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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살든지 죽든지 (빌 1: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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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빌 1:20~26)

     
부활주일을 지나고 한 주간 부활의 소망 가운데 지내셨는지요?    우리가 예배드리는 주일은 주께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을 주님의 날, 주님의 승리의 날로 기념하여 모이기 시작한 초대교회 전통을 따르는 예배의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년에 한 번 부활주일만 아니라 52주 모든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긴 겨울이 끝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이 활발합니다.   죽은 듯하던 나무들이 연한 순을 내고 길가의 꽃들이 행인들의 마음을 한결 가볍고 밝게 만듭니다.   겨우내 죽은 듯하던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면서 거기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주 안에 있는 자들은 그 다음이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주님 다시 오실 때 어떤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가에 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 말씀드리기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임을 믿고 살아갈 때 부활의 참 의미가 있고 나 자신에게 힘이 됩니다.   서해 바다에서 침몰한 천안함과 함께 고귀한 생명을 잃은 해군 병사들의 죽음 소식으로 전 국민이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삶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은 그 소식을 듣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어제 뉴스를 통해 폴란드 대통령 전용기의 추락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러시아를 방문하던 폴란드 대통령 부부와 주요 인사들이 타고 가던 비행기 추락으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여 폴란드 국민들을 슬픔에 빠지게 하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항상 사람들 곁에 있습니다.   다만 그 때를 모르고 살고 있을 뿐이지 유명인도 이름 모를 평범한 사람들도 때가 되면 이 땅을 떠납니다.   

어느 한 생명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없습니다.    이름 없는 소시민의 죽음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사랑스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생명인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버린다 간단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넘어선 부활이 있음을 알고 믿는 신앙은 생명의 소중함을 더욱 강하게 하며 살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도록 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아주 커다란 영적 유익을 줍니다.  달리 말하면 내세신앙이 주는 영적 유익입니다.   이 땅에서 확실한 믿음 가운데 살 수 있으니 나 자신에게 복이 되고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니 이중적인 복입니다.   부활 소망을 가진 사람들, 즉 내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이 땅의 것을 전부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희비극에 연연하여 소중한 생명을 함부로 버리지도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르며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 또한 다릅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자들은 어차피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은 맘껏 먹고 마시자는 태도로 오늘을 삽니다.   그러나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은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준비하는 날로 삼습니다.

오늘 본문의 범위를 12절부터 확대하여 자세히 읽으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바울을 염려하고 무사 귀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따뜻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옥살이를 하며 도리어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바울의 따뜻한 마음도 보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나를 위하여 염려하고 기도하는 그 사랑이 하나님께 전달되어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돌아갈 것을 확실히 압니다.   내가 석방되어 다시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 나로 인하여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예수 안에서 더욱 많아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교우들에게 사랑의 빚을 진 바울은 아무쪼록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도의 죽음은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이며, 이 땅에서의 수고를 마치고 주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죽으면 고난으로 충만한 이생의 삶을 마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있게 될 것이니 나 자신을 위하여는 육신을 떠나는 것이 더욱 좋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육신의 삶을 마치고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자리로 이동하는 것이니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은 바울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이 많은 육신의 삶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특권을 포기하고 빌립보 교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갈 것을 기대합니다.   지금 내가 순교하면 그리스도를 더 빨리 뵐 수 있어 나에게 유익이지만, 살아서 감옥을 나감으로 그들의 신앙 진보에 아무쪼록 유익이 되고픈 섬김의 자세입니다.   육신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것을 알지만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살기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고자 힘쓰는 바울의 마음이 여기에 잘 드러납니다.   빌립보서 2장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하는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 영광을 포기하고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고 종의 모양으로 낮아져주셨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우리 인생들을 죄에서 건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본 받아 사는 것이 바울의 평생 소원이고 삶의 목표였습니다.  바울은 언제 사형 당할지 혹은 언제 석방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본 받아 실천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육체를 떠나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합니다.  나 개인으로서는 그보다 더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찌꺼기보다 못한 나, 죄인 중의 괴수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를 위하여 주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불러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불러주셨으니 그 은혜에 감격하여 내가 죽기까지 충성하리라’는 고백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하러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본 받아 나도 육신으로 이 땅에 머물러 살면서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리라는 각오가 굳게 서려있습니다.    

바울의 생존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살려두실 것이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습니다.   내가 육신으로 살아 있으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하니 유익하고, 죽으면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니 더욱 좋다는 부활신앙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교우들을 향한 바울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자신을 낮추어 성도들의 유익이 되려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복음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보다 더 영광이고 자랑인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고 염려하느냐?’  이렇게 교우들을 얕잡아 책망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바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유하게 해주시면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진보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말로 위로합니다.   이것이 다른 성도에게 유익을 끼치는 참 믿음입니다.   떠날 때는 떠나더라도 오늘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복음 전하는 일에 마지막 순간까지 동참하리라는 헌신고백입니다. 

혹시 바울의 마음에 이중적 꼼수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교인들을 핑계삼아 출옥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그런 꼼수말입니다.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런 이중적인 마음은 없어보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을 염려하는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함이고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 믿음의 진보가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은 오늘 읽은 본문 20절,21절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는 것이 되고,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십니다.

여기 바울의 믿음의 목적과 삶의 목적이 분명하게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각자 자신들에게 물어봅시다.  예수를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구원 얻어 천국가기 위하여...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와 목적 전부인가요?   지옥으로 떨어질까 무서워 예수를 믿습니까?   그것이 여러 이유 중에 하나일 수는 있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이 정말 있을까?    만일 있다면 어쩌지?  없다고 큰 소리하자니 찜찜하고 불안하여 최소한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건성 건성 예수를 믿는 자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믿음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를 구주로 확실하게 고백하고 사는 사람들은 죽어 천당가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날 구원하신 주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기쁨과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날 구원하신 주 감사하여 내가 어떻게 하면 주의 복음을 위하여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 내 믿음의 촛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과 삶의 모습을 통해 거룩한 성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아무쪼록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 하였습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불신자들과 다름이 없이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아귀다툼하고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멸시하며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삶을 산다면 어찌 복음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현 세상에 사는 동안 영원한 그 나라 시민으로 살 것을 바라보고 준비하지 않으면서 이 땅에 더 많은 것을 쌓아두고 그것으로 위로를 얻고 안심하며 보호를 받으려고 한다면 과연 내세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있는 성도라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칭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과는 거리가 먼 자기 나름의 천국을 마음에 그리고 여기서 편안한 생을 누리고 거기서도 영광을 누려보겠다는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에 빠진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아직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지 못하여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려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천국 가려는 데만 목표를 두고 살겠습니까?    

나만을 위한 천국을 꿈꾸고 혹시 거기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질까 불안하여 하나님 눈치 보듯 흘끗거리며 예수 믿는 그런 신앙생활 말고 좀 담대하게 자신을 내어놓는 신앙인이 됩시다.   다른 사람을 발판 삼고 제물로 삼아 내가 천국가려는 그런 식의 믿음은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기타 다른 사이비 이단 종파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들의 열심이 우리보다 더 합니다.  다만 그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을 내어 전도하러 다니는 것이 과연 불쌍한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함일까 자신들이 천당 가기 위함일까요?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시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고 오직 천당행 티켓과 나의 상급과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니 그 목적이 처음부터 다릅니다.   그런 방식의 믿음은 하나님을 너무 잘못 이해하고 잘못 믿는 자기 확신에 불과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제 좀 성숙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다른 이들에게도 유익이 되는 그런 삶입니다(고전10:31-33).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믿고 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본향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맡겨주신 이 땅에서 주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는 천국 백성으로 살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너무 우울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살지 맙시다.  남들처럼 많이 배우지 못하고 유명하지 못하며 더 많이 가지고 누리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쉬워하고 속상해 하지 맙시다.  내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너무 절망하지 맙시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때문에 너무 열등감에 젖어 살지 맙시다.   나를 위해 대신 죽어주시고 나를 위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께서 ‘내가 너를 안다’ 하고 나를 알아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염려하고 슬퍼해야 할 이유 한 가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아직 주를 알지 못하고 세상 즐거움에 빠져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을 위한 염려와 슬픔입니다.   그런 슬픔은 오히려 하늘의 위로로 충만히 채워질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셨고, 야고보 선생님도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 하였습니다.   나의 죄와 교만에 대하여 애통하며 나의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 그리고 영혼들을 위하여 슬퍼하면 하늘의 위로가 풍성히 있을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 신분으로 빌립보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자세히 봅시다.   그의 편지 어느 한 곳에 우울하고 불행한 내용이 안 보입니다.   오히려 감옥 밖에서 자신을 위해 염려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이것이 죽든지 살든지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는 바울의 거짓 없는 기쁨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처럼 늘 기쁨으로 가득합니까?   인생을 즐겁게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올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자랑할 수 있도록 내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을 가득 채워봅시다. 

부활신앙으로 살면 장차 들어갈 영원한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기 때문에 오늘을 허투루 살지 않습니다.   내세를 기다린다 하여 오늘을 무시하고 헛되이 버리지 않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은 마지막 날 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빠짐 없이 드러날 나의 성적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그것으로 마지막이 아니라 영원한 내세를 향한 나그네 걸음의 마침입니다.   아브라함과 믿음의 조상들이 그런 믿음으로 나그네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성,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살았던 것처럼 성도들도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로 인하여 존귀하게 되심을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살아갑시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으며 주님과 함께 하는 그 나라에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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