추위에 떨면서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이 3등 시민으로 부당한 대접받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간디의 비폭력 혁명의 첫 출발이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만나는 순간이고 하나님을 만남으로 그들의 인생이 바뀌는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를 직접 드러내시기도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여러 인생의 계기를 통하여 우리를 각성시키시고, 그래서 우리 인생을 열매있고 충실한 인생으로 바꾸십니다.

아브라함은 ‘존귀한 아비’에서 ‘열국의 아비’로 바뀌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존귀한 아비라는 뜻도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개인적입니다. 자기 혼자 명예와 부를 누리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이 존귀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열국의 아비’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회적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혼자만 잘살고 존귀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복되게 하고 존귀케 하는 지도자로의 부르심입니다. 6절입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아브라함은 단순히 한 민족의 족장 정도가 아니라 많은 민족의 근원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 잘되기를 바라고 나 혼자만 잘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때문에 이웃들을 복되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세상을 복되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로 인하여 한국사회는 도덕적으로 나아지고 축복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언약을 체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어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벌써 두 번째 언약 체결입니다. 첫 번째는 15장에서 있었습니다. 이때는 고기들을 쪼개고 그 사이로 하나님만 지나심으로 아브라함에 주신 언약을 반드시 성취케 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입니다. 언약을 체결하는데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확인하시고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 이후 태어날 모든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이 할례를 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할례는 남자의 성기에 행하는 포경수술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에 태어난 모든 남자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할례의 처음 기원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고백은 분명합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이 할례는 인간 편에서 지켜야 할 어떤 의무조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요, 이 할례를 받은 백성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하나의 사인입니다. 언약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 할례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들이 자꾸 잊어버리니까 아예 몸에 표식을 행함으로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후 할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외적으로 가르는 것은 할례를 받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있었습니다. 제복이나 상징이 주는 힘은 대단합니다. 몇 년 전 홍제동에서 화재가 있었습니다. 진압하던 소방대원들이 6명이나 순직을 했던 큰 사고였습니다. 이 사고 당시 한 소방관은 집 안에 어린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집이 무너지면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 찾아간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불타는 집안으로 아무도 뛰어들지 않았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용감하게 뛰어들었습니까?” 그러자 침대에 누워있던 소방대원이 자신의 119 소방대 옷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소방대원입니다.” 

그 옷이나 상징이 그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할례가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할례 받은 그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본인 또한 할례 받은 자신을 보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임을 확인합니다. 

이제 우리 예수를 믿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할례 대신 세례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슴에는 십자가가 새겨졌고, 우리 가정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대문에는 교패가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표지입니다. 우리는 이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언약의 백성답게 행하고 있습니까? 매일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표식들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굳건히 붙잡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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